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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폭풍속에 계신 하나님 (막 5: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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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속에 계신 하나님 (막 5:25~41)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신실히 따르는 성도가 까닭 없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새벽마다 하나님의 성전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약한 자들을 위해 간구하고, 교회에서 맡겨준 직분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늘 그 자리에 서서 맡겨진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하나님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가정이 행복해져 주위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야 되는 것 아닙니까? 회사에서는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고, 자녀들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꼬리 대신에 머리가 되어 주의 사람들에게 “예수 잘 믿으면 저렇게 되나봐!” 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며, 있는 병도 떠나가 더 건강해져야 할 터인데 오히려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까지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간 독일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30년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독일은 온통 엉망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전쟁 직후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1,600만 명이던 독일 인구 중 무려 1,000만 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상황이 빚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 개입해 승리를 이끌었던 프랑스가 천주교의 손을 들어주어 개신교도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가장 치열한 격전지중의 하나가 ‘실레지아’라는 곳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주민이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로 돌아 가버렸습니다. 그곳에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부임해보니 교회 종탑은 없어졌고 그저 통나무와 흙벽으로 된 예배당 하나만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담당하는 교구는 주변의 36개 마을이나 되었습니다. 천주교의 박해가 심해 종탑도 세울 수 없었고 심지어는 장례식도 허락을 받아야만 치를 수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 부부는 실망하지 않고 선교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러다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은 과로로 자주 쓰러졌고 급기야는 30대 초반에 중풍에 백내장까지 겹치게 되었습니다. 중풍으로 인해 절룩거리고 눈까지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선교 정열은 식지 아니하여 36개 마을을 빠짐없이 심방하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1704년 슈몰크 목사가 32세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슈몰크 목사는 언제나처럼 아픈 몸을 이끌고 여러 지역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통나무로 지은 목사님의 사택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뿐 아니라 두 아들이 부둥켜안은 모습으로 잿더미 속에서 타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슈몰크 목사 내외는 두 아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슈몰크 목사님 부부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심방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Move 1 우리의 경험 : 욥의 경험을 현대적으로 각색

향락과 방탕, 사치와 이단이 판치는 어느 대도시에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주변의 악덕기업주와는 달리 그는 성실하게 일하여서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쌓는 보기 드문 기업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일하기보다는 그의 회사에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이 제 날짜에 임금을 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한 식구처럼 대해주었습니다. 이 사업가는 이름을 내고자 생색내기로 도움을 주는 사업가들과는 달리 소리 없이 고아나 독거노인 그리생활보호 대상자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겉치레만 요란한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업가는 언제나 진지하게 예배를 드렸고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구원의 감격이 배어있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물론이고 담임 목사님까지도 그의 예배생활과 겸손을 늘 배우고 싶어 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업가의 가정은 모범적인 가정으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신앙으로 잘 자라난 10명이나 되는 자녀들은 하나같이 부모에게 순종을 잘할 뿐 아니라 예의 또한 바랐습니다. 젊은이들이 향락에 빠져 인생을 허비할 때 10남매는 하나님 앞에서 성결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을 어두운 세대를 깨우는데 도구로 써주시도록 기도하며 자신을 준비하는 보기 드문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불신자들조차도 “그래, 신앙생활하려면 저 사람처럼 해야 돼, 사업하려면 저렇게 바르게 해야 돼, 가정을 이끌려면 저 사람처럼 해야 돼!.”하며 이 사업가만은 인정하였습니다. 이 사업가는 타락한 그 대도시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그의 회사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는 말이 있지만, 순식간에 발생한 화재로 건질 것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인명피해가 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알거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통은 겹쳐온다 했던가요? 차라리 재산을 잃은 것은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재산은 다시 모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형화재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던 그 날, 10남매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하던 집의 기둥이 무너져 한꺼번에 한 장소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렇게 신앙이 좋고 그렇게 깨끗하게 살고 내일이 촉망되는 10남매가 압사를 당한 것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사 중에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업가는 10남매의 이름을 부르며 무너진 집 더미를 파헤쳤습니다. “설마 그래도 한 아이라도 살아있겠지!”하며 미친 듯이 파헤친 흙더미 안에서 자식들이 하나 둘 싸늘한 주검이 되어 나올 뿐이었습니다. 극도의 슬픔으로 10남매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어봤지만 이미 식어버린 자식들은 다시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 죄 없이 죽어간 10남매의 시신을 놓고 장례를 치를 한 푼조차 없는 이 사업가의 가슴은 물처럼 녹아내렸습니다.

그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녀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사업가의 몸에 피부병이 발병하더니 금세 온 몸으로 번져갔습니다. 병명도 없고 약도 없는 악성 피부병이었습니다. 너무 가려워 돌 조각으로 피가 나도록 긁어야만 했습니다. 특히 밤이 되면 더 심해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이 사업가는 회사가 망하고 모든 자녀가 죽고 건강도 잃어 신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남편을 보고 있던 부인이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을 해댔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세요.” 그리고는 이혼을 요구하며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건강도 재산도 명예도 자녀도 그리고 가정도 다 상실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딱 하나 명줄보다 질긴 목숨이었습니다. 그에게 떠오르는 태양은 희망이 아니라 고통을 알리는 시작일 뿐입니다. 마치 폭풍 속에서 이리저리 휘말리며 곧 침몰할 낙엽 같은 작은 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욥기의 앞부분을 현대적으로 옮겨봤습니다. 성도 여러분! 도대체 욥이 섬기는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Move 2  성경적인 경험

오늘 본문에도 이런 아픔을 겪는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배를 타고 가는 그들에게 폭풍이 불어 닥쳐 죽게 되었습니다. 지금 배타고 가는 길이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먼저 주님이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셔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길이었는데 말이죠. 더 기가 막힌 것은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으로 배가 침몰되어 죽게 되었는데도 일어나 제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실 때 지난 수십 년 동안 붙잡고 있었던 배와 그물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배와 그물은 그들의 꿈을 이루어 주는 수단이고 가정을 풍요롭게 하는 평생 직업이었습니다. “너, 지금 제 정신이냐? 아무리 믿음도 좋고 교회도 좋지만, 정도껏 믿어야지 이게 무슨 짓이냐?”는 친구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정들었던 고향산천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가정까지도 포기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예수님께 걸고 지금까지 주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글자그대로 100% 주님께 자신을 맡겨드린 사람들입니다. 이 정도면 오히려 주님이 닥쳐올 폭풍정도는 막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미래를 보장해 주시고 닥쳐올 위험이 있다면 막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주님을 믿다가 꿈을 성취하는 것은 고사하고 죽게 생겼습니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이 믿고 따른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많은 날 동안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동행하고 함께 전도도 하면서 말씀한마디로 불치병인 문둥병자도 고쳐주시고, 나면서 볼 수 없었던 시각 장애인도도 고쳐주시며 죽은 자들도 살려 내신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 고쳐주시고 살려주시면서 꿈과 직업, 심지어 가정까지도 포기하고 따르는 자신들을 이 폭풍 속에서 왜 건져주시지 않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침묵하시는 주님 앞에서 고통을 느낍니다. 절망을 경험합니다.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떤 초등학생이 주일 학교 선생님들의 권유에 의해서 주일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이의 아빠는 그 아이가 교회 다니는 것을 몹시 싫어했지만 그래도 이 아이는 계속해서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만 그 아이가 교회에 다녀오다가 건널목에서 기차에 치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자 너무너무 화가 나서 예배당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때렸습니다. “내 아이 살려내, 내 아들 살려내란 말이야!” 그리고는 목사님을 나오라고 해서 “내 아들이 죽을 때 하나님이 어디 있었느냐?”고 따졌습니다. 목사님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더니 그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가 죽을 때 거기 계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Move 3  Aha-Point / 우리의 경험과 적용

끊임없이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외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제자들처럼 외칩니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지금 나는 너무 힘든데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정말 능력이 있으신 분 맞습니까?”  

배에 함께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겪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향하여 호령하십니다. “잔잔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폭풍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잠잠해졌습니다. 제자들은 갑작스럽게 생겼던 폭풍 때보다 오히려 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잔잔한 바다를 보면서 제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말을 합니다. “이분이 대체 어떠한 분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제자들은 폭풍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해 새롭게 만납니다. 그동안 따랐던 단순한 랍비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만납니다. 비로소 폭풍 속에서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만납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나의 무능과 하나님의 전능이 만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나의 텅 빔과 하나님의 충만이 만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나의 제로와 하나님의 가득이 만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래서 나는 연약한 인간으로 남고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남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제자들은 인간의 무능의 정점에서 주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죽음의 폭풍우 가운데 그동안 랍비로 만났던 주님을 하나님으로 만납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다보면 원치 않게 인생의 폭풍과 같은 전혀 예상 밖의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아픔은 주님이 나를 떠나신 증거가 아닙니다. 주님이 무능하신 증거는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폭풍속애서 흔들리는 배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제자들이 폭풍을 통해 예수님을 랍비가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만났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만나게 됩니다.

“9일간 천국 만들기”라는 어느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너무 힘든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너무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 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청소 좀 할래?”  3일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나님이 다시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3일 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둘러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둘러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아이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은 처음으로 가정을 사랑하시고 그 가정에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 그동안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함께 계셨군요”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그리고 나는 늘 너와 함께 있었단다.” 그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Move 4

곡식 가운데 콩은 단백질과 지방이 많이 들어있어서 예로부터 사랑받는 식품입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모님이 콩나물을 직접 키우는 것을 보았고, 콩을 밭에 뿌려서 싹이 나고 자라 열매 맺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똑같은 콩 씨앗이지만 자라는 여건과 환경에 따라 콩나물이 되기도 하고 콩나무가 되기도 합니다. 콩나물은 보자기로 덮여 햇빛이 차단된 채 어둠 속에서 고이 자라고, 콩나무는 뜨거운 태양볕 아래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납니다. 콩나물은 머리를 든 채 뿌려주는 물만 먹고 자라고, 콩나무는 씨앗이 죽어져 썩을 뿐 아니라 토양의 각종 영양분을 스스로 섭취하며 자라납니다. 결국 콩나물은 약하게 자라 일회용 콩나물 반찬으로 끝나지만 콩나무는 비바람과 폭염을 받으며 강인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재생산의 기회를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며 즐겨 부르는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능력의 이름 예수 어린양 능력의 이름.

이 찬양의 원작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엄청난 능력으로 남의 병은 척척 고쳤지만, 그 자신은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그 스스로가 이르기를 “내 몸에 사단의 가시”가 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때로는 전도하다가 어떤 때는 설교하다가 어떤 때는 상담하다가 그 고통 때문에 하던 하나님의 일을 중단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를 놓고 3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 제가 잘 압니다. 주님은 여전히 능력 많으신 분임을 제가 잘 압니다. 하지만,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너무 괴롭습니다. 이 폭풍우를 제게서 거두어 주옵소서!”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진다.” 바울은 약한 자기자신 때문에 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그를 통하여 더 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약한 것들이 그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이전 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겪는 가시속에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결론

어쩌면 주님의 사람이란 폭풍우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일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폭풍을 통하여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언제나 함께 계신 하나님 안에서 좋은 일도 은혜지만 아픔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오늘도 우리를 폭풍 속에서 만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슈몰크 목사님 부부는 불타버린 두 아들의 시체를 끌어 앉고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300년이 지난 지금도 폭풍우 같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의 기도가 찬송가 431장의 가사입니다.  

    1.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혹시 남모르는 아픔이 있습니까? 폭풍우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까? 주님은 그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폭풍 속을 항해하는 우리 인생의 배에 지금도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까닭모를 아픔 속에서도 주님의 함께하심과 전능하심을 더욱 신뢰해 갈 때 고통은 축복이 되고 나를 더 깊게 만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됩니다. 어느새 그분은 랍비가 아닌 전능자로 나를 새롭게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경험하는 폭풍우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폭풍이 끝나고 무사히 바다건너편에 다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랍비가 아닌 하나님으로 더 깊게 만나 더 성숙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겪는 폭풍우는 우리를 보다 성숙한 제자들이 되게 하는 변장된 축복이 됩니다. 폭풍속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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