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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의 이유 (살후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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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살후 1:1~4)

어제는 내일의 스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내가 쓰라린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거울삼아 더 이상 쓰라린 길이 아니라 복된 길이 되도록 이끌어나가야 될 책임이 내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어제의 실패에 매여서 나는 안 돼 나는 안 된다고 하면서 더 깊은 좌절로 빠져들어 가고 맙니다. 아니 그 좌절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를 않아요. 조금 노력하는 듯 하다가 어떤 장애물이 생기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역시 나는 안 돼 하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람의 눈에는 어려운 현실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잠시는 누가 나를 도울 사람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기도 하지만 설사 나를 도울 자가 있어서 그 도움을 얻어 곤경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다시 어려움이 생기면 나를 도울 사람만 찾는 그러다 도울 자가 없다 싶으면 아주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반면에 어려움이 생기면 더욱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제를 교훈삼아 오늘을 가꾸어나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어제를 거울삼아 내일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이미 그려진 그림이라면 내일은 백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어제를 거울삼아 내일을 준비한다고 해도 역시 내일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시 두 번째 편지를 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전달하고 난 다음 들려지는 소식을 들으니 자기가 첫 번째 편지로 가르친 재림에 관한 교훈에 대해서 그들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심판은 시작이 되었지만 자기들은 그 심판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으니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있느냐 얼마 남지 않은 세상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며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자들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니라고 그들을 엄히 꾸짖어 바른 재림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 두 번째 편지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 바울은 항상 그의 편지를 쓸 때처럼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며 자기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인해서 감사하고 있는 이유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보살핌을 통해서 무럭무럭 자라나게 됩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마냥 흐뭇하기만 합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은 어린 예수에 대해서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아니라 모든 어린아이들이 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자랄 필요가 있습니다. 몸은 자라는데 전혀 정신이 자라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시간이 가면서 지혜는 더해지는데 몸이 자라지 못한다면 이것 역시 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우리 몸과 정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거듭난 상태에서 머물러 있으면 그는 영적인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과 지혜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 역시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 하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싹이 나서 자라게 되면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곧 우리의 믿음이 이와 같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어머니를 통해서 젖을 먹습니다. 그리고 점점 자라면서 이유식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단단한 음식까지도 먹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갓 난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배가 고프면 젖을 달라고 보챕니다. 조금 더 자라게 되면 배가 고프다가 맘마 달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조릅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먹어야 삽니다. 아니 조금만 배가 고파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몸이 자라기 위해서는 먹는 것은 필수입니다. 먹지 않고서는 자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큰 믿음을 갖기를 다 원하고 있지만 그러나 믿음이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먹어야 자랍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영적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도 큰 믿음을 갖게 해 주세요 큰 믿음을 주세요 하고 기도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그 믿음을 자라게 하는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 제쳐놓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믿음이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큰 믿음 큰 믿음 하지만 하루아침에 큰 믿음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믿음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되고 또한 그 양식이 내 몸의 자양분이 되도록 흡수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또한 필요합니다. 우리가 수요 예배를 성경 통독 기도회로 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로 14절에 보면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단지 강단에서 전해주는 말씀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그 말씀을 통해서 내 믿음을 자라게 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여전히 가르침만 받으려고 한다면 그건 마치 몸은 다 컸는데 여전히 어머니에게 젖을 달라고 보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이유는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재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좀 오해한 것이 있기는 하여도 그래도 성도로서의 바른 삶을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이렇듯 성도의 믿음이 더욱 자라서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자리에까지 이른 것을 볼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향남 교회 성도들이 모습이 또한 이러합니다. 지난 몇 년간 함께 하면서 성도 여러분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모르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야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거기까지 우리가 자라야 됩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보든지 저 사람은 마치 예수님 같아 하는 말을 들어야 할 줄로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더욱 감사가 넘치는 성숙된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이 빌립보서 1장 9절로 11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기도합니다.

 여기 바울의 기도의 첫째는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풍성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요 이를 통해서 무엇이 선한 것이지를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살아가기를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풍성해야 될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는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하나님 사랑의 첫째가 바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 시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여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금방 보고 헤어져도 또 보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예배 하는 그 시간이 기다려지고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 너무도 즐겁고 기쁘고 아무리 힘든 세상을 살지라도 하나님 앞에만 나오면 그저 감사한 것뿐이요 들려지는 말씀이 더욱 은혜가 넘쳐야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 아니겠습니까? 또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사랑이 담긴 정성스러운 선물을 전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비록 값진 것은 아닐지라도 오히려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다는 그것으로 더욱 감사하며 하나님 지금은 작은 것을 드리지만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하고 소원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 이웃을 또한 사랑하며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서 58장 6절로 7절에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사랑 가운데 최고의 사랑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 다시 말해서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믿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요 이를 위해서 금식까지 하며 그들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그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마귀의 흉악의 결박을 풀어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혼을 건져 구원하기 위해서 금식을 해 보셨습니까? 

단지 어떤 심각한 문제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나 하는 것이 금식인 줄로 아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그때도 금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귀한 금식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 드려져야 하며 거기에 더하여 주린 자에게는 양식을 나누어주고 집이 없어 떠도는 사람을 내 집에 들이고 헐벗을 자를 입혀주고 도움을 청하는 형제 자매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잘된다고 한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이라고 했는데 이 영혼 구원보다 더 큰 사랑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다가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한 두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 각기 서로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8장 1절로 5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 지방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마게도냐 교회들이라고 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도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결코 물질적으로 풍성한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물질적으로 어려운지 극심한 가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다고 하며 그것도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또한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형편이 어렵고 나도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누구를 돌아볼 겨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는 것은 단지 핑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풍성하게 연보를 드릴 수 있다는 것 그것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드릴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랑인 것입니다. 

여기 연보라는 말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구제 및 선교 예물이 되겠습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이 아니라 이웃을 돕기 위해서 자기들도 찢어지게 가난한데도 불구하고 자기들 먹고 살기도 힘든데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힘에 지나도록 드릴 수 있다는 이것이야 말로 진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왜 그렇게 권면합니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는 것 즉 그들을 돕는 그것이 곧 우리가 부요하게 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믿음이요 이러한 사랑입니다. 나도 부족하다가 아니라 그렇기에 더욱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이 사랑에도 더욱 풍성함으로 모두가 주님의 은혜로 더욱 부요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박해와 환난을 견디는 인내로 인해서입니다.

고린도 후서 7장에서도 본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인내라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합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은 단지 한번 겪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그 환난이 계속됐으면 환난의 많은 시련이라고 하겠습니까?

사실 어려움도 한두 번이지 끊임없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것을 이기고 나갈 장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능히 견뎌내고 있습니다. 아니 견뎌내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가 가뭄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그들을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견뎌낼까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어려움을 잊게 됩니다. 아니 내 어려움을 이길 힘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신비입니다. 나도 어려운데 다른 어려운 사람을 돕다보면 내 어려움까지 해결되는 것 그것이 어찌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몸이 아프고 힘들 때 그래서 그냥 누워서 퍼져버리면 어떻습니까? 끙끙 앓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 힘을 내서 일어나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보면 아픈 것도 잊어버립니다. 

어떤 분은 밤에 잠이 안 와서 날밤을 세우십니다. 그럴 때는  처음부터 잘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잠 안와 고생하는 그 시간에 성경을 읽으세요. 기도하세요.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단잠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단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어떻게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궁리하다보면 점점 더 거기에 매이게 됩니다. 하지만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오히려 어렵기에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입니다. 아니 힘들어 죽겠는데 그 무슨 말이냐고 하시겠습니까? 안 죽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죽기로 마음먹으면 죽을힘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얼마나 어렵게 살았습니까? 그런데 먹을 것을 못 먹어가면서도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이 아닙니까? 심지어는 하루 온 종일 공장에서 일하고서도 다시 야간 학교에 나가 졸아가면서까지 공부를 하곤 했던 그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으면 다 되는 겁니다. 나 힘들어서 못 살아 하고 포기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요 상급이 되시고 우리를 지키시는 자신데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겠고 아무리 힘들다고 한들 견디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내하는 것을 곧 소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고 소망 가운데 참고이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결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낙심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라고 어찌 실망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 저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거듭 거듭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갈수록 더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것도 상상할 수도 없게 말입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낙망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누가 낙망하지 아니합니까? 기도하는 자입니다. 

이사야서 62장 6절로 7절은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쉬지 말고 기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쉬지 말고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시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이 날마다 자라가고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여 지며 끊임없이 계속되는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하였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감사했던 것과 같이 우리 모두를 통해서 이런 감사가 넘쳐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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