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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랑이 있는 인생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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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이 있는 인생 (막 4:35~41)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지난 수요일에 있었습니다.  비록 투표율은 저조했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299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습니다.  이제 이들이 국민을 잘 섬기고, 나라를 부강한 나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갈 것을 기대해 봅니다.  예전과 같이 이번 선거에도 방송사의 예측조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선거가 마감된 저녁 6시 정각에 방송사는 여론조사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예측조사도 어김없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조사기관이 나름대로 열심히 수고했지만 이젠 점점 예측조사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대통령예비선거가 진행 중인 미국에서도 여론조사를 통해 예측조사를 하지만 빈번히 다릅니다.  어떻게 인간이 앞을,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종종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합니다.  인생은 항해입니다.  망망대해에 한 조각의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항해와 같습니다.  그런데 바다만큼 변덕스러운 곳이 없습니다.  좋은 날씨가 계속되더라도 어느 순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잠잠하다가도 한순간에 검은 구름이 몰려와 바람이 붑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하면 낭패를 당하는 것이 바다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늘 순풍에 돛달고 가는 것이 항해가 아닙니다.  때론 광풍이 붑니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눈물이 있는 인생이면서, 또한 풍랑도 있는 인생입니다.  이런 우리의 인생에서 풍랑을 이기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요?  본문은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풍랑의 때에 어떻게 풍랑을 극복하고 우리의 목적지까지 파선하지 않고 잘 갈 수 있을까요?


 첫째는 주님이 함께해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바다를 항해하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갈릴리바다는 해면이 낮고 주위의 높은 산 때문에 기압의 교류가 생기면서 강풍이 일어나는 현상이 종종 발생하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배를 타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교통이 발달되지않던 그 시대에 갈릴리바다는 유대 땅의 동서를 가로 지르는 지름길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건너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제자들과 함께 전도여행을 해야 했기에 갈릴리바다를 종종 건너가곤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건너가던 중에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잔잔하던 우리 인생에 예측할 수 없는 고난처럼, 제자들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풍랑이 일어났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풍랑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에는 주님이 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면 풍랑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빨리 아는 것이 인생의 지혜요, 비결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분명 풍랑이 일어나는 인생인데, 풍랑의 때에 주님이 함께 하면 두려움이 적어지고, 걱정과 근심도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능력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믿고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항해라면, 우리는 지금 모두 배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선장입니다.  어떤 선장을 만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 인생의 선장이 되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선장으로 배를 몰고 목적지 천국까지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46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우리의 인생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나의 환난이 마치 땅이 요동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로 빠지며, 거대한 파도가 닥치고 해일이 불어 육지를 뒤덮는 것처럼 크고 두려울지라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주님이 동행하십니다.   송명희 시인은 “동행”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 고통당할 때 너 고통당할 때 주님이 너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고
 너 짐지고 갈 때 너 짐지고 갈 때 주님이 너의 짐을 가볍게 하시며
 너 슬플 때에 너 슬플 때에 주님이 위로의 눈길로 너와 동행하신다
 너 외로울 때에 너 외로울 때에 너 어찌 홀로 있다 하는가
 너 괴로울 때에 너 괴로울 때에 너 어찌 혼자 있다 하는가
 너의 모든 것을 동참하시는 주님을 너 바라보라’

 여러분, 내가 고통당할 때 주님이 나와 함께 고통당하시고,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주님이 그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슬플 때에 위로의 눈길로 주님이 나와 동행하십니다.  그가 나의 도움이 되시고, 그가 나의 위로가 되십니다.  분명 풍랑이 있지만 주님도 계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풍랑의 때에는 더욱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위로와 힘을 얻으면서 모든 풍랑과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풍랑이 일어날 때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그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양동이로 퍼 날리고, 돛을 이리저리로 움직이고, 중심을 잡기 위해 애를 씁니다.   제자들의 이런 허둥대는 모습을 주님은 한마디로 믿음이 적은 것으로 단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잔잔케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니까 그들의 믿음이 적어서 나타난 행동들, 바로 그것이 풍랑이 일어날 때 제자들에게서 보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 사건이 예수님사역의 초기에 있었던 일이어서 더욱 믿음이 없을 때지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보는 것은 언제나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가까이에서 보고,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믿음이 적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있습니까?  특히 풍랑이 일어날 때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과연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외적으로 나타난 것을 믿음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수학공식처럼 푸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의 언어와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잣대가 바로 풍랑이요, 고난입니다.  우리 삶에 풍랑이 올 때 믿음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찾아온 풍랑, 고난과 어려움은 바로 믿음을 측정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과연 주님 앞에 우리는 믿음이 있는 자입니까?  없는 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풍랑이 일어날 때 제자들의 믿음 없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풍랑의 때에 필요한 믿음이 무엇일까요?  우선, 받아드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에 늘 순풍만 있지 않습니다.  때론 광풍도 불어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 없이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또한 풍랑의 때에 두려움이 없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몹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두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평온할 때에 두려움이 없는 믿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풍랑을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필요한 것은 버릴 게 없다는 믿음입니다.  

우리 인생에 풍랑도, 고난도, 아픔도, 시련도 사실 버릴 게 없습니다.  시편의 저자가 고난도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풍랑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그것은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셋째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풍랑의 때에 지금 제자들이 가장 귀하게 나타나는 행동은 그렇게 경황이 없으면서도 주님을 깨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깨웠다는 말은 주님을 생각했다는 것이고, 주님을 보았다는 말이고, 주님께 나왔다는 말이고, 주님께 소리를 질렀다는 말이고, 주님의 몸을 흔들었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행동과 의지를 알려주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풍랑에서 참으로 귀한 모습입니다.

어쩌면 주님이 주무시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고단하고 피곤하셔도 배에서 잠자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풍랑이 일어날 때, 물이 배에 들이닥칠 때, 잠자는 일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소리도 듣고, 난리법석을 떠는 것도 아셨고, 두려움에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주무시는 것은 주님을 흔들어 깨울 것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방법을 동원하고,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쓰다가 이젠 안 되는 것을 알고 주님을 찾고, 주님을 깨우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깨우기 전까지, 주님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깨우는 순간부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허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 말씀에서 가장 주목할 말은 ‘깨어’입니다.  주님이 그냥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깨어나신 후에 행동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것을 위해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흔들어 깨운 것입니다.  이것이 풍랑이 있는 인생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 인생에 진정한 기적은 일어납니다.

 주님을 깨운다는 것은 곧 나를 깨우는 것입니다.  나를 깨우면서부터 우리는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을 알고, 주님께 다가가고, 주님께 내 소리를 다하며, 주님의 몸을 흔들어 깨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깨우지 못하면 결코 우리는 주님을 깨울 수 없습니다.  주님을 깨우지 못하면 풍랑의 인생에서 우리는 늘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탄 배는 / 한 조각의 나뭇잎 / 방향도 모르고 있다/ 모든 것이/ 풀잎같이/ 흔들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예수님은 배 안에서/ 잠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잠들어 계시다./ 내 마음에 잠든 예수를/ 생명으로 불러/ 갈릴리 바다/ 오늘의 물결을/ 잠들게 하리라” 이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다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인생은 눈물도 있지만 분명 풍랑도 있는 인생입니다.  수평선 넘어 망망한 바다를 지나갈 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바다는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지만 어느 순간에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이 일어납니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고 큰 광풍이 불어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주님을 깨우기만 하면 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 천국에 이를 때까지 잘 항해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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