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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창피하지 않은 예수님, 자신 있는 성도의 삶 (요 1: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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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하지 않은 예수님, 자신 있는 성도의 삶 (요 1:45~51)  

많은 경우 시대 속에서 기독교는 핍박을 받았고, 비난을 받았고, 또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바르고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핍박하려는 사단의 세력의 방해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진실로 기독교가 그 상황 속에서 그릇된 길을 갔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두 가지 경우 모두다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결국 바른 길로 인도되었습니다. 억울한 고난의 경우는 억울함을 당할 만큼 영적으로 충만해 있었기에 결국 그들은 고난을 이길만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릇된 길을 갔을 때는 주님의 백성들이 은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주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아픔의 과정은 있었지만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가 아니라 범위를 축소시켜서 한국의 이러저러한 상황을 보면서 느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목사인 제 개인적인 소해로서는 한국교회는 지금 많은 수정과 개혁을 거쳐서 더 새로워지고 정화되는 역사가 있어야 할 상태입니다. 이것은 지금뿐 아니라 언제나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대전제는 개혁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교과서적인 사실 속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목욕을 한 사람이라도 다음날 되면 또 다시 세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 지나면 또다시 목욕을 해야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개혁된 교회라고 할지라도 끝없는 개혁을 통해서 늘 하나님 앞에 새로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고칠 것 아무것도 없어.' 하는 순간부터 교회는 부패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성을 상실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새로워짐의 역사는 언제나 성도들의 영적 깨우침과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진행되어져 왔고 늘 용기 있고 자신 있고 또 기쁨 속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엉뚱한 자기주장이나 아니면 신중한 숙고와 기도 없이 실행하게 되면 그것은 나중에 예기치 않았던 큰 어려움을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깊은 생각과 기도 끝에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방법과 방향을 찾아야만 합니다. 

환자는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고 능력을 소지한 의사가 처방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잠시나마 몇 번의 자가적 치료를 가지고, 혹은 읽은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스스로 간접경험이 있다고 해서 처치하고 치료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런 경우 말이 많아지고 또 부정확한 내용은 오히려 전파력이 더 강한 특성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매우 혼란한 것 같습니다. 시대의 도덕적 혼란과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 자신을 자책해야 될 순간,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려고 자신이 아닌 타자를 비난합니다. 책임전가와 매도로 인하여서 부패한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고 세워보고자 하는 이중적인 처신으로 인하여 더 혼란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다만 이 시대 현상뿐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온 역사 속에는 언제나 진행되어왔던 일인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 가운데 교회도 서 있고, 교회도 역시 지상의 교회로써 당연히 어려움과 고통을 안고 있는 겁니다. 그러던 중에 규모가 커지고 눈에 띄게 되니 당연히 옳았건 틀렸건 비난의 화살이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우리는 그 현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활용하여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바로 가야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 속에서 교회는 분명히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또 당연히 칭찬을 받던 비난을 받던 스스로의 개혁과 개선의 역사를 내부적으로 언제나 진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일이 없다면 흘러가지 않고 고인물이 되거나 퍼내지 않은 샘처럼 부패되어 나중에는 기능을 상실하고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전형적으로 기독교는 늘 또한 영적 전투의 장면에서 비난과 핍박의 대상이 되고는 했습니다. 

우리가 아픈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러했지만 기독교의 현재 상태 역시 많은 개선과 개혁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른 방향과 개혁을 위해서 반드시 새롭게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상은 다시 말하자면 그릇된 아픈 요소가 있어서 치료해야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환자에 대해 의사가 정확히 진단하고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 아닌 사람의 부정확한 진단내용과 개인적인 성향을 가지고 이러저러하게 확대해서 또 부분적인 것을 전체적인 것으로 말하다보니 이상한 문제들이 생긴 겁니다. 정작 고쳐져야 할 부분이 있는 경우는 "저것 보아라. 잘못 지적하고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하며 전혀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작 상처받아야 될 필요가 없는 경우에 오히려 상처를 받고 위축되는 이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이런 상태를 활용해서 복음을 위축시키고 성도들을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게 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와해시키고 그리고 스스로 축소되게 하는 고도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혁과 개선에는 초보적인 열정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양심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치우침이라는 것은 언제나 선으로 포장된 악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역사의 진리입니다. 치우침 없는 바른 균형이라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위축되고 와해되고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잠잠해야 할 만큼 축소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당시에 가장 어려웠던 교회인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편지를 보내면서 그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세상의 부패된 모든 요소들이 다 있던 교회예요. 
심지어는 고린도교회 안에 동성연애가 횡횡하고 있던 이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지칭하여 하나님의 교회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비록 거미줄이 쳐져 있고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정화돼야 될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치우고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로서의 회복을 이룰 것이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라고 버릴 것이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핏 값으로 사신 거룩한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주인은 집이 더러우면 치우고 청소하고 깨끗하게 하여 아름답게 사용합니다. 
나그네는 청소 안하고 더럽다 욕하고 집에서 나가면 그뿐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우리는 비록 교회가 주의 요소를 품은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그릇된 요소가 있다해도 그것을 치우고 정화하고 바르게 세워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바른 유지와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기관으로써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떤 것 하나 말할 때에도 신중하게 앞뒤를 생각해보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생각하면 맞는 것 같은데 전체 주변을 보고 또 멀리보고 또 그 모습을 생각해보면 영 엉뚱한 얘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려 깊은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를 돌아보고 바로세우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제 이와 같은 전제를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잠시 진행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 받은 빌립이 그가 알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가서 예수님에게로 초청하는 겁니다. 나다나엘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빌립이 소개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그이가 바로 여기에 오신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다. 한 번 가보자.”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런데 나다나엘은 이 빌립의 얘기를 듣고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당시 나사렛은 그야말로 촌 동네요, 변방이요,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남루한 지역이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무슨 특별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고 반박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빌립은 일거에 가치도 없이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와 보라. 나는 내가 직접 체험했고, 내가 느꼈고, 아는 것이고, 너는 들은풍월로 얘기하는데 들을 필요 없다. 와 보면 네가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와 보라’ 라는 한 마디에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완전히 제압되어 마치 포박당한 사람처럼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모든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요. 
“아니 예수님, 나와 만난 적도 없고 나를 알지도 못한 분인데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 잘 아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진정한 임금입니다.” 라고 그의 신앙을 예수님께 고백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네가 나를 믿느냐? 너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하고 하늘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는 거지요. 

이와 같은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빌립이 적어도 예수그리스도를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 빌립은 부끄러운 성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님은 창피하지 않은 분이에요. 예수님 앞에 누구든지 오면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예수님의 능력 앞에 무릎 꿇고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고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따라 더 큰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창피하지 않은 예수님, 창피하지 않은 성도, 그리고 우리는 당당한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주의 역사를 위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서 첫 번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시대-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혹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 대하여 오해를 하거나 아니면 악의적으로 폄하하거나 비난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영적전투의 상황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오해와 편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진리는 항상 오해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는 역사 속에 오늘도 오해를 받습니다. 
심지어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초대교회는 형제자매라고 부르니까 저들은 근친상간하는 자들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성찬식에 대해서 얘기하니까 “너희는 사람을 잡아먹는, 피와 살을 먹는 식인종이다.” 이렇게 얘기했단 말입니다. 
이런 오해를 하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요. 
오해와 편견의 근원은 무지함에서 나옵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는 무지함에서 오는 오해와 편견을 진리처럼 신봉하는 겁니다. 더욱이 영적인 부딪힘 속에서 악의적인 내리깎음을 하는 것을 봅니다. 

언제나 우리 인간들은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밥 먹고 사는 삶이 있지만 또한 그들에게는 영적인 세계의 삶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언제나 진리와 그 진리에 대항하는 사단의 세력과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영적세계가 진행되는 이 세상에서 악의적인 비난과 모해함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역을 무너뜨리려고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이 세상 끝날 까지 있어질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격려를 받는 것입니다. 
일부 성도들이나 많은 성도들의 실제적인 실수나 부족함으로 인해서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들에 대해서 비난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작은 비난을 받을 일이나 사실로 인해서 마땅히 비난을 받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예수그리스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을 가지고, 그 자연인이 잘못한 것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비난한다면 이것은 매우 비논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세상의 성향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알고 인정하고 그러기에 더욱 더 조심하고 애쓰는 것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그 사람의 가정이나 가문, 혹은 심지어는 출신학교, 고향까지 들먹이면서 비난하는 것이 인생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방어할 수 있는 상태를 구축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려움이란 언제나 어느 집단이나 일부에게서 시작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큰 모임이 있으면 그 가운데 반드시 어려운 집단의 무리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 애쓰고 또한 어려움이 있을 때 마치 그것이 전부인 냥 호들갑떨 필요가 없습니다. 
큰일도 놀랄 일도 없이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어려움을 자숙하고 해결하고 줄이기 위한 노력이 우리들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많은 시대상황 속에서 억울한 고난과 비난, 마땅히 받아야 할 비난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경우에 항상 어려움을 겪었고, 그러나 그 어려움을 극복하며 오히려 반전의 역사를 가지고 이제까지 복음은 진행되어져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광야의 생활과 가나안 정복의 전쟁을 봅니다. 항상 그들은 가장 큰 위기 때마다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위기가 있을 때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을 봅니다. 
수없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가 순간마다 나타나 그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감옥에 투옥되었어요.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기도했습니다. 옥토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베드로는 출옥하게 되었지요. 베드로는 그 때 깨닫습니다. 출옥을 마친 후에 ‘아! 내가 이제야 정말 깨달았다.’ 그는 깨닫게 됨을 고백하고 있는 거지요. 
이 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더 불붙듯이 주의 복음이 확장되어져 갔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쫒아주었어요. 참 좋은 일한 거죠. 그러나 그 귀신들린 여종을 통해서 점을 쳐서 돈을 벌던 그 주인들은 너무나 마음이 상한 거죠. 자기가 돈을 못 버니까. 
그러니까 사도바울을 모함해서 감옥에 가뒀습니다. 

너무나 억울했어요. 좋은 일하고 귀신 쫒아주고 모함 받고 감옥에 갇혔단 말이에요. 속이 분할 테지요. 그러나 사도바울과 실라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며 기도했단 말입니다. 그 때 그 밤중에 옥토가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지며 그들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어요. 이것을 보고 간수가 죄수들이 탈옥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어요. 그 때 바울이 말립니다. 
“내가 어찌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외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억울하고 어려움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왕성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봅니다. 각종 능력과 역사의 장면, 기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죽음이 있어서 부활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꿈의 권세를 깨뜨림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런 시대를 배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그들이 요청하는 진정한 사랑과 은혜를 이루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무엇인가 요구하고 비난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아픔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부분을 잘 들으셔야 됩니다.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비난하고 요구하고 교회에 대해서 질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요구하는,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는 얘기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얘기를 들었을 때 표피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고 진정 그 마음속에 꺼내지 못해서 그 말 대신 다른 말을 하는 것의 의미를 파악을 해야 합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기독교를 비난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파하고 요청하는 슬픔이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우리는 이게 어려운데, 우리는 이것을 도와줘야 되는데 당신을 우리를 돕지 못하고 그와 같이 있습니까? 하는 얘기지요. 
아픔 속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로 대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주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지 타도와 처벌의 대상으로, 징계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의 나라는 이 땅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사랑으로 모두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진정한 승리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심정을 파악하고 소지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요청하고 그들을 비난하고 있는 거지요. 
만약 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도 없지요. 
환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지요? 
기도해주는 일, 필요를 위해서 내가 줄 수 있는 만큼 주는 일, 주고 싶은데 없다면 주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여 무엇인가를 가지고 얻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진정한 승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기대와 사명을 느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기쁨과 감사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이러한 사회를 보면서, 이 분위기를 느끼면서 정말 이 사회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정말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필요로 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픔이 있어 그나마 요구한다는 것은 그래도 더 나은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로맹롤랑이라는 사람이 여자에 관해서 얘기했는데 여러분들 아마 들으시면 학생 때 읽어서 잘 아실 겁니다. 
여인들 중에도 불쌍한 여인들이 몇 종류 있데요. 
제일 불쌍한 여인 중에 하나가 병든 여인이라고 그래요. 병든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버림받은 여인이래요. 버림받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의지할 것 없는 여인이고요, 더 불쌍한 사람은 쫒기는 여인이고 쫒기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이 죽은 여인이래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래요. 
잊혀지지 않은 것 감사하죠? 

한국교회는 시대 속에 잊혀진 교회가 아니에요. 현존하고 있는 교회로 무엇인가 요청하는 것이 있기에 비난하고 요구 당하는 이와 같은 현존하는 교회입니다. 잊혀진 교회가 아니에요.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요청하고 요구하고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표현을 비난이라는 표현으로 하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해야 될 바른 바를 요구받고 있는, 기대되는 집단이고 그 기대에 부흥하는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행간의 목소리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위축되고 붕괴될 것이 아니라 저렇게 비난하는 목소리 가운데 우리에게 요청하는 그들의 진정한 아픔이 있다라는 것을 알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우리는 애쓰고 수고하고 또 우리자신의 그릇된 점을 고치고자 하는 애씀 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음을 알고 더 자신 있고 오히려 힘 있고 담대하게 우리의 할 일을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해 봅니다.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되는 기본적인 생각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창피하게 여기지 않고, 예수 믿는다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왜 수세적이고 창피하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평가해도 나는 싸. 내 자신이 부족해.’ 라고 느낄 때입니다. 

영적으로 위축을 느낄 때 우리가 예수 믿은 것에 대해서 부끄럽고 위축되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 자신이 어떤 믿음의 짐을 지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느낄 때 그 짐을 지고 싶지 않을 때는 수세적으로 창피하게 느낍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 중에서도 세상의 논리와 같이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서 부끄럽게 여기고 오히려 교회나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교회나 성도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에게 있어서 당신이라는 교회나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나"일 뿐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요구하고 비난하고 요청할 수 있는 성도는 아무도 없어요. 바로 그것은 자기를 향하여 하는 말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 되고, 자신이 그 일을 위해서 스스로 나서서 수고하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비난하고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은 아무도 없고 내가 그 일을 바로 해야 될 내 스스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은 누구도 외부인이 될 수 없고 책임을 지는 입장에서 너가 아니라 내가 되어 우리는 이 세상을 품고 섬기고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영적인 힘이 너무 약해서 자신의 부끄러움과 세상에 대하여 당당한 영적논리를 가지지 못할 때, 또한 사단의 사주로 인하여 영적인 힘을 상실할 때 우리는 스스로 창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이 완벽해서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 은혜의 지경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완벽한 상태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현 상태에서 우리의 잘못과 부족을 지정당하면 정당한 것이라면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허물을 살피고 수정하고 회개하며 개선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정체성을 부인하거나 위축의 근거가 돼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은 우리에 대한 기대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신이 잘하고 있으면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많은 경우에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실제로 그 부분에 약점이 많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나드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어요. 그리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가롯유다가 분기가 팽천해서 비난합니다. 아니 이것을 팔아 삼백 데나리온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데-삼백 데나리온이면 장정의 삼백일분이에요-일 년 치 연봉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이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가만 두어라 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함께 있거니와 나는 그렇지 않다. 그 여인은 내 장례를 준비하였느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저 여인의 이야기도 같이 전파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정말 예수님께 자신을 헌신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가롯유다는 어땠을까요? 과연 그렇게 남을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했을까요? 가롯유다는 남을 어렵게 생각한 것 없어요. 그리고 오히려 돈궤에서 돈을 훔쳤다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가롯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그것을 팔지 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팔아 가지고 있을 때 그 돈을 탐내서 자기가 훔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분노하고 있었던 거지요. 

다른 사람을 도와 본 사람,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자신은 알고 있고요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하라고 얘기할 종류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것을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뿐이지요. 가혹한 비난이 아니라 따스한 격려를 이룰 때 진정으로 개선의 여지를 바라는 자의 모습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비난하는가는 간단해요. 내가 그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그에 대해서 가혹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방어적인 논리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일은 다 합리화하고 다 정당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필요 없는 위축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부인할 정도로 위축되거나 근거 없는 자멸 감으로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회개에는 반드시 있어야 될 요소가 있습니다. 회개함으로 부끄러워 예수님을 떠난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사단의 사주함입니다. 회개하면 우리의 허물을 인정함으로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힘입어 감사함으로 오직 예수님 곁에 있는 겁니다. 
사단의 일인가, 예수님의 일인가는 간단합니다. 

사단의 역사는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망가뜨립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과연 우리의 일로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되고 백성들이 기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가 점점 쇠해져 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의 중요한 근거입니다. 
사단의 역사는 아파서 고통당하고 무너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에게 힘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본인이 그 부분에 약점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다른 사람이 어떤 경우에 격렬하게 비난하는 경우를 보면 그 분야에 반드시 약점이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을 가리기 위한 심리적 투사현상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을 볼 때 그의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우리는 더 파악할 수 있는 거지요. 
이론만 알고 실제를 전혀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주장합니다. 실제까지 실행한 사람은 주장하지 않아도 그 내용이 기쁨을 통해서 저절로 전파됩니다. 주장하지 않아도 전파되는 것이 선행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내 삶의 실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은혜가 전파되도록 살아가는, 실천을 이루는 성도들이 돼야 되는 겁니다. 
왜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창피하지 않고 자신 있고 당당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빌립을 보면 어떤 오해와 비난에도 자신 있고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해 봤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와서 보면 안다' 예요. 
네가 와서 직접 체험해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너는 알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난과 부끄러움을 능가할 더 큰 기쁨과 감격을 찾았지요. 이 사람은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을 피해서 한낮 땡볕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을 택하여서 물을 길으러 왔어요. 예수님과 만납니다. 대화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발견해요. 그 때 물동이를 내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을 피해서 다니는 여인이 그 사람들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사람 피해서 다니는 하잘것없는 여인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에요. 

복음은 놀라운 힘을 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은 자기가 피해 다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능가하여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과 능력을 우리들에게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생명의 진리는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고 당당하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도망치던 사람에게 찾아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들을 주님 앞에 데리고 오는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루는 겁니다. 

삭개오, 예수님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뜨거워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을 정말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 뽕나무에까지 올라갔던 사람이에요. 
그는 여건도 안 됐어요. 키가 작았는데 사람들은 너무 많아서 볼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을 헤치고 가기에 혹시 사람들이 나를 아는데, 나는 비난 받는 사람인데 이거 어떻게 될까 그럴 수도 없었어요. 그는 뽕나무위로 올라갔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이 너무 뜨거워, 순간 그는 자신에 대한 평가 자체를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습니다. 
“삭개오야, 오늘 내가 너희 집에 가겠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고 영원한 생명의 역사를 입죠. 

삭개오는 그때 고백합니다. 
“내가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내가 남에게 거짓으로, 내가 남에게 억울하게 뺏은 것이 있으면 내가 네 배를 갚겠나이다.” 
그는 생활의 실제적인 회개와 변화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왜 창피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까요? 
직접 체험해 본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능력이 그로 힘 있는 자, 당당한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뜨거운 열망이 창피할 수 있는 여유까지도 넘어섰던 때문이지요. 

예수 믿는 것이 창피하지 않고 당당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과 성도의 삶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위축되거나 창피한 백성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창피해한다면 하나님이 창피해하는 작품을 만드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창피한 분입니까? 
우리는 당당하고 자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됩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는 거예요.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백성으로 만드셨다면 우리는 그 의도대로 살아야 됩니다. 
미가 선지자는 선언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하나님이 화를 풀어버리시기까지는 화를 당하려니와 하나님이 나에게 화를 다 풀어버리시고 나를 다시 위의 빛에 세우시리라' 
그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화를 풀어버리신 후에 다시 세우신단 말이지요.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 있고 당당하게 살아가며 복음전파를 위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단호한 결의에 찬 행동을 봅니다. 
빌립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편견을 단번에 제압해 버렸어요. 너무 자신 있으니까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요, 나 자신에 대해서 구구하게 설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삶이에요. 
설명하지 않아도 내 삶을 보고, 내 모든 삶의 행적을 보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빌립은 단번에 제압해 버렸어요. 
“와 보라” 
그 말은 단순한 한 마디 말이 아니라 그의 영적인 최선을 다한 그야말로 나다나엘을 흔들어버리는 이와 같은 강력한 메시지였지요. 
자기스스로가 체험한 일이기에 어떤 풍월로 들려오는 소리정도로 듣고 말하는 나다나엘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호할 수 있었어요. 나다나엘은 빌립의 기세에 밀려 말 한마디 반박 못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단호하고 결의에 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삶의 진실과 성실, 그리고 실제적인 영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삶의 실제와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 나오면 예수님은 그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분이예요. 

오늘 이와 같이 마음에 반박된 심리를 가지고 있었던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에 와서 예수님과의 잠깐의 대화 끝에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그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된 거예요. 
예수님은 창피한 분이 아닙니다. 
'기껏 데리고 왔더니 예수님이 정말 너무너무 창피해서 이 사람... 이렇게 됨으로 나도 창피해.' 이럴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 데려오면 그 다음은 예수님이 해결하시는 분이예요. 

여러분, 저는 이런 기도 잘해요. 
"하나님,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바꿉니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바꿉니까? 주께서 역사하셔서 성령으로 그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성도가 사람의 마음을 못 바꿔요. 목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가 없어요. 성령께서 바꾸실 수 있을 뿐이지요. 우리 주님은 그 일을 하십니다. 
오히려 주님 앞에 나온 이들은 주님 앞에 그 속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결정적인 은혜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 입은 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더 나아가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기대하게 하시고 날마다 새로운 일을 이루시고 새로운 기대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은혜를 느끼는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날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소망과 꿈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의 삶은 거의 비슷하잖아요. 반복된 삶을 살잖아요. 반복된 삶이 반복된 의미로 와 닿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 속에 진행되니 그것이 날마다 우리에게 지루하지 않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게 한단 말이에요. 똑같은 일을 해도 전엔 먹고 살기위해서 살았어요. 똑같은 일을 하는데 이제는 남을 돕기 위해서 산단 말이에요. 
똑같은 일을 하고 사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향하여 달려가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꿈과 하나님의 은혜와 기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창피하지 않은 성도들 돼야 해요. 
창피하지 않은 교회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 창피하지 않은 교회되어야 해요. 

우리는 당당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줄 때, 정말 그것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당당합니다. 끌고라도 갈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어 주십시오 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부끄러움 없는, 창피해하지 않는 성도들 되고, 
창피하지 않은 예수님을 기쁨으로 전할 수 있는 당당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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