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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만한 믿음 (눅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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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믿음 (눅 7:1~10)  
 
  아들 셋이 있는 어느 집의 아버지가 불행하게도 48살에 암이라고 하는 몹쓸 병에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는 데, 그때까지도 아들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속을 많이 섞였습니다. 아버지가 마지막 의식이 돌아왔을 때에 맏아들과 얼굴을 똑바로 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해서 손을 꼭 잡았습니다. 풀려진 혀로 뭔가를 얘기하고 싶은데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드디어 어떻게 마지막 힘이 오는지 표현이 되었는데, “애야! 너만은 우리 집안의 희망이 될 줄 나는 믿는다.” 그 후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더 이상 표현이 되지를 않습니다. 눈을 똑바로 보고 있는데 대단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그 후로 8시간을 사투를 하다가 세상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들이 그 아버지의 눈빛 속에서 “애야! 너만은 우리 집안에 마지막 희망이 될 줄 나는 믿는다.”라는 그 마지막 유산이 이 아들의 생애를 확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전혀 다른 아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분이 장성한 분이 되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가문을 이끌어가고 가정을 세우고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 된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최고의 유산은 무엇입니까?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는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좋은 추억 거리를 만들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겨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의 추억 속에 일주일 내내 술만 먹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남겨 준다면 이것은 아이들에게는 비극입니다. 술 먹는 사람들은 월요일에는 원래 술을 먹고, 화요일에는 화가 나서 술을 먹는다고 합니다. 수요일에는 수도 없이 술을 먹고, 목요일에는 목구멍에 차고 넘치도록 술을 먹고, 금요일에는 금(겁)나게 술을 먹고, 토요일에는 토할 정도로 술을 먹고, 일요일에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먹는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이와 같이 좋지 못한 모습을 보고 자라난다면 훗날 그도 자녀들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통계 자료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내 부모도 교회에 다니기는 다녔다. 그런데 그분들은 종교 꾼에 불과했다. 이런 모습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보여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 내가 잠이 들었을 때에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다.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도 훗날에 부모님의 좋은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멋진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정해진 삶의 터전입니다. 여기에서 삶의 터전이라고 하는 것이 집이라고 해도 좋고, 가정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여간 우리의 이 육신이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편안한 그런 곳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면 마음 놓고 돌아갈 수 있는,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그래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육신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런 곳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 인생이 안정되지를 못하게 됩니다. 저녁 때 일이 끝나고 해가 뉘엿뉘엿 졌는데 돌아갈 집이 없다. 아니면 집은 있는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인생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녁이 되면 돌아 갈 곳이 있고,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터전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할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침을 먹고 가야할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모릅니다. 땀을 흘려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행복입니다. 자기의 주어진 일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있는 사람이 최고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땀흘려서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는 행복한 인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혼의 안식처가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주일이 되면 가슴 설레이며 기쁨으로 찾아갈 수 있는 신앙의 터전인 자신의 교회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신앙의 안식처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익숙한 분위기에 정말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유치장에 끌려오듯이 교회로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집에서 쉬었으면 좋겠는데 안갈 수도 없고 꼴 보기 싫은 아무개 집사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 지긋지긋한 설교, 지루한 예배, 오늘도 식사 당번이지. 웬 식사 당번은 이렇게도 자주 돌아오는지…. 오만상을 다 찡그리고 미적미적하다가 예배시간 시작하기 전에 교회 오는 사람…. 그 사람은 인생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솔직히 우리 영신교회가 그래도 괜찮은 교회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가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것이 되어서 듣기가 거북스럽습니까? 우리 교회는 다닐만한 교회다, 괜찮은 교회다. 누가 뭐래도 저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괜찮은 교회입니다. 다닐만한 교회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일 중에 하지 못하고 사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하기를 교회만이라도 자기가 다니고 싶은 교회를 다녀야 된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기왕이면 교회는 좋은 교회에 다녀야 합니다. 여러분, 어느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입니다.

자기가 다녀서 기쁜 교회를 다녀야 됩니다. 즐거운 교회를 다녀야 됩니다. 은혜로운 교회를 다녀야 됩니다. 그리고 한번 교회를 정했으면 열심히 다녀야 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야 됩니다. 억지로 와서 짜증스럽게 앉아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아예 그런 사람 있다면 좋은 교회를 찾아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 즐거운 교회 생활을 한다는 것, 행복한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고, 신앙생활이 안정되어져 있지 않고, 신앙생활이 만족하지 않고,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의 행복은 우리 인생의 행복의 출발점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요3서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이 평안해야 모든 일이 잘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가정도, 사업도, 나라도, 내 자신도, 건강도 우리의 영혼이 편안해야 다 잘 됩니다. 영혼이 평안하냐, 평안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가정이 평안합니다. 내 영혼이 평안하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결국 바꾸어서 말하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고 재미없고 불안하고 초조한가?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닻을 내리고 정착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뿌리 채 흔들리기 때문에 내 인생이 초조하고 불안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 가정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왜 생깁니까? 결국 이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혼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입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면 인생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결국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불안과 초조, 불만과 불평,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가정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만사가 형통합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경제 때문에 우리의 가정이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성경을 깊이 읽어보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외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제사는 기뻐하셨지만 믿음 없는 제사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제사를 통하여 표현되는 우리의 믿음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그 믿음 위에 복을 부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고 욥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고 베드로가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어주시는 복은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주장과 가르침입니다. 롬1:17절에서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의 열쇠란 형통함의 상징으로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와 부어주시는 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믿음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92편에 보면 의인 즉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전에 심기운 종려나무처럼 번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128편에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며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을 보시면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시설이 아닙니다. 건물과 시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것들만으로는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교인입니다. 교인들의 믿음입니다. 교인들의 좋고 큰 믿음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갈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으로 주신 교회를 우리와 우리의 가족 그리고 후손들에게 축복하는 교회로 세워나가십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을 썩을 육신과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교회를 통하여 확장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십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 없는 반석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됩니다. 반석과 같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으로 아름다운 주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좋은 신앙,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의 터전인 교회 생활이 즐겁고 만족해야 합니다. 교회의 삶, 신앙의 삶이 즐겁고 만족스러우면 여러분 개인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백부장의 어떤 면을 보시고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백부장에게는 예수님께서 하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만한 믿음’은 될 수 있었을는지 몰라도 ‘이만한 믿음’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도 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최소한 ‘그만한 믿음’은 기본적으로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시시하게 믿거나 건방지게 믿으면 그런 기본적인 믿음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만 한 믿음’은 ‘그만한 믿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업을 위하여 늘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위하여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도에 대하여 체험과 간증이 있는 교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직히 생각해 보면, ‘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만한 믿음’이 ‘이만한 믿음’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믿음은 ‘그만한 믿음’이 아니라 ‘이만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백부장의 무엇을 보시고 ‘이만한 믿음’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본문을 통하여 백부장의 믿음이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과 기사를 믿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의 삶과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다보면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단계를 벗어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단계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사랑하여 함께 살면 생각도 닮고 외모도 닮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닮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을 닮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닮아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이만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백부장에게서 그와 같은 경지의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백부장에게서 그 믿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간구의 내용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자기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니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인과 종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당시 로마 장교의 하인이었다면 전쟁 포로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단순히 하인이 아닌 노예였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설령 그가 전쟁포로나 노예가 아니었다고 하여도 당시 하인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바와 같이 집에서 기르는 가축 이상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하인이 중풍에 걸렸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주인들은 알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안다고 하여도 그것이 주인의 관심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져 버림받고 폐기 당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그 가축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하인이 중풍으로 고생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친히 예수님께 나아가 그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차원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단계를 벗어나 사랑하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마음과 가슴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낮고 천한 자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백부장을 향하여 ‘이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백부장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중풍병도 나을 수 있다고 믿는 것도 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믿음만으로는 ‘이만한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그만한 믿음’입니다. 

‘이만한 믿음’은 ‘그만한 믿음’을 지나 단순히 예수님의 기사와 능력을 믿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기도하는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닮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그와 같은 믿음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예수님의 기사와 능력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능력과 기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믿음이 끝이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단계를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저 ‘그만한 믿음’에서 졸업을 하고 백부장이 가졌던 ‘이만한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믿음이 단순한 능력과 기사가 아니라 믿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삶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믿음이 내 가정에서 나타나야 하고, 직장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사업의 장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거룩하게 변화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그저 그만한 믿음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만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단계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단계로 발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사람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백부장과 같은 이만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셔서 여러분의 만사가 형통하고 역사를 이루는 귀한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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