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땅히 할 말 (골 4:2~6)

  • 잡초 잡초
  • 382
  • 0

첨부 1


마땅히 할 말 (골 4:2~6)

  김소월 씨의 '초혼(招魂)'이란 제목의 시,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시작되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 장례식에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세 번 부르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가리켜 '초혼'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김소월 씨의 다른 시들은 꽤 좋아하는 편인데 이 시만큼은 그리 애송하지 않았던 것은 그 내용이 이런 불신자들의 미신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초혼'을 계속 보면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라는 것이 죽은 사람이 생전에 못 다한 말을 뜻하는지 아니면 지금 초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못다 한 말을 뜻하는지 제게는 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랑하던 임이 죽은 후에는, 그 생전에 못 다하고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까지도 그처럼 안타깝게 여겨진다는 사실만큼은 누구에게라도 공감될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 피차 했더라면 좋았을 말 - 그것이 사랑한다는 말이었는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 말이었는지 혹은 그 외에 말하기에는 너무 괴롭고 어려운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하여튼 꼭 했으면 싶었던 말 한 마디를 나누지 못한 채 영영 이별하게 되었을 때에는 바로 그 '못 다한 말 한 마디'가 영영히 뼈에 사무치도록 아쉽게 여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가 살아 있을 때에 꼭 남에게 해야 할 말 한 마디, 정말 죽기 전까지 남겨 두어서는 아니 될 심중의 말 한 마디로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말, 즉 '예수 믿고 천당 구원 받으십시오.'라고 전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정말이지 반드시 '남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내 심중에 먼저 들어온 말'이지, '혼자만 간직하다가 죽을 때에도 그대로 가지고 가서는 절대로 아니 될 말'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의 전도를 두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이며 "마땅히 대답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 전파'야말로 신자가 입이 있다면 불신 세상을 향하여 꼭 해 주어야만 할 말이며, 절대로 자기 죽을 때까지 자기 심중에 남겨서는 아니 될 말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은 바로 이 '마땅히 해야 할 말' 즉 복음이 전해져야만 할 곳에서 꼭 선포되고 증거되기 위하여 신자가 함께 힘쓰고 각자가 지켜야 할 것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마땅히 전파되어야 할 복음'이 선포되기 위해서 신자는 복음 전도자들의 사역을 기도로 지원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2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선 '신자라면 기도를 항상 힘써야 한다.'는 이 기본적인 영적 생활습관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항상 힘쓰라'는 말은 신자가 기도의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이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이란 다른 신앙생활들에 비하여 가장 '개인적이고 자립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남이 강권한다고 해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른 기도생활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채찍질하고 노력하는 이 자세 외에는 다른 왕도(王道)가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그만큼 말씀은 더 많이 깨닫게 되고 섬긴 봉사의 양도 점점 더 늘어날 수 있겠지만, 기도생활만큼은 정말 본인 스스로가 '항상 힘쓰지' 않고는 절로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도드릴 때 저지르기 쉬운 한 가지 약점을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기도란 '하나님께 무언가를 졸라대어 타내는 것'인 줄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처럼 무언가를 구하는 것에만 몰두하다 보면 이미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을 잊어 먹기가 쉽게 됩니다.
  하지만 바른 기도는 미래의 축복만을 간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미 받은 축복부터 기억하고 감사하는 순서를 절대로 빼먹지 말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항상 힘쓰고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않는' 기도생활이 있어야만 성도는 제대로 "깨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해야만 성도의 영혼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있어서' 모든 시험을 이기는 건강한 영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말씀을 통해 영양분은 섭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기도생활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면 그 신자는 자신의 영적 호흡과 맥박, 즉 신자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관이 고장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며, 그러니 시험이라는 병에 항상 만성적으로 걸려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교훈을 상기시켜 준 후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특별한 기도제목을 한 가지 부탁했습니다.
  그것을 3절과 4절에서 "3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4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골로새서 서신을 쓸 때에는 로마에서 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가 고소당한 일이 어떻게 처리될지, 정식 투옥될지 혹 사형 당하게 될지 도무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골로새서를 위시한 몇 편의 옥중서신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 처지의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무슨 특별기도를 부탁했다면 그 기도제목이 과연 어떤 것이 되어야 했겠습니까?
  누가 생각해 보아도 그런 상황에서 다른 성도들에게 부탁할 기도제목이란 것은, 자신의 재판이 공정히 진행되어 자기가 다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한 기도제목에 그런 것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지금 "매임을 당하고" 있는 그 상태가 또 하나의 어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체포당하고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면서도 사도 바울은 "마땅히 할 말로써 그리스도의 비밀을 나타낼 수 있는" 아니 꼭 나타내어야만 할 둘도 없는 찬스를 만난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말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비유하고자 할 때 즐겨 쓴 표현인데, 그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신비로움'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게 되든지 그 비밀을 남에게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 영적 충동은 그처럼 연금된 상태에서도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정말 언제 어떤 일을 당해도 자신의 전공 사명은 오직 복음 전하는 일 이것 하나뿐이라는 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도 철두철미한 영적 프로페셔널이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사명감에 투철한 복음 전도자였지만, 사도 바울도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단 한 가지는 꼭 부탁하고 싶었고 그 한가지만큼은 꼭 도움을 받아야만 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기도의 지원'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간곡히 기도의 지원사격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우리"라고 복수를 사용함으로써 자기뿐 아니라 자신의 동역자된 모든 전도자들에게 꼭 같은 기도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 전파에 전 인생을 아니 생명까지 이미 바쳤고, 감옥 아니라 사형장에 가서도 끝까지 그리스도의 비밀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할 각오가 된 사도 바울이었지만, 그런 바울에게조차 성도의 기도라는 지원만큼은 꼭 필요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들이 열리도록 너희들이 기도만 해 주면 나는 마땅히 할 말을 죽기까지 선포하겠다.'라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 그리고 꼭 들어주기를 간곡히 바랐던 유일한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기도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인 까닭에 또한 간과되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의 사자들을 위하여, 특히 이들의 말씀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여러분들께서는 기도드릴 때마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야말로 여러분들께서 복음 전도자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기 때문입니다.

  경향교회가 여의도에 있을 때에 우리 교회 대학부 SFC가 바로 맞은 편 건물에 있던 여의도 제일교회의 대학부 학생들과 친선 야구시합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당시만 해도 돌밭이나 다름없던 여의도 고수분지에서 만나 일전을 벌였는데, 그날 우리 대학부의 선발투수가 첫 이닝부터 집중안타를 맞고 5점인가를 내어주면서 1회도 채 끝내지 못하고 강판했고 제가 구원투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게임은 일전일퇴의 반전을 거듭하는 상황이었는데, 종반전 어느 이닝에선가 제가 '투 아웃 주자 만루'의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여기서 한 방 맞으면 우리 팀이 따라잡기 힘든 대량실점을 당할 절대위기에 몰린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긴장된 순간, 우리 대학부 SFC 운동원 중에 저와 같은 학번이고 숙명여대 성악과에 다니던 어떤 자매님이 "기현 씨, 힘내세요."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제 어깨에는 순식간에 갑절의 힘이 솟아올랐고 저는 그 타자를 삼진으로 깨끗이 잡아내었으며 결국 그 시합은 우리가 딱 1점 차로 이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응원의 힘이라는 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진짜로 대단한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에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목사가 말씀 연구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여러분의 기도의 응원이 없이는 단 한 주일의 설교도 제대로 준비할 수 없으며, 아무리 선교사가 자기 전 생애를 헌신하려고 각오했다 하더라도 파송한 교회 성도들의 기도 지원이 없이는 단 하루도 감당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이렇게 물어 보고 싶으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제가 기도로 목사님과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지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그게 어떻게 전달이 되겠습니까? 목사님에게 '오늘 설교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확실히 전달이 되고 선교사님에게 헌금을 보내어 드리는 것은 틀림없이 격려가 되겠지만, 제 혼자서 이 분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 그 분들이 듣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 응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 보시고 싶으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정말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반드시 전달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새벽기도회 중이나 골방에서 그렇게 드리는 기도는 공기의 진동을 통해 전해지는 응원 소리나 전화선을 통해 전해지는 인사말보다도 훨씬 더 똑똑하고 분명하게, 단 한 음절도 사라지지 않고 어김없이 전도자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됩니다.
  왜냐하면 그 응원의 소리는 공기나 전파의 파동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정확한 성령님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전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그처럼 성령께서 전해 주시는 지원 기도의 소리를 듣게 되면 '이번 주일에도 갈급한 심령으로 나아올 성도들에게 꼭 달고 시원한 말씀으로 힘을 얻도록 해야지.'라고 더욱 두려워하며 겸손해지는 도리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선교사가 그처럼 바다 건너오는 지원 기도를 전달받게 되면 '나는 그저 이미 부어진 관제처럼 끝까지 충성하다가 죽어야지.'라는 결사각오가 절로 새로워지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전도자들을 충동시키고 사용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마땅히 전해져야만 할 그리스도의 비밀이 주의 사자들의 입을 통하여 더욱 힘있게 선포되도록 이 복음 전도자들을 위하여 한 시도 잊지 아니하고 기도로써 지원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마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할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서 신자는 평소부터 바른 언행을 습관화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점을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이어서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선 5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5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여기 "외인"이란 물론 불신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들을 대할 때 "지혜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즉 신자의 처신을 성경 말씀의 원리를 따라 지혜롭게 잘 살펴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평소의 지혜로운 행위가 바로 각 개인 신자들의 전도의 창구요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의 초대교회들은 불신사회로부터 여러 가지 악성적인 헛소문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실이 바로 그 지역사회로부터의 교회에 대한 평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불신사회 앞에서 기독교가 핍박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전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기독교인들에 대한 나쁜 소문이 날 수 있는 여지를 원천봉쇄했어야만 했습니다.
  즉 "외인을 향하여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당시 초대 기독교회 전체의 존망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왜 불신자 앞에서 신자가 몸조심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불신자들은 이 '복음을 귀로 듣게' 되기 훨씬 전에, 그 복음을 먼저 받아 들였다는 '신자의 행위부터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평소에 방송 설교를 들을 기회나 전도지를 받아 보게 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교회 다니고 있다는 신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매일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불신자들 눈앞에서는 우리 각 개인 신자들의 처신과 행동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쉽게 보고 읽을 수 있도록 번역되어 있는 '복음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입장에 있는 신자가 불신자 앞에서 실수하면, 바로 그 한 가지 잘못된 행위으로 인하여 그 신자는 그 불신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기피하고 구원의 길에서 더욱 멀어지도록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올해부터 우리 교회 차량에는 전후좌우 사방에 교회 이름과 마크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이라도 난폭운전을 하면 당장 우리 경향교회 이름이 욕을 먹게 되니까 교역자들이 운전하기가 더욱 신경 쓰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 조심하면서 안전운행과 양보운전을 하게 된다면 그만큼 이 지역사회에서 전도의 문이 더 넓게 열리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 "세월을 아끼라"고 한 것도, 신자들이 불신자를 상대하게 되는 시간들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지 않고 바로 그때그때 성경 말씀을 따라 지혜롭게 행동함으로써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 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말로 전도하기 이전에, 매일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매일 직장에서 대하는 동료들 앞에서, 매일 식탁을 대하는 불신 가족들 앞에서 '몸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기독신자는 자신이 입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그 전도를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만나는 불신자 앞에서 '날마다 주어지는 기회에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 바로 그 전도의 결정적 예비 단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복음은 몸만 가지고 전한다고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행실로 준비하고 분위기를 잡고 있다가 결정적인 기회가 오면 반드시 말로 전도해야만 합니다.
  그 점에 대하여 본문 6절에서 사도 바울은 "6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빠르든지 늦든지, 신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는 불신자 앞에서 "마땅히 대답해야 할 것"을 대답해야만 하는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 구원의 복음과 천당 소망에 대하여 '변명하며 증거해야 할 시점과 상황'이 생기는 반드시 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때를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막상 불신자 앞에서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말이 더듬거리거나 막히지 않고 마땅히 전해야 할 복음으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며 전도할 수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그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신자가 평소부터 자기의 입에서 은혜로운 말들이 나오도록 습관을 쌓아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지만, 신자의 행실이 세상에서 맛을 내는 소금처럼 되어야 하듯이 신자의 말 역시 신자다운 맛이 나는 은혜로운 말로 다듬어지고 간이 배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의 말들이 그처럼 신자다운 맛이 나는 것들로 고루어지도록 습관을 쌓고자 할 때 가장 좋은 기회가 언제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신자가 교회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교제할 때입니다.
  우선 신자끼리 나누는 대화에서도 무슨 은혜로운 맛이 나지 않는다면 그런 입 가지고 불신자를 대하게 될 때 어떻게 은혜로운 말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신자를 만난 자리에서도 잘 나오지 않던 말이 불신자 앞에서 갑자기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게 될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대답해야 할 말'로 불신자를 전도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한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 낮 교제의 식탁의 자리에서 성도끼리 나누는 대화부터 은혜로운 내용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당회나 제직회나 전도회 월례회를 하면서 나누는 토론의 언어에부터 우리는 신자다운 소금의 간을 쳐야만 합니다.
  적어도 교회의 성도들과 평소의 대화 시간에부터 교회 사랑하는 말, 교회 자랑하는 말, 교역자들을 칭찬하는 말이 아예 입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교회 안에서 신자끼리의 대화부터 항상 진심의 말, 겸손한 간증, 사랑의 위로와 격려 등으로써 '고루어' 나가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 즉 그 어떤 불신자를 그 어떤 상황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신자로서 마땅히 대답해야 할 말이 결코 막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직접 전도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에게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능하면 그 전도가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여 그 영혼구원에 꼭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도 그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전에 평소의 준비작업 역시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말에 앞서서 보여 주는 지혜로운 행실,' 그리고 '신자의 맛이 깊이 배어 있는 은혜로운 말' - 바로 이런 신자다운 언행으로 평소에 늘 준비해 둠으로써 마땅히 전파해야만 할 복음을 전할 기회가 왔을 때 담대히 증거하고 그 전도의 열매를 거두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마땅히 해야만 할 말' -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우리 속에 그냥 남아 있어서는 절대로 아니 될 말입니다.
  2007년도 달력을 누구에게 선물로 준다면 작년에 주었어야지 2008년이 될 때까지 보관해 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 비가 온다던데."라는 말은 집을 나가기 전에 해 주어야지 비가 내리기 시작한 후에는 전달해 주어 보았자 이미 아무 가치 없는 정보가 될 것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복음'이라는 선물도 반드시 예수님 재림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며,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라는 이 말은 이미 구원 받은 백성들만 모인 천당에 가서는 아무 소용 가치가 없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이 땅에 있을 동안 한 번도 남에게 써먹어 보지 못하고 그대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재림하신 예수님 앞에까지 그대로 가져간다면 주님께서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마 한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어 둔 사람과 꼭 같은 꼴이 될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은 구령이라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 되어서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며, 복음은 천당영생이라는 기가 막힐 복을 약속해 주는 것이지만 오직 이 세상에서 있을 때 전달되어야만 금보다도 귀한 보배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황금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보내는 자'로서의 지원 기도를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며, 아직 우리의 태신자들이 살아 있을 때 부지런히 사랑의 편지를 보내고 새소식반에 끌어들이고 놀이터와 학교 앞에서 전도하고 가가호호 방문과 주보 전도를 통해서 그 불쌍한 영혼들을 죽기 전에 십자가 앞으로 불러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경향제단의 교역자들과 경향에서 파송 받은 전 세계의 선교사들의 말씀 전파 사역을 위하여 꾸준히 기도로써 응원하며, 또한 평소부터 매사에 지혜로운 행실과 은혜로운 말로써 준비하여 기회가 주어질 때 입을 열어 전도함으로써, 각자가 '마땅히 해야 할 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를 이 세상에 살 동안에 꼭 하고 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