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치의 변화 (고후 4:16~18)

  • 잡초 잡초
  • 393
  • 0

첨부 1


가치의 변화 (고후 4:16~18)

  뉴욕에 한 재벌이 오래 동안 수많은 골동품을 모아왔습니다.
어느 날 6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다녀와야 하는데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가 골동품 훔쳐 가면 어떠하나?’
그래서 최신 도난 방지기 시스템을 설치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곧 뉴욕 뒷골목 골동품상에 가서 많은 값산 골동품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골동품에다가 십만 달라, 이십만 달러, 삼십만 달러하며
         기분이 내키는 대로 값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진품에다가는 아주 싼 가격을 붙여놓았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아니 다를까 집안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아끼는 진기한 골동품은 그대로 두고
        생각대로 비싼 가격을 달아 논 가짜 골동품만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 도둑은 잘못된 가격표에 속아 가짜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뉴욕의 그 도둑처럼 
       모조품 가짜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에 나의 삶을 바치고 있는가? 점검하므로
             나의 신앙의 삶에 가치의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까?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사람입니다. 즉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변화되지 않고는 어떤 은혜와 축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변해야 합니까? 의식과 생각이 변해야 합니다. 
                       즉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나에게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1.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해보세요(참조/4:1절)

바울은 복음의 일군의 영광과 더불어 그에 따르는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군으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데
       유달리 많은 고난과 시련이 뒤따랐습니다.

1)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세력의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2) 자비량 선교를 하다 보니 물질적으로도 궁핍했습니다.
3) 자신의 육체에 사단의 가시라고 불리는 지병 때문에 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절에
[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 
즉 핍박과 가난과 질병이 
   복음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도리어 바울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행20:24절 나의 생명초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며
     행21:12절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비록 굶주리고 헐벗은 가운데서도
      빌4: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며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비록 몸에 사단의 가시 같은 질병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여러 번 간구했지만 
      고후12:10절에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가장 강함이러라’ 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일군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렇게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바울이 복음의 일군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16절)

바울은 사역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4장에서 1절, 8절, 16절 
       세 번이나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고백합니다.
16절 [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한마디로 바울은 예수님 만나 가치관이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래 바울은 빌3:4절 이하에 보면
     육체를 신뢰하고 신앙의 전통과 가문을 앞세우고
     자신의 영예를 위해 남을 짓밟아가며 출세가도를 달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행9장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육신의 눈은 깜깜해 지고 대신 영안이 뜨여져
       자신의 인생에 가치관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사람보다 영의 사람 속사람을 더 귀중히 여기게 된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리차드 포스트>는  이 구절을 여러 가지 이유로 좋아한다.
우선 그 강인함이 좋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또 그 현실성이 좋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그 진보성이 좋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 구절이 영적이고 불가시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일에 우리는 인생을 바쳐야 한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새로워짐은 
   사람의 내적이고 영적인 본성이 새로워진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외적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 사람입니다.

바울이 지금 강조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세월이 지나면 다 늙는다는 말씀도 되겠지마는 
16절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교훈은 
“ 나는 지금까지 썩어질 것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시들어 질 것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속사람을 위해 살겠습니다. 
           영혼을 살찌우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사람보다 속사람의 중요성을 아는 자만이
엡3:14절 말씀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여져서
         복음의 일군으로서 주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더 많은 대리석을 소비할수록 그만큼 석상은 완성되어 간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받는 고통과 겪는 아픔이 큽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속사람인 영혼은 더욱더 튼튼하고 위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속사람이 있습니다. 
이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워졌습니다. 거듭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늦가을, 서리가 내리면 국화 꽃잎은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봄이 되면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겉사람이 꽃잎이라면 속사람은 뿌리인 셈입니다. 
따라서 겉사람은 병들고 늙어가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했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믿음과 더불어 더욱 더 튼튼하게 자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육체는 늙고 병들어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낙심(落心)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롭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영혼(靈魂)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하다가 비록 육신이 낡아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날로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본문말씀은 복음의 일군의 영광과 더불어 그에 따르는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고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3. 왜 성도가 현세에서 받는 사역의 고난이 신앙의 귀중한 자산이 될까요?(17절)

왜? 17절에  [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즉 지금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은 신앙의 삶에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18절에도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여기에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바울 개인으로 볼 때, 
     그는 낙담할 요소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수도 없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낙망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이고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환난은 분명히 인생에 있어 가시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픕니다. 슬픔이 옵니다. 고통이 옵니다. 
그렇지만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만듭니다. 
어두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믿음을 연단해 주는 것입니다. 

발칸 반도의 장미는 향기로 유명합니다. 
다른 장미들과 비길 수 없는 최고의 향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크릴멘이라는 사람이 이것에 대해 쓴 것이 있습니다. 
그가 발칸 반도를 여행할 때였습니다. 
왜 그곳의 장미향이 유독 아름다운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장미를 재배하고 채취하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 1시부터 2시 사이에 장미를 채취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가장 캄캄할 때에만 장미를 채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미신적인 관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상당히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장미의 향기가 낮에는 40%가 감소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발칸 반도의 장미의 아름다운 향기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야밤에야 비로소 최고의 향취를 품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주 고통과 씨름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암담한 상황이 그를 아름다운 향기를 뿜는 인격자로 만든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복음의 일군이 되어 
         섬기려고 하다보면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이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주를 위해 당한 고난 
     천국에서 메달이 되고 훈장이 된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 설교 중에 한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한 미국 선교사가 오래동안 아프리카에서 열정을 쏟아 선교를 했습니다.
선교지에서 풍토병으로 아내와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너무 힘에 겨워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미국행 배를 탔습니다.
그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즐기다가 돌아가는 대통령도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군악대의 예포 소리와 함께 팡파르가 울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환호하며 맞이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오자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도 걷히고 군악대의 연주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가 홀로 내려오는데 자신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주님 너무합니다. 사냥갔다 돌아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 받는데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돌아오는 선교사를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걸어 나오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가 아니라 
  천군천사 들러리 쓰고 내가 직접  맞이해 주마! 너는 끝까지 충성하라.”
  하더랍니다.
이 음성을 들은 선교사는 충성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며 
다시 돌아가 죽도록 충성하다가 그곳에 묻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현제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안겨다 줍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신앙의 삶의 시선은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4. 성도의 신앙의 삶의 시선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18절)

18절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왜 우리가 주의 일하다가 낙심합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일 하면 뭔가 내가 하는 일들이 형통해야 할 텐데 되레 불통입니다.
     그러다 보니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육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덫에 걸려 
       현실세계, 물질세계가 전부인 줄로 착각할 우려가 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궁극적 실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문화와 접촉하는 우리는 거의 매일 그런 유혹을 받는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였습니다. 
높은 산에서 주님께 보여 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온 천하의 아름다운 것들과 부귀 영화였습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욕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요1서2:16절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 
지금도 사단은 성도들을 이렇게 유혹합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부귀영화를 박람회처럼 펼쳐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과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서 여러분의 눈을 돌려야합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것에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더 이상 소망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트렌취> 감독은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취어도      
하나님의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삶이란 왜 이렇게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작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추구하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리차드 포스트>의 글에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불가시성(不可視性)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 있게 해준, 
       어떤 영구적 장치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침마다 전능자의 얼굴이 빤히 보인다고 가정해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그렇게 고정해 놓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와 협력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세계를 볼 수 없도록 안배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 현실을 보기 원할 때까지, 
        마음을 다해 보기 원할 때까지, 
        목마른 사슴이 냇물을 찾듯 그것을 갈망할 때까지(시42:1),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 몸과 마음으로 부르짖을 때 
        적절한 시간이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현실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영적 현실을 신뢰하며 인생을 거기에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불가시적 영적 세계를 알고 그렇게 아는 대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짐 엘리엇이 22살에 이런 말을 일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
휘튼 대학 시절 그가 남긴 일기에는 이런 글도 있습니다.
“ 주여 쓸모없는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주소서, 그리고 주를 위해 타게 하소서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게 하소서 ”
영원한 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가치의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태리 로마에 로마 대학교가 있는데 아주 명문이요, 유서 깊은 학교입니다. 
로마대학 식당에 현판이 하나 걸려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에포이 에포이 에트르네타이 에테르네타이’
오래 전에 그 학교 졸업식 때 천주교 신부가 와서 졸업 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졸업식 미사를 다 드린 다음에 
학생들과 앉아서 대화를 하다가 어느 법과 대학생과 얘기를 했답니다. 
`자네는 법과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뭘 하려고 그러나?` 
`예, 이제 변호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그 다음에는 돈도 벌고 어려운 사람들을 변호하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결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을 낳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 학교 다 보내고 결혼을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저도 은퇴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내와 세계 여행을 하면서 여유 있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죽는 것밖에 남은 게 없거든요. 
그렇다고 `죽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고 해서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분명히 듣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야. 영원이야`라고 했습니다. 
이태리 말로 `에포이 에포이 에트르네타이 에테르네타이`라고 말합니다.
이 학생이 그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 그는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자기가 졸업한 학교에 좋은 큰 식당을 하나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식당에서 제일 눈에 잘 띄는 데다가 
`에포이 에포이 에트르네타이 에테르네타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많은 후배들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좀 지혜 있게 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변해야 복음을 위한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섬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 가치의 변화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5. 가치의 변화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참조/18절)

그건 바로 겉사람이고 현실이고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에 변화가 잇어야만
       우리는 복음의 일군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테크에 관한 전문가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이 전문가가 강의 시간에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테이블 밑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꺼집어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먹만 한 돌을 꺼내 항아리 속에 넣기 시작 했습니다.
항아리가 가득하자 그가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찼습니가?” “예”
그러자 “ 정말입니까?” 하고 되 묻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 조그만 자갈을 한 웅큼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집어 넣고는 흔들었습니다.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찼습니까?”
눈이 둥그래진 학생들은 “글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좋습니다” 라고 하고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냈습니다.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 한 돌과 자갈 사이의 빈틈에 가득 채운 후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찼습니까?” 
학생들은 “아니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며 주전자의 물을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 스케줄이 가득차 바뻐더라도 
           정말 노력만 하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실험의 요점은 그게 아니라
 만약 당신이 큰 돌을 먼저 집어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할 것입니다.” 라는 것이라 했습니다.
인생의 우선 순위 정말 큰 돌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인생의 삶에 큰 돌이 무엇인가?
특히 성도로서 나의 신앙의 삶에 큰 돌이 무엇인가? 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겉사람보다 속사람을 먼저 챙기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보다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