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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도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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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도 (벧전 4:7~11)

  이번 수련회 주제였던 ‘좋은 교회 바른 신앙’의 연장 의미에서 지난 주일 ‘예배’에 대한 송 목사님의 설교는 시의적절하였습니다.  좋은 교회는 예배가 바르게 드려지는 교회입니다.  바른 신앙은 바른 예배의 정신을 가진 신앙입니다.  오늘은 ‘섬김의 도’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영어에서 예배를 service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service란 말은 ‘섬김’이라는 말로 바꿔도 의미가 통합니다.   예배는 곧 섬김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그 자세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배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예배는 예배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일터와 학교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 사도 역시 고난 많은 시절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환란과 핍박 중에도 믿음을 굳게 지키고 산 소망 가운데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능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이어받도록 하시는 분이시니 그 기업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장차 썩어질 영광과 이 세상의 것들에 믿음과 소망을 두고 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환란 중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은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오직 성도는 그 믿음과 소망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에 두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희생을 각오하고 고난을 자초하는 길임을 알면서도 그 길이 진리인 줄 믿고 따르던 성도들은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긴장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그리고 언제 나의 생이 마쳐질지 알 수 없는 인생 걸음을 나그네의 삶으로 정의하였습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   베드로는 이 마지막 때를 나그네로 살고 있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몇 가지 구체적인 삶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기도하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긴박감 속에 사는 사람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바르게 설정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며, 아군과의 교신이 끊기지 않고 지금 자신이 있는 위치와 형편을 정확하게 알리고 듣는 길입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영적 군사들이 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과의 교신이 단절되지 않고 대화의 통로가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기도입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무선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겨 외부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면 답답한 일을 경험합니다.   인터넷 의존도가 점점 높아갈수록 통신두절은 끔직한 사태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시그널이 잡히지 않거나 송수신이 단절되면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컴퓨터를 껐다 켰다 하고, 무선 수신기를 체크하며 그래도 안되면 인터넷 회사에 전화를 하여 기어코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루라도 불통이 되면 눈과 귀가 가리워진 듯 마음이 답답해 신속히 문제를 해결하려 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무선 통신과 같습니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으면 잠시도 기다릴 틈 없이 연결을 시도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통신이 두절되었을 때도 서둘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은 상황이 급하고 어려울수록 하나님과의 교신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영적 전쟁에서 살아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처절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료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그렇게도 간절하게 당부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의 의미를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사정이 급하면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집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의 사정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지금 내 생활이 궁핍하고 내 안전에 위험이 닥쳐오는데 이웃의 곤란과 위험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어려움에 처하다 보니 마음이 조급하고 이해심이 부족하여 조그만 일에도 금방 짜증을 내고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을 보면 그냥 넘길 수 없어 비난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꼭 한 마디 불평을 하고 넘어가야 속이 풀립니다.   더구나 이웃의 실수가 나의 신변에 위협이 되고 내 생활에 손해로 직결되면 그 즉시 그 잘못을 책잡고 비판하며 정죄하는 자리까지 갑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런 상황에 살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럴수록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각박하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 남을 사랑할 겨를이 없습니다.   사랑이 결여되니 다른 사람의 흉허물과 실수가 자꾸 눈에 들어와 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고 사람이 두려워지며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교우들이 처한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베드로는 그래서 그럴수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여유가 없어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품는 일이 힘들어질수록 마음을 가다듬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회복된 힘으로 곁에 있는 형제의 형편을 사랑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고 비판하며 정죄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형제의 허물을 알고도 감싸주고 그 자리에서 속히 벗어나도록 돕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되 열심으로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립싱크를 하듯 겉치레로 끝나서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입술 고백만의 사랑은 금방 그 바닥이 드러나고 효력이 상실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사랑하는 것은 곧 서로를 대접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집니다.   ‘대접한다’는 말은 친절을 베풀라는 말로 해석하면 좋습니다.   우리의 삶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정의했던 베드로의 대접하라는 말은 나그네 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나그네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나안 땅을 처음으로 밟았을 때 그 가족은 그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400여 년 동안 종살이 하며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40년간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은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에 대한 큰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으로 살던 때와 광야에서 나그네 되었던 때를 기억하고 너희를 찾아온 나그네들을 영접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을 기억하고 이 세상 나그네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나그네의 사정을 헤아려 주께서 주신 선물을 기쁨으로 나누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손 대접 하기를 힘쓰라!’ (롬12:13)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들이 있었다’(히 13:2)고 합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신앙 생활하기에 힘든 환경에 있다 보면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칩니다.  형제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옳은 줄 알지만 오므라든 손이 선뜻 펼쳐지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친절을 베풀되 원망 불평하는 자세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친절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안한 상황이 아닌 힘들고 각박한 환경일수록 더욱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할 만큼 하는데 왜 저쪽에서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가?  늘 나만 손해 보는 것 같고 상대방이 무례하며 이기적이고 불쾌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려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그 사람이 나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확실히 해야 친절을 베푼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라는 말은 비록 상대방으로부터 감사의 인사가 없을지라도 나의 친절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대접하되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이런 친절이 구원의 기쁨을 소유한 성도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대접이고 삶에서 증명되는 구원의 열매입니다.

  왜 나만 이 힘든 일을 도맡아 해야 할까?   공들여 분단장하고 곱게 차려 입고 와서 왕자와 공주처럼 손 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도 있는데 왜 나는 이처럼 일 복이 많은가?   일거리가 눈에 보이니 그냥 한가로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팔 걷어 부치고 나서서 몸이 피곤하도록 일해야만 하는 내가 너무 오지랖이 넓은 것일까?   일은 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 원망하는 마음으로 하고 나면 기쁨도 없고 괜스레 짜증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으로 마음이 아프다가 몸까지 아파옵니다.    

  왜 우리가 이처럼 서로를 대접하는 옳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은혜의 선물들을 주셨는데 이 선물들은 서로에게 봉사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은 나만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교회와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선한 청지기처럼 이 선물을 사용하라고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집에서 주인의 살림을 맡아 섬기는 일군입니다.   청지기는 ‘오이코노모스’ οικονομοσ 인데, 집이라는 뜻의 ‘오이코스’와 법이라는 뜻의 ‘노모스’가 하나로 된 말입니다.   즉 주인의 집을 책임 맡아 계획하고 관리하는 일군이라는 말입니다.  

  선한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여 주인의 집을 평안하고 질서 있게 관리합니다.  예수님은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눅12:42-44)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청지기가 관리하는 재물과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받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사람이지 주인의 뜻과 상관이 없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야망과 꿈을 이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 선한 청지기의 좋은 예로 대표적 인물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에 주인의 충직한 일군이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으며, 애굽의 바로에게 발탁되어 두 번째 치리자로 일할 때에도 바로의 집을 자신의 집처럼 성실하게 맡아 일하였던 일군이었습니다.   

  반대로 게으르고 악한 청지기도 있습니다.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재물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대표적 예는 요즘 정치권 인사들의 행태에서 쉽게 찾아봅니다.   시의원이나 국회의원은 시민과 국민의 대표자로 부름을 받아 일하는 청지기들입니다.  지역 사회와 국가를 위해 섬기라고 특별히 구별하여 뽑아놓았으면 성실과 정직함으로 섬기는 것이 그들의 본분입니다.   하지만 선한 청지기다운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자신들이 섬겨야 할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들거나 그 자리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 특권층이 되어 이권을 챙기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 여러 곳에서 나오는 청지기에 관계된 말씀들을 종합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집에서 주인을 섬기는 청지기들입니다.   목사와 장로, 집사와 교사, 찬양대, 전도회나 청년부 임원들 이 모든 청지기 직분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직분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은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은사는 말 그대로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주시고 또 레위인들에게 하나님의 성소에서 일하도록 하신 것은 선물이라 하셨습니다(민 18:6,7).   

  선물이라는 말은 특권이라는 뜻입니다.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던지듯 헐값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담아 주는 특권입니다.  왜 이런 특권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질서 있게 관리하고, 때를 따라 풍족한 양식이 있게 하며, 집안의 식구들이 서로 화목하고 하나가 되어 그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며 우리가 그 집의 청지기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런 책임입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맡은 여러분의 섬김의 직분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청지기의 자세일까요?   본문은 두 가지 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일은 크게 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만일 누군가 말로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말로 봉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이든 주일학교 교사와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는 그 누구든지 말로 봉사할 때 사람의 말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내 기분 내키는 대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섬기는 청지기의 겸손한 자세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버린 실수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입에 넣어준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주인의 뜻을 수정하고 멋지게 포장하여 마치 자기가 주인인 듯 착각하고 전달하면 나중에 주인이 와서‘내가 언제 그렇게 전하라고 했느냐?’하고 그 책임을 엄히 물으실 것입니다.   

  둘째, 누가 만일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섬기는 사람들이 손으로 봉사하든, 물질로 봉사하든, 아니면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여 봉사할 때 그것이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내가 노래를 잘하니까 악기를 잘 연주하니까 내 실력을 발휘해보리라는 생각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이 재능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리라는 마음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내가 물질이 좀 여유 있으니 교회에 헌금을 하여 약한 교회에 힘 좀 보태주리라는 마음이 아니라 주인 집의 필요가 무엇인지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물질을 드려 사용하는 것이 선한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몸으로 하던 물질로 하던 아니면 재능으로 섬기던 그 어떤 봉사를 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임을 알고 그대로 한다면 선한 청지기의 책임을 다하는 충성스런 일군입니다.   청지기가 성실하게 섬기면 그 집이 복을 받고 주인에게 영광이 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 부분을 봅시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한 청지기로 섬기는 것은 나의 영광, 명예, 체면이 우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며 서로 섬김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은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그가 머무는 곳에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일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일하는 곳마다 요셉 때문에 복이 되었습니다.    이런 복이 우리 교우들과 우리 교회에도 항상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막10:45).   우리의 섬김의 도는 바로 이 말씀에 기초를 둡니다.   선한 청지기는 주님의 본을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섬김, 이것이 성도의 존재 목적이고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선한 청지기들이 오늘 여기 앉아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신 주님의 칭찬과 복이 우리 무리 가운데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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