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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신앙 ABC]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가? (겔 4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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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앙 ABC]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가? (겔 47:1~12)

        <태평성대에 심판을, 위기의 시대에 희망을>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와 그 수도인 예루살렘이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한 주전 587년을 전후해서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예언활동은 예루살렘 함락 이전과 이후의 두 시기로 명확히 구분이 됩니다. 에스겔서의 전반부인 1-24장은 예루살렘 함락 이전의 시기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데 주로 멸망과 심판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있다고 할 바로 그 때 위기를 경고했던 것이지요. 에스겔은 사회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 신앙의 세속화와 형식화, 그리고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그 다음에 에스겔서의 후반부인 33-48장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의 시기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을 향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바벨론 포로의 신세에서 풀려나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귀환과 회복을 예언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에스겔은 모든 것이 다 잘될 때 위기와 경고와 책망과 심판을 전했습니다. 오늘도 참 선지자는 만사 OK라고 할 바로 그 때, 모든 것이 장밋빛 꿈으로 가득차 있을 바로 그 때 회개와 심판을 촉구할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원수 나라인 바벨론에서 노예로 전락했을 때 위로와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반드시 회복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되돌아갈 것이고 예언했습니다. 오늘도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래의 산 소망을 잃고 도탄에 빠졌을 때 위로와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본 생명수 비전>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역만리 원수 나라에서 포로가 되어 일체의 희망을 잃고 있었을 때 에스겔이 미리 본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비전입니다. 무엇보다도 장차 예루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을 마음껏 경배하게 될 새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비전입니다. 지금 비록 포로가 되어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새 출애굽’이요, 고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새 가나안 정착’입니다. 새로운 출애굽, 즉 ‘출(出)바벨론’하게 되면 새 가나안 땅에 정주하게 될 것인데 그 때 제일 먼저 종교의 자유가 회복됩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의 영광은 다름 아닌 새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나는 에스겔의 환상은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의 회복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이기 때문이지요!   

        에스겔의 환상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시작됩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생명수입니다. 생명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생명수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요 7: 38-3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오늘 저는 예루살렘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이 생명수를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과 성령의 생수로 적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생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마다 구원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말씀과 성령의 생수로 충만히 적셔야 합니까? 무기력한 우리가 능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죽어가는 영혼과 육신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상한 심령과 육신이 치유받기 위해서입니다. 

        1. 성령충만에는 네 단계가 있다 

        성전 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는 네 단계의 수심을 거쳐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3-5절을 보세요.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천사가 물을 측량합니다. 에스겔이 물을 건널 때 천 척, 즉 약 5백 미터 되는 지점마다 네 번에 걸쳐 수심을 측량합니다. 

        첫째, 물이 발목에 찼습니다. 발목 신자로 볼 수 있지요. 성령을 받은 것 같기는 한데 아직 발목 밖에는 차지 않습니다. 발목으로 교회 마당을 밟기는 하지만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없는 초신자입니다. 형식적인 신자의 단계이지요. 이제 발목 신자는 더욱 더 충만한 성령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둘째, 또 다시 천 척, 즉 약 1킬로미터쯤 되는 2천 척을 더 갔더니 천사가 또 측량했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습니다. 무릎 신자입니다. 성령을 받아서 무릎 꿇고 기도할 줄 아는 신자이지요.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감동 없이 되지 않습니다. 무릎 신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만 가지고서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다시 천 척, 즉 약 1.5킬로미터쯤 되는 삼천 척을 더 갔더니 천사가 또 수심을 측정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허리 신자이지요.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넘어서 겸손과 충성으로 헌신하고 봉사할 줄 아는 신자입니다. 좋은 성도는 기도하는 것으로만 머물러서 안 됩니다. 헌신과 봉사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 봉사와 헌신도 성령충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적이고 계산적인 것만 가지고는 많은 시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생수에 허리춤까지 깊이 잠길 때 온전한 봉사와 헌신이 이루어집니다. 허리 신자 역시 대단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 안 됩니다. 더 깊은 차원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넷째, 다시 천 척, 즉 약 2킬로미터쯤 되는 사천 척을 더 갔더니 천사가 마지막으로 수심을 측량했습니다. 여기 사천 척되는 지점은 물이 강이 되어서 더 이상 건널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나게 물이 불어서 헤엄을 쳐야지 만 건널 수 있는 수심이었습니다. 전신(全身) 신자입니다. 온 맘과 온 몸이 성령의 강에 완전히 잠겨서 충만한 상태이지요! 

        갈 3: 20절이 꼭 이 상태를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함께 계셔서 연락(連絡)하고 상합(相合)해서 동거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됩니다. 

        발목에서 무릎, 허리, 그리고 마침내 키를 훌쩍 넘겨 수영을 해야 할 정도로 수심이 깊어진 단계 등 총 4단계는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먼저 성도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으로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교회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날로 늘어난다고 해석할 수 있지요. 다른 한편 4단계 수심 측량을 4복음서와 연계시켜 해석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경우 제 4복음서인 요한복음이 가장 은혜가 깊은 최고의 복음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상징적인 해석도 좋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개인이 체험할 수 있는 성령의 충만도(充滿度)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발목 신자입니까? 무릎 신자입니까? 허리 신자입니까? 아니면 전신 신자입니까?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전신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2. 성령의 생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마다 구원과 치유가 있다 

        7-10절을 보세요. “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생명수는 동쪽으로 흘러갑니다. 여기서 동쪽은 사해 북쪽의 요단 강 유역을 가리킵니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아라바로 내려갑니다. 아라바는 팔레스타인을 남북으로 내리지른 저지대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라바 지역의 특징입니다. 아라바 지대는 가늘고 긴 저지대인데 3분의 2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낮습니다. 사람 살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메마른 황무지입니다. 생명보다 죽음이 더 지배하는 영역이지요. 

        생명수가 동쪽으로, 아라바 쪽으로 흘러갔다는 말은 생명이 아닌 죽음이 지배하는 황무지 쪽으로 흘러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생명수는 마침내 바다, 즉 사해(死海)에 까지 도달했습니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보통 바다는 염도가 약 4-5% 정도가 되는데 사해의 경우 그 6배인 25% 정도가 됩니다. 염분이 지나치게 많아서 물고기들이 살 수 없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둥실둥실 뜹니다. 계란의 3분의 1정도가 저절로 뜹니다. 염기 때문이지요. 

        사해는 또한 요단강을 비롯한 주변의 작은 강들로부터 끊임없이 물이 흘러 들어오지만 유출구(流出口)가 없어서 물을 내보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일정한 수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열대에 가까운 높은 기온 탓으로 그만큼 증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해가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라는 사실입니다. 물을 받기만 하고 내보낼 줄 모르는 탐욕의 바다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가 동쪽으로 흘러흘러 저지대인 아라바, 마침내 죽음의 바다에까지 미쳤는데 죽은 물이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와 탐욕과 죽음을 상징하는 사해바다가 삽니다.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아납니다. 생명수가 흘러 들어가니 소금기 많은 사해의 물이 깨끗이 고침을 받습니다. 물고기 하나 찾아보기 어렵던 죽음의 바다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바글거립니다. 큰 바다요 청정대해인 지중해에 사는 물고기 종류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어류 어족들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동안 아무도 찾지 않고 외면하던 사해에 어부들로 득실거린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그림입니다! 

        오늘 우리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말씀도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 죄악과 탐욕과 죽음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도 치유하고 살리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3. 성령의 생수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명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11절을 보세요.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진펄과 개펄이 문제이지요! 생명수가 사해에 흘러 들어갈 때 다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펄과 개펄은 생명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죽음이 지배하는 소금구덩이로 남습니다. 생명수가 미쳤으나 깨끗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생명을 거부하는 소금에 그냥 절어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진펄과 개펄은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는 영역입니다. 성령의 생수를 거절하는 지역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인천 지역이 죽은 진펄과 개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산 지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4. 성령의 생수는 온갖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로 인해 마침내 새창조가 일어납니다. 12절을 보세요.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미치는 곳마다 풍성한 결실이 있게 됩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가지가지 열매가 끊이지 않습니다. 나무들이 달마다 열매를 맺듯이 풍성하게 됩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없어도 내적으로 풍성케 됩니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늘 빈곤합니다. 

        오늘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는 세상을 풍성케 합니다. 먹을 만한 열매들을 두루 맺게 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언제든지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상을 치료할 약재가 이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줄로 믿습니다. 살인, 전쟁, 두려움, 증오, 분열, 세상의 질병을 어떻게 치료합니까?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능력받기 위해서입니다. 전기가 충전이 되지 않은 건전지는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은 성도 역시 아무 힘도 쓸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위로부터 내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능력을 받으십시오!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살기 위해서입니다. 성전 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가 미치는 곳마다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 죽은 바다 사해까지 소성(蘇醒)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을 듣는 이마다 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치유받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수가 닿는 곳마다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생수는 그 어떤 질병도 고칠 수 있는 약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어떤 심령의 질병도 치유될 것입니다. 어떤 육신의 질고도 나을 줄로 믿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아직 발목 신자에 머무른 분들은 무릎 신자로까지 발전하시길 바랍니다. 아직 무릎 신자인 분들은 허리 신자로까지 나아가십시오. 허리 신자인 분들은 전신이 성령의 생수에 빠질 정도로 충만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능력과 생명과 치유를 누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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