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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 (시 104: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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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 (시 104:24~30)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을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먹고, 주님께서 손을 펴 먹을 것을 주시면 그들은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님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 자연이라는 경전 

오늘은 24 절후 가운데 곡우穀雨입니다. 농부들의 일손이 바빠지는 때입니다. 농부들은 물꼬를 깊이 치고 도랑 밟아 물을 막고 한편에 모판을 만들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부지런히 들여다봅니다. 모판에서 약한 싹이 돋아날 때는 마치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조심스럽게 대합니다. 어쩌면 땅을 일구고, 거기에 뭔가를 심어본 사람, 여린 생명을 돌보기 위해 노심초사해 본 사람만이 외경심을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대관령에서 나무를 심으며 노년의 때를 보내고 계신 어느 목사님은 노동이 곧 기도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옹이 박힌 그의 손은 그가 진실의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낯빛이 창백한 목사인 저는 흙을 가까이 하고 사는 이들을 볼 때마다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시편 104편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찬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빛을 옷처럼 걸치시는 분’이고 ‘하늘을 천막처럼 펼치신 분’이고, ‘물 위에 누각의 들보를 놓으신 분’이고,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며,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는 분’입니다. 땅의 기초를 세우시고, 물을 꾸짖어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 주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리로 흘러가도록 하시고,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들짐승과 하늘의 새들도 샘 곁에 깃들며 살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땅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푸른 움을 돋쳐내고, 들짐승들은 그것을 뜯어 먹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지으신 질서를 따라 살아갑니다. 조화로운 세상입니다. 인간의 인위가 가해지지 않은 자연 질서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눈 밝은 이들에게 자연은 경전이고, 우리가 찾아가야 할 성소입니다.

시인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먹고, 주님께서 손을 펴 먹을 것을 주시면 그들은 만족해 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현종 때의 재상 하서 김인후의 시조를 기억하시지요?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절로’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평화로움이 유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이런 평화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은 그렇게 평화롭지 못합니다. 생의 곤고함은 바로 ‘그러나’라는 접속 부사에 있습니다.

• 너무 늦기 전에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의 현실 상황 가운데서 시편 104편은 배부른 자의 낙관론처럼 들립니다. 지구촌에는 당장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있는 이들이 수억 명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곡물가격이 폭등해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서인도제도의 가난한 나라 아이티, 필리핀, 인도, 이집트, 이디오피아, 카메룬, 부루키나 파소, 예멘 등의 나라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이티의 어린이들이 체로 걸러낸 흙에 소금과 버터를 넣어 말린 진흙 쿠키를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21세기가 되면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오리라던 20세기의 낙관론은 간데 없고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회색빛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식량 문제 때문에 세상은 또 한번의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식량 위기의 원인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경작지 감소, 재고 물량 부족,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가의 육류 소비 증가, 바이오연료 산업, 유류상승에 따른 수송비 증가, 게다가 세계적인 곡물회사들의 매점매석 등이 그것입니다. 결국 식량위기는 에너지 과다소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유한 나라들이 우선 식량 창고를 열어야 합니다. 마을 공동체에 있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추수 때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라고 했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 우셨던 주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눅19:42). 나라나 인종, 종교나 문화의 차이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끈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없어 세상은 암흑으로, 지옥의 변방으로 변해갑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유한 나라들이 창고를 열도록 호소하고 요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합니다. 삶의 방식을 소박하게 바꾸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육류 소비를 줄이는 것이야말로 이웃 사랑의 길입니다.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의 확산은 마치 예언자의 나팔소리처럼 이 시대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조류 인플루엔자의 변형체들이 생겨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갈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박한 삶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 또 다른 환경 호르몬인 인간 

환경호르몬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플라스틱 용기에서 나오는 환경호르몬이 여성의 생리통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아이의 생식기 기형까지 유발하고, 정자수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습니다. 환경호르몬이란 ‘내분비계 교란 물질’(endocrine disrupter)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호르몬은 우리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각각의 세포가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호르몬은 동물의 발달, 성장, 생식,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화학 신호’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환경 호르몬이 몸속에 들어오면 호르몬의 전달 과정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려 정상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합니다(강양구, <<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참고).

그런데 저는 묵상 중에 머리가 쭈뼛 서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정교한 세계에서 환경호르몬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화석연료 과다 사용으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분이 이미 많이 들으셨습니다. 습지가 사라지면서 양서류와 파충류의 서식 환경이 바뀌고 있습니다. 특히 양서류와 파충류 가운데는 알이 부화할 때의 온도에 의해 성이 결정되는 종이 많다는데, 지구 온난화로 말미암아 지구 생태계는 크게 요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하나의 개체가 사라지면 다른 개체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파급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뱀이 사라지면 들쥐가 이상번식하게 되고, 그것은 고스란히 인간에게 피해로 나타나게 됩니다. 

식물과 곤충의 공조성 파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꽃이 피는 시기와 곤충의 부화시기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꽃가루 매개 곤충도 급격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벌과 나비가 줄어들면 곡물이 수분을 할 수 없게 되어 식량 생산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시스템은 이처럼 정교합니다. 곤충과 짐승까지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잘 감당할 때 세상은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며칠 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 신앙을 가진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창조자로 고백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키시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면서, 생태계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저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망가뜨리면, 하나님이 고치신다구요? 이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나태함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당신의 일에 동참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추수할 것이 많은 세상이지만, 추수할 일꾼이 너무 적습니다. 먼저 깨어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나의 삶의 방식이 곧 생태계에 가하는 환경호르몬일 수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 말입니다.

• 호흡지간

히브리 시인은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하다면서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논다고 말합니다. 리워야단은 바다에 살면서 혼돈을 일으킨다고 믿었던 괴물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어도 리워야단도 분명히 존재의 권리를 가지고 살고 있음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은 있어야 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의 오만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이사야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사40:6b-7a) 

생명이란 호흡지간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으시면 우리는 살고, 호흡을 거두어 가실 때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잠시 허락받은 시간 동안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떠나간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 땅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귀중한 유산입니다. 뿌연 연무가 도시 하늘을 뒤덮고 있을 때는 쉼 쉬기가 참 어렵습니다. 숨쉬기 어려운 세상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 숨을 거두어 가시는 세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죽음에 가까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 머물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각박해집니다. 남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몸보다 마음이 더 바쁩니다. 산 이야기를 하고, 꽃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한가한 사람 취급합니다. 강을 파헤치고 시멘트로 막아놓으면 토종물고기가 산란처를 잃고 떼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그게 뭐 그리 큰 문제냐고 말합니다. 어쩌다가 우리 마음이 이렇게 재같이 차게 식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시인 루미는 나쁜 물을 고치려면 그 물을 강으로 돌려보내야 하고, 나쁜 버릇을 고치려면 ‘나’를 하나님께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각박해지고, 거칠어진 우리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루에 한 두 차례씩 고요한 시간을 마련해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은 스스로에게 주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것은 정화의 시간이고, 우리 속에 필요한 고요함을 채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연 속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거친 호흡이 가지런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 속에 깃든 하나님의 리듬이 우리를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명나라의 시인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유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폭포 소리를 들으면 속된 기운을 씻을 수 있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면 번다한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 이런저런 수고스런 번뇌를 멈출 수 있고, 새 울음소리를 들으면 분별하여 이익을 추구하던 생각을 그치게 할 수 있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면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고,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 어지럽던 마음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고삐 풀린 생각을 정돈할 수 있고, 독경 소리를 들으면 티끌세상을 향한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다.(정민, <<마음을 비우는 지혜>>, 明淸淸言, 73쪽) 

이익을 추구하느라 닳고 닳은 마음, 속된 마음, 조급한 마음, 어지러운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가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나무와 꽃 앞에 멈추어 서십시오. 산에 갈 수 없다면 공원에라도 나가 나무를 꼭 껴안아 보십시오.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생명 세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참다운 발전이란 GDP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커가는 것이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땅을 새롭게 하기 위해 땀 흘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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