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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렁이 같은 우리 (사 41: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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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같은 우리 (사 41:14~16)

1. “지렁이 같은 ‧‧‧”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앙이 좋다 하는 분들이 자신이나 인생에 대해서 지칭하는 표현 가운데 다소 ‘인간비하’ 혹은 ‘인격무시’로 여겨지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 죄인 자식이 ‧‧‧”, “이 벌레만도 못한 저를 ‧‧‧”, “마른 막대기 같은 저를 ‧‧‧”, 심지어 김선도 목사님 집회 시 들은 어느 사모님의 고백은 훨씬 더 자극적이고 강합니다. “나 같은 쌍년이 ‧‧‧” 그러나 그 분들은 이러한 표현으로 자신을 비하한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들을 이런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낮은 자존감에서나 사람을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다만 주님을 믿지 않을 때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주님이 없다면 자신의 모습이 어떠할지를 알고 그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표현들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시는지요?

그런데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서 자신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성경이 여러분을 싸잡아서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부르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지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이것은 야곱, 즉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나아가서 인간 전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왜 하나님은 당신의 고귀한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를 이렇게 모욕적인 표현으로 부르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지렁이가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지렁이는 세계적으로 5500종정도이고, 우리나라에는 60종이 있다고 합니다. 주로 시궁창이나, 썩고 부패하고 더러운 곳에 살고,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는 것, 그리고 뼈도 없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이 징그럽기가 짝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이 지렁이가 없으면 농사나 식물의 성장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여성분들은 이 지렁이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 분들이 바르는 립스틱의 주원료가 지렁이이기 때문입니다. 지렁이를 말려서 가루를 내면 아주 보들보들하기 때문에 화장품의 원료로 많이 쓰인다고 합니다. 붉은색 립스틱은 지렁이의 피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아무리 지렁이가 우리의 삶에 유익하다고 해도, 우리를 지렁이에다가 비유한 것은 그렇게 달갑지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짐승이나 곤충도 많은데, 왜 하나님은 하필 지렁이에다가 우리 인생을 비유하셨을까요? 지렁이가 비 온 뒤에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모습이 그렇고, 뭔가에 짓눌려 죽어있는 것이나, 햇빛에 금방 말라버린 모습이라든지, 아무튼 지렁이 생각을 하면 기분이 별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는지를 꼭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지렁이 같다고 하신 두 가지 이유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을 떠난 그 모습이 지렁이 같아서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있는 현 상황과 그로 인하여 벌어질 결과를 두고 이 표현을 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1장 2절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절인 66장 24절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이라는 말씀으로 끝맺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만민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사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셨고, 또 그들을 ‘하나님의 신부’라고도 부르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어느 민족, 어떤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해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최고, 최선, 최대의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의 으뜸이 되었고, 가장 뛰어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한 사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❶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이방인들과 언약을 맺었으며, 그들의 우상을 가져다가 섬겼습니다. 심지어 주변 민족들의 우상이란 우상은 죄다 가져다가 섬겼는데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을 우상백화점으로 만들었습니다. 

❷ 또한 그들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상수리나무를 자랑했습니다. 신앙적인 가치와 기준이 완전히 무시되고, 세속적인 가치와 불신자들의 기준에 따라 살았다는 말입니다. 

❸ 또 예루살렘의 여인들(“시온의 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였든지, 그 사치가 극에 달했으며, 그렇게 사치스럽게 자신을 꾸미고서는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면서 그 요염하고 선정적인 눈으로 뭇 남성들을 유혹했습니다. “아기죽거려 행했다”,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공공연하게 성적인 유혹과 범죄를 일삼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회가 음탕한 개인, 음란한 가정, 음란한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지요(3:16-26). 

❹ 예전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군대와 무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만, 이제는 자신들과 국가를 지켜주는 것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이며, “다시스의 모든 배”, 즉 경제적인 가치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❺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월 첫째 날에 드리는 제사,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다는 일종의 헌신예배였는데요, 이것을 빠짐없이 드리고 있었습니다. 매주 안식일마다 모였습니다. 대회라고 해서, 초막절 마지막 날, 유월절 마지막 날 등 특별한 절기에 대중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정한 절기에 빠짐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제일 좋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모든 종류의 제사를 다 드리고 있었으며, 그때마다 최고의 제물을 드렸으며, 그리고 드리는 자들은 손을 펴고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등 정말 그럴듯하게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복을 바라는 것이요 형식일 뿐,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❻ 이사야가 지적하는 문제의 또 다른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식으로 산 결과, 이미 하나님께 맞았다는 것입니다. 1장 5절부터 9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고 말합니다.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으며, 상하고 터지고 최근에 맞은 흔적까지 선명합니다. 성한 데라고는 없이 피투성이이거나 푸른 멍이나 흉터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땅은 황무하였고, 성읍은 불타고, 소유물들은 다 강탈당하여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하나님의 눈에 “지렁이 같이” 보였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렁이/ (톨라)”라고 하신 이유는 곧 이어서 그들에게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당시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던 이스라엘은 머지않아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인데, 포로로 지낼 그들의 모습이 바로 이 “지렁이”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지렁이”는 '벌레', '구더기', '유충'을 의미하는데, 특히 이것은 시체를 포함하여(사14:11, 사66:24) 썩어가는 물질에 거하는 것입니다(출 16:20). 

대학 시절 서울의 쓰레기 처리장이었던 난지도 봉사를 다니면서 본 난지도 주민들의 생활이 바로 이러 했습니다. 서울 시민들이 버린 쓰레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산을 이루고 있는 그 더미에서 아지랑이처럼 썩으면서 나는 열이 오르고,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 가운데서 쓰레기를 뒤집으면서 그 속에서 그래도 돈이 될 만한 것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집은 남들이 버린 쓰레기로 만들었고, 그들의 생활도구도 남들이 버린 쓰레기이며, 그들의 생활도 그렇게 쓰레기와 하나로 보였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당시 난지도 주민들이 쓰레기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지렁이라는 표현이 썩어가는 가운데 꿈틀거리는 벌레와 같다는 말씀을 설명하기 위하여 드리는 말씀이지요. 장차 포로로 끌려갈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방 땅, 우상과 죄악으로 가득한 곳, 그 어둡고 암울한 곳에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모습으로,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비천하여 그들에게 짓밟히는 존재로 살아갈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이 지렁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버린 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금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러하고, 과거 주님을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모습이 이러했으며, 혹시 모르겠습니다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의 삶이 이러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바라보십시오. 고상하고 아름다운 하늘 사람입니까? 아니면 비천한 지렁이입니까?

2) 장차 변화될 모습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저와 여러분을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는 현재의 최악의 상황과 그 이후 포로로 끌려갈 것, 이 두 사건을 넘어 그 뒤에 벌어질 일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즉 이 표현에는 현재 범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장차 포로로 끌려가 고생할 이스라엘의 모습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말씀에는 역설의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천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영원히 머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백성을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장차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비록 모든 것을 잃고 포로로 끌려가서 심한 고난을 겪고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여 지렁이 같은 처지가 되겠지만, 반드시 회복될 것이고, 그리고 회복 그 이상의 영광을 얻게 될 것을 이 “지렁이 같다”는 말씀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회복 그 이상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굳세게 하시고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셔서 결국 대적에게 승리하게 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같이 되어서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그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도우실 것이고 강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13). 그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불러 날리겠고, 회리바람으로 그것을 흩날려 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괴롭히던 민족과 나라들이 곧 멸망할 것인데,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렁이 같이 비천하고 허약하고 썩은 데서 꿈틀거리기나 하던 그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역설이요, 하나님께서 연출하실 대반전 드라마입니다.

비록 지금은 사람들 눈에, 때로는 스스로 보기에도 한없이 부족하고 미천해 보이나, 하나님께서 강한 자 큰 자 능한 자들을 이기는 도구가 되게 하시겠다는 역설의 의미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는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 3월에 방송된 “SBS스페셜 - [인생역전 청소의 힘]”이라는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인생의 역전, 삶의 대반전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세상의 온갖 불행은 다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마스다 미쓰히로 라는 한 일본인이 있습니다. 그가 사업에 실패했고, 이혼하여 가정도 깨어졌으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갖 쓰레기더미로 가득 찬 자신의 방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그때 한 친구가 찾아와서 그의 방 쓰레기는 물론, 그의 집을 정돈해 주었습니다. 청소를 마친 친구가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나자, 절망의 나락에 빠져있던 그 사람은 갑자기 희망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에 영감을 얻은 마스다 미쓰히로는 그 친구와 함께 청소사업을 시작했고, 그것으로 성공하여 <꿈을 이루어주는 청소력>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일본 최고의 성공학 강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절망의 나락에서 인생 밑바닥의 삶을 살았으나 바로 그 자리에서 인생 역전을 경험한 것이죠.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런 세상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들려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 천한 자, 부족한 자, 힘없는 자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호령하는 자들로 만드시겠다는 역설의 의미로서 우리를 향해 “지렁이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지렁이가 그냥 지렁이가 아닙니다. 여러분, 지렁이 왜 지렁이인지 아세요? 원래 “지룡”, 즉 ‘땅의 용’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지렁이가 되었더라구요! 그러니까 지렁이가 지렁이 끝날 것이 아니라, 신화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용처럼 포효하면서 하늘을 날면서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아멘? 

어떤 농부가 산에 갔다가 독수리 새끼를 잡아왔습니다. 그것을 닭장에 넣고 닭과 함께 키웠습니다. 그렇지만 독수리는 역시 독수리여서 닭들과 똑같이 먹이를 주는데도 날이 갈수록 덩치가 점점 차이가 났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놀러왔다가 그 독수리를 가리키며 “어, 저놈은 왜 저렇게 큰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저 놈은 닭이 아니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저 놈 저거 독수리 아닌가?”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응, 독수리는 독수리인데, 닭이야.” “왜?” “닭하고 함께 자랐으니까 닭이지. 저 독수리는 날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줄도 몰라. 그냥 닭이랑 똑 같애.” 그러자 친구는 “무슨 소리? 독수리는 독수리지. 어떻게 독수리가 닭하고 같이 있다고 닭이 되겠는가?” 

이 말에 두 사람은 내기를 했습니다. 독수리를 닭장에서 꺼내어 하늘로 날려보자는 것이었죠. ‘지가 진짜 독수리인지, 아니면 닭으로 알고 있는지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닭장 문을 열고 독수리를 하늘로 던져보았습니다. 그 독수리를 처음 던졌을 때는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두 번째 던졌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번도 날아본 적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한 번 만 더 하자”고 해서 주인은 자신 있게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그 독수리를 던졌을 때, 독수리는 날개를 퍼드덕거리더니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독수리입니까, 닭입니까? 예, 아무리 닭장에 가두어져 닭들과 함께 자랐다고 할찌라도 독수리는 역시 독수리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부딪히고, 돈이나 건강 문제나, 이러저러한 문제에 부딪히면서 별 볼 일 없는 존재 같으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삶에 대반전,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3. 전에는 지렁이 같았으나 지금은 ‧‧‧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하고 많은 것 중에서 우리를 하필 “지렁이 같다”고 하셨을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인생의 모습이 지렁이 같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거하고, 죄로 인하여 고난 중에 거하는 모습이 썩은 데서 뒹구는 지렁이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지요. 지렁이에서 대반전 역전이 일어나는데, 이 지렁이가 세상을 심판하고 세상을 호령할 날이 올 것이라는 의미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이 둘 중에서 본문이 의도하는 우선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거역하고 죄를 범하는 사람의 모습이 지렁이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지렁이가 되었다가 거기서 다시 역전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고상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쭉 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무리 우리가 지렁이나 그보다 못한 것이 되고 그와 같은 상태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높이두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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