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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빌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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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빌 4:11~13)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조건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 갇혀 있었는데,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 후원금을 거두어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냈습니다. 이에 사도는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빌립보서의 특징은 기쁨의 삶을 강조한 것입니다. 실제로 본서를 읽어보면, “기쁨”에 관해 언급한 것이 14 구절이나 됩니다. 

특히, “기뻐하라”는 권면이 세 번 나옵니다. 2장 17절로 18절에 “17)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하였고, 3장 1절에서는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였고, 4장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늙고 병든 몸으로 열악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가 이처럼 기쁨이 가득한 편지를 썼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항상 기뻐하라”는 사도의 권면을 읽으면서 ‘정말로,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고 기쁨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가 말씀한 기쁨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 맛보는 그런 기쁨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성사시켰을 때 맛보는 기쁨도 아닙니다. 돈을 벌지 못했을 때에도, 일이 실패했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기쁨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는 것은 사정이 다릅니다. 무슨 방법으로 항상 기뻐하면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불가능한 것을 말씀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항상 기뻐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항상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혹시 마음속에 기쁨이 없으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주 안에’ 있는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사는지를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믿는 자의 심령 속에는 기쁨의 샘이 솟아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세상 근심과 걱정, 욕심, 미움과 같은 잡동사니로 인해 샘이 막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시골 길을 산책하다가 길 가에 우물이 하나 있기에 들여다보았더니 그 안에 이런저런 못쓰게 된 물건들이 버려져 있고 고인 물은 푸른 이끼로 덮여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그 동네 사람들이 다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을 것이지만, 이제 상수도가 설치되고 나니까 쓸모없어 버려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방치하면 근심과 의심과 태만과 같은 것이 마음을 어지럽혀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타성에 젖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을 향하여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시고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회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소지하고 문밖에 서 계시는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지금까지 닫혔던 은혜의 통로가 열리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의존적인 존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을 진화의 산물로 봅니다. 진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절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저절로 진화된 존재로서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 인간을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물로 봅니다. 이는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기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의존해서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코로 숨 쉬고 사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호흡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단 5:23). 우리의 심장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지적으로 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장의 박동을 주장하십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시편 16편 7절에서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찌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밤중에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의 박동을 느끼면서 자기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윗의 신앙이 얼마나 실질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지만, 신앙인은 자기의 호흡과 심장의 박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느끼고 감사의 찬송을 올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비결 

이렇게 볼 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 역시 주님을 의존해서 기뻐하라는 권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생활 속에서 만나는 고난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는 자기가 겪은 고생을 이같이 회고했습니다.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자, 어떻습니까? 전에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사도 바울이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그가 그처럼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도움으로 사도는 일시적으로나마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으로 풍부해 진 때나 궁핍한 때나 자족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생활이 풍족해 졌다고 그 때문에 안심하고, 궁핍해서 끼니를 거르게 되었다고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은 경제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권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장을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경제가 좋아지면 믿음도 나아지고, 경제가 나빠지면 믿음도 떨어집니다. 우리는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서 믿음의 상태가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최선껏 주님을 섬기고, 부하면 부한 대로 최선껏 주님을 섬기면 되는 것이지, 경제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씀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는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사도가 구태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라고 한 것은 그만한 뜻이 있습니다. 지금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주님이심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세계역사를 살펴보면, 인류의 큰 스승들을 여러 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분들의 사상이나 가르침은 지금도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됩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분들은 본질상 우리와 같은 인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죽음은 그가 남긴 사리들이 증거하고 공자의 죽음은 산동성 곡부에 있는 그의 무덤이 말해 주며,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이 지금도 유효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안내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지,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 근거로서 앞에서 언급한 인류의 스승들은 다 죽음에게 삼킨바 되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장에 이르기를 “3)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을 대합니다. 중풍병자,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문둥병자, 혈루증 환자, 등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자들을 고쳐주셨으며, 야이로의 어린 딸과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서 온전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셨으며, 풍랑을 명한즉 잠잠케 되었으며, 물 위를 걸으신 적도 있으셨습니다. 이 모든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능력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는 스승은 이 같은 실제적인 능력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인류의 구세주는 능력이 없어서는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온갖 고난을 겪고서도 굴하지 않고 이겨낸 것은 능력의 주님께서 그를 통해 역사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의미 

그리고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 가운데서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보면, 이 구절만 떼어놓고서 “모든 것”이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오해한 것입니다. 오늘날 무속적 기복신앙이 유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사람들의 예수 믿는 목적은 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성공 출세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근본 목적이 잘못되었으므로 아무리 열심을 낼지라도 주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는 목적이 잘못되면 복을 비는 대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미신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겼을 때, 그들은 그것을 우상이 아닌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아론이 백성들의 위협에 굴복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4)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속에 금송아지가 곧 하나님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금송아지 숭배는 현대의 황금숭배 곧 돈을 신으로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당면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오랫동안 쉬지 못하고 강행군을 하다보면 심신이 지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 낙심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그를 배척할 때 마음에 근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면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난관을 만나서도 아무 불안이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면 그 편이 더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러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주님께 자신의 모든 문제를 내어맡겼습니다. 그리했더니 주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셔서 당면한 난관을 너끈히 해결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그가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이룩한 모든 업적이 실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간증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육신의 질병을 앓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는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질병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가시 또는 사단의 사자라고 한 것을 보면 그로 인해 사도가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그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귀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9)…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히 11:38). 


위기를 승리의 기회로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 사도 바울의 간증을 대하면서 그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차원이 높아서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와 같은 승리를 경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인물도 한 때는 비참한 실패를 경험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이같이 탄식했습니다.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방금 읽어 드린 탄식어린 고백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진술은 둘 다 사도 바울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뼈저린 패배를 당해 탄식하던 그로 하여금 승리의 개가를 외치게 한 것일까요? 시기적으로, 전자는 그가 인간적인 열심과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살았던 때를 말하고, 후자는 그가 오직 주 안에서 살기로 했을 때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 안에서” 행하느냐, “주 밖에서” 행하느냐에 따라서 승리와 패배가 결정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어디서나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양심은 정죄를 당합니다. “거 봐라, 네가 별 수 있겠어?” 라고 사단이 비웃습니다. 패배를 거듭하면 용기를 잃고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단념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포기하지 말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의지하고 다시금 도전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큰 소리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해 주십시오!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시련으로 인해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있고, 실직일 수도 있고, 가정불화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또 다른 문제로 인해 삶의 위기를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방법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결코 은혜로운 해결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에 윌리엄 문이라는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무신론자로서 나약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기독교인들을 공격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를 당해 두 눈을 잃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세상을 원망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받고서 조금씩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연구해서 점자 타이프를 고안해냈고 점자성경도 만들었습니다. 그는 장애가 없는 불신의 삶보다 장애를 안은 신앙의 삶이 훨씬 행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윌리엄 문과 같이, 어떤 장애는 고칠 수 없으므로 평생 감수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그 누구도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없고, 남의 위로와 도움을 기대할 경우는 오히려 실망만 더할 뿐입니다. 세상을 원망해 보았자 고통이 경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뢰하기만 하면 육체의 가시로 인해 더 큰 주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사도 바울과 같이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어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는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큰일을 계획하고 시도하라 

우리 주님의 능력은 한이 없으므로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여 문제에 도전할 때 능히 감당할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시련이 너무 크고 끝이 없어 보이거든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는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믿는 사람은 누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간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아무 어려움이 없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지금보다 더 헌신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진보를 모든 사람 앞에서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도록 끊임없이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더 큰 일을 계획할 때 필요한 능력은 주님께서 부어주십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지 말고 능력 주시는 주님을 믿고 담대하게 새로운 일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신 이 위대한 말씀이 성도님들의 입술을 통해서도 간증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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