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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만나라 (눅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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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나라 (눅 5:27~32)

새정부가 출범했습니다. 3·1절 기념주일인 오늘 새정부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바를 생각해봅니다. 언론을 통해서 많은 바람들을 바라보면 한 마디로 새정부는 부디 힘있는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힘이 있고, 국방에 있어서도 힘이 있어서 국민들이 나라의 안보 때문에 걱정하지 아니하는 나라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 그 주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나라의 안보입니다. 

여러분, 전 세계 퍼져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국 이스라엘을 챙기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때로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국 이스라엘을 얼마나 챙기는지 모릅니다. 좀 심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만약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거나 좋지 않은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유대인들은 비밀경찰 같은 사람들을 보내 그런 일의 밑뿌리까지를 없앤다고 합니다. 과장되고 억측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런 과장과 억측이 나올 정도로 전세계 유대인들은 조국 이스라엘을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조국 이스라엘이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여망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조국 이스라엘이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1930·40년대에 있었던 무서운 일들이 생긴다면 조국이 자신들을 지켜주어야 하기 때문에 힘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도 작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를 생각해보면 인질사태가 종결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약 그 인질이 미국 사람들이었다면 미국이 저렇게 가만히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도 결국 우리가 힘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해결되었지만 우리에게 이런 정도의 국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나라 특수부대를 파견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소문대로 돈으로 해결했다면 그런 돈을 줄 능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의 주권, 안보 문제는 확실히 해야 합니다. 나라가 주권을 빼앗겼을 때 당하는 일들은 우리의 모든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혹독합니다. 

옛날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들도 당했지만 주로 유대인들이 당했던 아우슈비츠 다큐멘터리를 최근데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저렇게 악해질 수 있구나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또 하나 더는 우리도 저렇게 혹독한 일을 당할 수도 있겠구나 였습니다. 

이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소름끼치는 일은 나도 저런 사람처럼 악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또 자칫 잘못하면 저 사람들이 무고하게 혹독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나도 당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고 세상이구나 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다큐멘터리의 원고를 저한테 주었다면 읽기만 하라고 해도 저는 성우들처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잔인한지 모릅니다. 혹독한 것의 대표적인 것으로 아우슈비츠로 대변되는 참혹한 학살 그리고 인권유린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당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당했던 것을 카메라 앞에서 증언하는데 저는 저들이 어떻게 저렇게 맨정신으로 증언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나라를 잃으면 그런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 이외 또 하가 있는데 경제스타일입니다. 통치국은 어떻게 하든 간에 피통치국인 식민지의 모든 경제를 다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경제수탈의 방법은 세금이라는 이름을 이용한 경제수탈입니다. 세금을 이용한 강탈은 식민지수탈의 전형적인 도구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했습니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일제 식민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일제가 징수해간 세액 총액은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최근에 그 자료가 나왔는데 1910년에 우리나라가 일제에 바친 세금이 9백6만 엔 이었는데 지금으로 가치를 따지면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33년 뒤인 1943년에는 3억6천8백70만 엔으로 40.7배로 늘어났습니다. 거기에 전매수입 1억6천7백50만 엔까지 합하면 5억3천6백20만 엔으로 59.2배에 달한다는 보고가 나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세금에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원전과 후, 수세기동안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로마제국이 그러했는데 그 일 중에 하나를 담당했던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리라는 이름입니다. 로마정부는 세리를 임명할 때 로마 사람이 아니라 유대의 실정이나 유대사람을 잘 아는 유대인 중에 임명했습니다. 세리는 로마정부를 위해서 이스라엘에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사람인데 이러다보니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변절자, 매국노, 인간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로마정부는 세금징수에 대해서 세리에게 모든 것을 일괄 위임했고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금액이었습니다. 

세리를 어떻게 임명하는가를 보면 참 재미납니다. 능력이나 다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세리 임명 공고를 붙입니다. 그러면 여러 사람이 신청하는데 신청할 때 이력서나 다른 경력을 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제일 많은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겠다고 약속하는가 입찰을 붙여 거기에 제일 많이 써낸 사람을 세리로 임명하였습니다. 로마정부는 오로지 세리가 입찰할 때 써낸 금액을 로마정부에 다 바치는가에만 관심을 쏟을 뿐 얼마나 많이 거두는가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세금을 거두면 그 차액은 세리들이 거의 합법적으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시민들은 세금에 관한 법이나 세율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의 생활은 당연히 풍요로웠습니다. 이 때문에 세리는 변절자, 매국노에 더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악질분자였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텐데 당시 세리들은 요즘 고리대금업자들이 이율을 과하게 받는 정도가 아닙니다. 요즘도 연체에 대해 높은 이자를 메기는 것은 물론 이자를 갚지 못할 때는 인신매매까지 넘기는 무서운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세리가 그러했습니다. 

이것을 알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들을 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영업하는 사람들이 내는 영업세뿐만 인두세 등 다른 세금을 왕창 매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들을 밀어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에 끼지 못하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리는 이 기록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 로마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그 책에는 ‘나는 언젠가 어느 지역을 가다가 이상한 기념비를 보았다. 그 기념비는 정직한 세리를 기념하는 기념비였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정직한 세리가 없는데 희한하게 그 지방에서는 정직한 세리가 있더라고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세리는 당연히 정직해야하는데 어떻게 정직한 세리라고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는가? 라는 글입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도 세리출신입니다. 본문은 그런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무서에서 일하고 있던 세리 마태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따라 마태는 그렇게 좋은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먼저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마태였고, 그는 나중에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우리가 가장 많이 읽는 신약성경의 첫 부분인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도가 되었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기독교는 어떠한 종교인가를 말씀하는 책입니다. 그 누가복음은 5장의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나 하시고, 그 다음에는 기독교 신자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독교는 사람에 대해서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일을 한 사람이었는가를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총리나 장관 임명 청문회를 보면서 참으로 아쉬운 것은 꼭 청문회를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들을 어떻게 공부를 시켰고, 돈을 어떻게 모았는가는 별로 묻지 않고 재산이 얼마나 있는가 이런 것만 따집니다. 또 병역을 어떻게 치렀는가 등 과거만 따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와 다릅니다. 기독교는 과거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방향성만 제대로 되면 기독교는 묻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매국노와 같은 세리노릇을 했다고 할지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하기 좀 뭐하지만 매춘한 사람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과거를 말하지만 기독교는 그것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유명한 사람인 막달라 마리아도 이런 사람이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구약에 나오는 기생 라합도 이런 사람의 한 종이었습니다. 내 스스로 밝힐 수 있는 병력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낼 수 없는 병력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도 기독교는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노예라도 그 출신은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둑, 강도였을지라도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는가도 묻지 않습니다. 지금만 아니면 됩니다. 

제가 압구정동에서 부목사로 시무할 때 교회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행정목사였는데 등록카드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등록카드에 본적과 학력을 쓰는 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고쳐 양식을 바꿨는데 20년 전의 일이므로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교회에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얼마나 좋은 대학을 나왔는가 묻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것이 있어야한다 저런 것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말씀하시는 바 그대로 해야 합니다.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장관 청문회를 하면 과거에 그런 것도 물론 물어야하겠지만 지금 이 사람이 얼마나 진실한 사람이고 얼마나 충성되게 국민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할 사람인가? 얼마나 능력있게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인가 이런 것을 물어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에 참으로 아쉬운 것이 많았습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달라져야 합니다. 첫 번째 하시는 말씀은 교회는, 기독교인들은 과거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시는 말씀은 그러나 과거에 어떻게 했든지 간에 참된 기독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신자들이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버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버린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지만 우리가 잘 알 것은 무조건 무엇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직업,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함부로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 기독교는 어떤 직업이든 다 가져도 좋다고 말씀하시고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아 그것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권력이나 지위나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르게 해서 권력과 지위, 명예를 가졌다면 잘 지켜서 그것으로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사랑해야합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귀하든지 세상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소유하고 그것에 내가 함몰되었다면 그것은 버려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적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정신을 잃고, 그 속에 함몰되고 그것의 소유가 된다면 그것은 버려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에 있어서 그것은 맨 처음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이었습니다. 이역만리 먼 곳에 와서 참 힘들게 재산을 모았습니다. 물론 재주를 많이 부렸지만 너무 좋았습니다. 자식이 여러 명이 있었는데 자식이 너무 좋았습니다. 문제는 재산, 사랑하는 사람, 귀한 자식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그것들을 모으고 챙기느라 하나님을 20년 동안 찾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식이, 재산이 나를 소유한 것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소유당하고 내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버려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훈련을 시키셨습니까? 기어이 옛날에 속였던 형님이 혼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다급해졌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자식들, 귀하게 여기는 재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그 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는데 그 계기를 성경은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깐 떨어진 것입니다. 완전히 다 버린 것도 아니고, 오래 떨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루 밤 멀리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멀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내라고 이야기하는 정도까지 떼어지자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에 함몰되고 끌려가는 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에게는 세리라는 호화로운 직업이 있었습니다. 세리란 자기 일이 아닐 때는 손가락질 하지만 막상 자기가 그런 직업을 가질 기회가 되면 좋아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인정해야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세리라는 직업을 버렸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29절에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는 마태를 이야기합니다. 

잔치를 한 것은 직업을 버리는 것에 대해 기념잔치를 한 것이 아니라 까닭이 있습니다. 잔치에 세리들이 왔는데 세리들에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세리라는 이 직업을 버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모셨습니다. 그는 이제 나는 저 예수를 따라가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28절)라는 말씀입니다. 일어나라는 것은 헬라어로 툴툴 털고 일어났다는 것인데 끝났다는 것이므로 완전한 청산, 완전한 결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여러분들이 귀하게 생각하는 것, 정말로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버리지 못합니다. 그냥은 아까워서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 귀한 것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로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손에 쥐어야만 가능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함몰될 정도, 내가 지배당할 정도, 내가 끌려갈 정도, 나를 잃을 정도로 더 좋은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것의 가치를 다 뛰어넘어 정말로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세상이 다 바뀌고 보는 눈이 다 바뀌게 됩니다. 옛날에 그렇게 귀하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옛날에 별 것 아닌 것이 정말로 귀한 것이 될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게 되면 그렇습니다. 

이탈리아 산비탈에 있는 아시스라는 평화롭고 조그마한 마을이 있습니다. 제가 이 마을을 참 좋아하는데 이 마을의 한 젊은 청년이 어느 날 마을 아래에 있는 들판에서 말을 타고 가다가 나병환자를 만났습니다. 옛날에는 방탕했지만 방탕을 버리고 아주 고상하고 품격있는 청년이었습니다. 늘 자기 품위를 지키고 스스로 고상하다고 생각했던 이 청년은 나병환자를 보고 혐오감을 느껴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청년이 말에서 내려 그 나병환자에게 뛰어가서 나병환자의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나병환자는 입 맞추는 것도 다 필요 없으니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청년은 주머니에서 있는 돈을 다 꺼내 나병환자의 손에 쥐어주고 다시 그 나병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말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막 말에 올라타고 가려고 할 때, 쳐다보니 조금 전에 입을 맞추고 돈을 주었던 나병환자가 온데 간데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청년이 나이가 들어 죽을 무렵이 되어 쓴 유언이 있는데 그는 유언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에게 회개의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고의 성자 성 프란시스코가 탄생된 배경입니다. 프란시스코에 있어서 그 나병환자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만난 것이 프란시스코의 모든 것을 다 바꾼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러했습니다. 많이 배웠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들로부터 존귀함도 가지고 있었고 편안함도 누리고 있던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잡으러 가던 마다스커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의 입으로 그 귀한 것들이 다 배설물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배설물이 무언지 아시지 않습니까? 토한 것이나 뒤로 배출하는 것이 배설물입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예수를 만나고 난 후 바뀐 것입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죽여야한다고 생각했던 예수,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예수를 만나십시오. 예수를 만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이전에 그렇게 귀하던 것이 이제는 값없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옛날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예수믿는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하는 것들이 우습게 보이던 것이 정말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대로 따라가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길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길로 오라고 말씀하시고 어떤 사람은 이런 모습으로 예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각각 여러분에게 가장 알맞게 우리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시고 그 길로 따라가십시오. 참된 길은 거기에 있습니다. 참된 행복이 거기에 있고 참된 인생의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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