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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충만한 생활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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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한 생활 (행 2:42~47)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누구나 성령님이 임하신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도, 신앙생활을 온전히 못하고, 실수와 범죄를 거듭할 수 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나, 얼마 못 가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체험한 후, 감옥에 가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성령 충만을 힘입어, 하루에 3,000명이나 회개시키는 놀라운 일을 했다. 성령 충만하기 전의 베드로는 비겁했고 나약했지만, 성령 충만한 후의 베드로는 강하고 담대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하면,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 충만하면, 어떻게 될까?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고, 주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이것이 영적으로 성공한 모습, 성령 충만한 모습이다. 

  성령 충만하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면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은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생긴다. 사람은 3가지 면에서, 하나님, 사람, 물질과 관계를 맺게 된다. 행복한 사람은 3가지 관계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1.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이루어지면, 모든 관계가 바르게 질서를 잡는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방언을 말할 때, 그들의 일생에 가장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구원받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구약의 말씀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구원을 분명히 증거 했다. 말씀을 가지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밝히 가르치셨다. 영적 안내자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예수님을 알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려면 말씀을 알아야 하기에,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쳤다.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사도들이 말씀은 소홀히 하고, 능력만 행했다면(방언, 귀신) 어떻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감격이 대단했지만, 초대교회는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했지만, 그 지역은 지금 이슬람 화되었다. 그 원인 중에 하나가,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없었고, 말씀이 아니라 전통의 권위와, 형식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이단과 사이비종교가 성행한다. 하나님 말씀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도 말씀이 중심되지 못하고, 은사중심, 행사중심, 자기 생각과 방법, 열심이 중심되어,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성령 충만하게 된다. 

(2) 주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려고 애썼다. 

‘떡을 떼며’라는 말씀은, 성찬식을 했다는 말이다. 성찬예식을 통해, 교회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념하며 감사하게 되는데, 이때 교회는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생명력이 넘치게 된다. 

  성도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게 되면, 이는 성도도 교회도 아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을 때, 마음이 뜨거워져 부흥되고, 감사가 넘쳐나게 된다. 감사로 일을 하기에 행복하다. 허물이 있어도 은혜와 사랑으로 감싸주기에, 기쁨이 넘치게 된다. 

  반면에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없는 교회는, 냉랭하고, 비판하고, 불평하고, 서로 정죄하고, 분쟁 분열하는 인간적인 집단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 그 사랑에 늘 충만해야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고, 행복한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된다. 

  우리는 잃어버리기 전까지, 자신이 소유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른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래서 몸을 관리하지 않고, 함부로 대한다. 그러다가 건강을 잃게 되면, 그때서야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몸을 마음껏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가! 

  ‘장 도미니크 보비’는 잡지 「엘르」의 편집장이었다. 1995년 12월,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왼쪽 눈 하나를 빼 놓고는,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 중에도 낙망하지 않고,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왼쪽 눈뿐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왼쪽 눈을 깜빡거리면서, 알파벳을 연결시켜 책을 쓰기 시작했다. 1년 3개월 동안, 왼쪽 눈을 자그마치 20만 번 이상 깜빡거려 「잠수복과 나비」라는 책을 썼다. 그는 책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고이다 못해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가정을 회복했다면, 얼마나 감사할까? 정말 소중히 여기게 된다. 그러면 영원한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감사할까?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잊고 산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늘 성찬식을 행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기도하기를 힘썼다. 

하나님과 올바른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말씀을 잘 공부해야 하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끊임없이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 할 수 없다. 기도에 힘쓰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기도를 쉬지 않고 간구 할 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 부흥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기도가 있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힘써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옥문을 열고 천사를 시켜 베드로를 구원하셨다. 초대교회는 바쁜 가운데서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국교회가 부흥할 수 있던 원동력은, 새벽기도 수요기도회 금요철야기도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기도에 대해, 잘 못 이해하고 있다. 즉 하다하다 안되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처럼 기도의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으로 생각하기에, 능력과 표적이 나타나지 않기에, 행복하지도 않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성령님의 지배를 받자, 하나님과 기도를 통하여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도 이런 은혜가 넘쳐나기 바란다. 


2.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교회는 관계 체계다. 우리는 관계를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신앙생활은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저는 목사로 많은 사람들을 섬겨 오면서, 많은 문제들이 관계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았다. 

  아무리 부요해도, 관계가 깨지면 불행해진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고기와 생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 인간관계를 잘 맺는 사람은, 행복한 삶,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 

(1)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나누는 자가 되라. 
언제 가장 행복한 경험을 했고, 언제 마음에 진한 감동을 느꼈는가? 행복을 느낄 때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때이다. 우리의 소중한 것을 나눌 때,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행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은, 줌으로써 더 많은 복을 누리고,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받지 않은 것은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풍성히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복의 근원이 되라는 말씀이다. 복이 그에게 와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복이 그를 통과하도록 하라, 즉 복을 받아 유통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누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잘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먼저 성령을 받았다. 

  우리 인간은 약하다. 어둡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한 영이 임해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하나님의 빛이 발할 수 있다.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이 임해야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다. 풍성한 은혜를 받아야, 은혜를 나누어줄 수 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다.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을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모여서 기도했고, 성령을 받았다. 받았다는 말은 나눠주라는 말이다. 

  나눔의 법칙은 농사 법칙과 같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사랑 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하자. 칭찬 받고 싶으면 먼저 칭찬하자. 용서받고 싶으면 먼저 용서하자. 이해 받고 싶으면 먼저 이해하자. 격려 받고 싶으면 먼저 격려하자. 존경받고 싶으면 먼저 존경하자. 

  그래서 (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나눠주는 자가 되어 행복했다. 나누어주지 않고, 움켜잡으려 하면 강제로 나누려고 한다. 억지로 나누면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이 공산주의다. 

(2)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잘 맺으려면, 한 마음으로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체험을 하기 전에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으나, 성령체험을 한 후에는 생활이 변화되었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로 바꿔졌다. 

  그래서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자기의 물건을 가져다가 교회에 놓고,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나눠 쓰며 살았다. 또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 하여 한곳에 모였다. 

  성령 받기 전에는 자기주장만을 앞세우고, 상대방을 무시했으나, 이제는 서로가 뜻을 같이 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가정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46).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다. 친밀한 교제다. 친밀한 사랑이다. 연합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요15:4)고 초청하신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족들끼리, 성도들끼리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사람은 누구나 친밀한 사랑을 갈망한다. 그래서 많은 시도를 해 본다. 

  그런데 현실에는 친밀한 사랑을 시도하다가, 너무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벽을 쌓게 된다. 그러나 친밀한 사랑은, 벽을 허물고 상대방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다. 친밀한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마치 집의 문을 열어 놓듯이, 마음 문을 열고, 내면의 모든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는 아름다운 것만 있지 않다. 부끄러운 것도 많이 있다. 내면을 보여 준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다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뢰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열어 준 결과, 사랑 받기보다는 멸시 당할 때가 있다. 때로는 버림받기까지 한다. 그래서 친밀한 사랑을 포기한 채, 사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친밀한 사랑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 두렵지만, 친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사람은 친밀한 사랑을 갈망한다. 

  친밀한 사랑은 정직할 때 가능하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절대로 친밀한 사랑을 나눌 수 없다. 친밀한 사랑을 하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요15:5). 친밀한 사랑을 통해 기도 응답을 받게 된다(15:7).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 기쁨이 넘치게 된다(요15:9, 11). 

  초대교회 성도들이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47). 교회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칭송을 받았다. 중요한 일은, 영적 생활의 변화다. 우리의 무장을 해제하는 장소는 식탁과 침실이다(헨리 나우웬). 먹을 때 무기를 내려놓고, 벗을 때 사랑이 있기에 친밀해 진다. 

  이런 모습이 있자, 하나님께 인정받고, 주님의 종들에게도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삶이 되었다. 그래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47).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경우, 서로를 고치려고 한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기보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감정을 상하게 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몰아가게 된다. 우리는 서로를 돕기 위해 만났다. 우리는 서로를 고치기 위해서보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만났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3. 물질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게 된다. 

성경은 돈을 모으는 것을, 정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서,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질 정도라면 이는 문제다. 이 물질의 노예가 되면, 행복하지 않다. 

  돈을 섬기면, 돈이 나의 주인이 된다. 돈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돈 때문에 늘 염려하고 걱정한다. 돈이 없으면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못한다. 만약에 누군가 돈이 없어서 선교를 못한다고 하면, 그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재물을 포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44)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성령 충만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아름답게 사용하도록 주셨다. 

  이 세상에는 돈에 대한 태도를, 2가지로 가르치고 있다. 첫째는 청빈 사상이다. 가난하고 없이 사는 것이 영적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부자가 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한다. 부자들을 색안경을 끼고 본다. 이것이 청빈 사상인데,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다. 

  두 번째는 청부 사상이다. 깨끗한 부자가 되자는 사상이다. 돈을 깨끗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서는, 나누어주는 삶을 살자. 이것이 청부 사상인데, 기독교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어 물질을 잘 활용하시기를 원한다. 이런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재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살아야 한다. 물질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졌을 때, 물질을 아름답게 나누면 행복해진다. 야곱은 에서에게 엄청난 선물을 보낸다. 

  (창32:14,15)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오,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입시이요, 그 새끼가 열이라” 이 장면을 아부라고 생각하는데, 아부라고만 생각하지 말라. 

  돈을 바르게 깨끗하게 써야 한다. 비자금을 만들어 뇌물을 먹이면, 뇌물로 손해는 백성들이 된다. 공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건설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래서 다리가 무너진다. 우리는 돈을 깨끗하게 써야 한다. 있는 사람은 너무 많고, 없는 사람은 너무 없는 빈부격차는,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물로 형의 한 맺힌 마음이 풀린다면, 재물을 쓰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관계가 불편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어서, 불편했던 관계가 풀린다면, 그것이 왜 나쁜 일이겠는가? 어쩌면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포기하기 쉬운 것이 돈이다. 만일 사랑하는 자녀를 드리라고 하면, 드릴 수 있겠는가? 

  만약 내 몸의 일부를 드리라면 드리기 쉽겠는가? 눈을 드리기도, 팔을 드리기도 힘들다. 쓸모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발가락 하나만을 포기하라고 해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포기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쉬운 것이 그대도 돈이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 돈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다. 

  돈은 사용할 때, 그 가치가 발생한다. 돈을 써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왜 돈을 쓰지 않는가? 그런데 돈을 쓰지 않는다면, 도대체 돈을 어떤 일에 쓰려고 하는가? 한 사람에게 10만원을 써서,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왜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주는 자가 되면, 화평을 누리게 된다. 

  사람들은 공짜로 얻는 것을 보고 부러워한다. 주변에서 장학금을 받았다고 하면 부러워한다. 그러나 저는 장학금을 주는 사람이 부러웠다. 장학금을 주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은가? 주는 사람을 부러워하면 주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을 부러워하면 받는 사람이 된다. 축복은 사명이다.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는,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는, 받지 않은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남겨두신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도와주라고 남겨두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해야,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다. 

  나누어주지 않으니까, 강제로 나누려고 한다. 이것이 공산주의다. 강제로 나누면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한다. 성령 충만해야 물질의 종이 아니라 정복자가 될 수 있다. 

  결론이다. 오늘 우리가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을 잘 알고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잘 섬김으로 행복해지고, 물질의 나눔을 통하여,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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