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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신앙과 능력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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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과 능력 (행 7:54~60)

 교우 여러분, 지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겨울 양복을 벗을까? 말까? 하고 있는데 어느 덧 여름이 다가와 등골에 땀이 흐르게 합니다. 어제는 결혼 주례 두 번 하면서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은혜가 넘치고 기쁨이 가득한 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제 5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부활절 후 다섯째 주일’이 아니라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란 오늘의 주일 이름입니다. 이것은 부활절이 끝난 ‘후’ 가 아니라 아직도 부활절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부활의 계절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부활의 계절은 부활주일(부활절)부터 시작해서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전까지 50일간 계속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50일간의 긴 축제를 통해서 부활의 기쁨과 감격에 넘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기쁨과 감격은 오늘날 우리가 갖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그들의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어야 산다’, ‘죽어도 산다’는 부활신앙으로 희망에 넘친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그들의 기쁨과 감격, 그들의 희망을 빼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신앙으로 목숨을 걸고, 순교를 각오하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 설교 본문으로서 사도행전 7장 54-60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한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 입니다. 그의 생생한 순교의 장면을 간단하게 보도하는 본문이지만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직도 부활의 계절에 사는 우리의 부활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사도행전의 표현대로 성령과 지혜(6:3, 10), 믿음과 성령(6:5)이 충만하고, 은혜와 권능(6:8)이 충만한 스데반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서 특별히 빌립과 함께 탁월한 말씀 선포자로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말씀 선포가 놀랍게 행해졌습니다. 

스데반의 말씀 선포에 관한 이야기는 6장 8절부터 7장 60절 오늘 우리가 본 말씀까지, 빌립에 관한 것은 8장 4-13, 26-40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로써 그의 능력 있는 설교(7:1-53) 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6:11) 했다는 신성모독죄와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6:13) 했다는 성전모독죄로 고발을 당해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스데반이 고발당한 그 과정은 공회 앞에서 예수가 고소당하신 과정과 유사합니다(마 26:57-61). 

이렇게 고소당해 공회 앞에서 행한 스데반의 설교(7:1-53)는 현장에 입석해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자제력을 잃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7:54). 본문에 ‘찔려’(디에프리온토)라는 헬라어 본래 뜻은 ‘톱으로 켜 자른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을 톱으로 켜서 조각내는 것처럼 심히 자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에 찔렸다” 는 이 말에 대하여 칼빈은 분노가 ‘이를 갈’ 만큼 격동되어 불꽃을 일으키는 맹렬한 불길과 같았던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같은 맹렬한 불길에 더욱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되게 한 것은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고 한 이 말입니다(7:55-56). 스데반이 본 이 환상은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정한 것이고, 이것은 곧 신성모독죄목으로 무고한 예수를 죽인 유대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더욱 유대 지도자들을 격분케 하였으며, 그들의 격분은 자제력을 잃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스데반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 가 되었습니다. 

2. 죽음을 뛰어넘는 스데반의 부활신앙 

사방에서 미쳐 날뛰는 적대자들에 둘러싸인 스데반이 그들의 악의에 가득 찬 격앙된 고성(高聲)을 듣고, 또한 냉혹한 얼굴들이 사방에서 그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자신이 무섭고 잔인한 죽음에 직면했는데도 아무도 그를 돕지 못하는, 즉 인간의 도움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알았을 때, 이렇게 스데반이 인간의 도움에서 완전히 끊어진 절망의 벼랑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위로 하늘을 향했습니다.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55절) 보았다 하였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다는 것은 그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의 줄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스데반이 하늘을 향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같이 스데반이 본 하늘의 환상은 절망을 희망이 되게 하였으며, 죽음을 극복하는 빛나는 승리를 이루게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가 본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스데반이 본 하나님은 죽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스데반에게는 육안과는 다른 눈이 주어져서 그 눈의 투시력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우편에 서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뛰어넘는 스데반의 부활신앙’ 입니다. 

이 부활신앙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죽어도 산다’, ‘죽어야 산다’ 는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스데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게 했으며,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가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리를 위협하는 살기등등한 적대자들 앞에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너무나도 두려워하고 비굴하게 처신합니다. 의기소침해하며 쉽게 좌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강하게 땅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만 내려다보았지 우러러 살아 계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부활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에 욕심을 부림으로써 눈이 멀어 하늘을 우러러보는 ‘영안’을 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안을 뜨지 못한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 세상 것뿐이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이 없는 소치입니다. 이는 곧 어떤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부활신앙이 없는 소치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하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이 일은 바로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와 늘 함께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충만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 의존하여 성령의 임재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게 됨으로써 영안을 뜨고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과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도 스데반처럼 살기등등한 적대자들의 큰 위협이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초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같은 믿음이 바로 돌에 맞아 처형되는 순간에도 스데반이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죽음을 뛰어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다름 아닌 부활신앙입니다. 이 부활신앙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마지막 죽음 앞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게 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b절) 라는 스데반의 기도는 최후의 결전에서, 즉 절망의 벼랑 끝에서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희망을 거는 신앙을 보여 준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 신앙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을(골 3:3) 믿는 부활신앙입니다. 

3. 원수 보복을 극복(사랑)하는 스데반의 부활신앙 

이토록 스데반의 부활신앙은 자신의 영혼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는 확고한 믿음을 보여 준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죽음의 순간에도 용서를 간구하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라고 한 기도는 원수를 사랑하는 그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눅 23:46) 적대자들을 위해 용서를 간구하는 것(눅 23:34)과 같습니다. 

이같이 스데반의 순교와 예수의 고난 및 죽음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자기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인 것이고, 또한 원수 용서를 위한 기도는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역동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사랑)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을 용서하거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이 사람(형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를, 그리고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본문은 스데반이 원수 용서를 위한 그의 기도의 응답에 대하여 즉각적인 응답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결코 헛되이 기도한 것은 아니라는 확신과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사울의 변화입니다. 여러분, 사울이 누구입니까? 스데반을 죽인 장본인이고 교회를 박해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바울의 변화와 그의 사역에 대하여 누가는 사도행전 9장에서부터 보도합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바울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결정적으로 스데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일은 스데반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의 원수 용서를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바울을 용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칼빈은 만일 스데반이 원수를 용서하기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를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울이 바울로 변하는 이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스데반이 원수용서를 위한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같이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세계 선교의 기폭제가 된 스데반의 순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앞서 스데반에게서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신앙을 보았습니다. 그의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적대자인 사울을 용서하고 위대한 복음 전도자 ‘바울’로 변화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신앙은 죽음을 불사하는 순교의 자리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같은 스데반의 순교는 세계 선교의 기폭제가 되게 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스데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고 교회에 대한 박해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신도들을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흩어지게 하였습니다(8:1). 박해로 인해 흩어진 자들은 복음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8:4). 이것은 마치 불이 난 곳을 진화하기 위해 막대기로 치면 그 불티가 여러 곳으로 번지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는 복음의 말씀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위기’가 ‘기회’가 된다는 말의 실례(實例)가 됩니다. 

이 같은 복음의 확산, 즉 세계 선교에 대한 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이미 고지되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세계 선교(세상 끝)는 스데반의 순교가 기폭제가 되었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입니다. 

바울(사울)은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7:58). 하지만 바울이 사도행전 후 반부의 실제적 주인공으로서 세계 선교를 위해 수많은 박해와 고난을 겪었으며 끝내는 복음을 위해 전생(全生)을 바쳤습니다. 이 같은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스데반의 원수 용서를 위한 기도의 응답은 바울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교회의 박해에 가담했던 사울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고 복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데반의 원수 용서를 위한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렇게 스데반의 기도와 순교는 세계 선교의 기폭제가 되었고, 바울로 하여금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부활의 계절에 살고 있습니다. 이 계절에 우리는 스데반의 부활신앙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스데반처럼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도 스데반처럼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신앙으로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죽어야 산다’, ‘죽어도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스데반처럼 원수 사랑을 실천하며, 세계 선교를 위한 기폭제가 되고, 나아가 바울처럼 세계 선교를 위한 ‘증인’(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일은 부활신앙으로만 가능하며, 이 신앙은 성령이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의 계절에 아래 있는 땅의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위로 하늘을 우러러 성부와 성자를 바라보며 성령 충만을 간구하며 부활신앙으로 살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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