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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무더기 속에서의 고백 (행 7:5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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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더기 속에서의 고백 (행 7:55~60)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라는 사람이 썼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가복음은 서기 90년경에 기록이 되었거든요.

그리고 사도행전은 누가 복음을 기록하고 나서 그 후에 누가복음의 후속작품으로 기록이 된 것인데,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데에는 특별한 기록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은 바로 사도행전의 맨 앞에 있는 사도행전 1장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은 누가라는 사람이 데오빌로라는 총독에게 쓴 편지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실제 존재하는 인물인지 아니면 가상의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마는 어째든 데오빌로라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뜻에서부터 벌써 심상치 않은 냄새를 풍기게 되는데요.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데오스라는 단어와 필레오라는 단어가 합성이 되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데오스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필레오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이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적어도 로마의 총독 정도의 고위직 관리가 아니었겠나 추측을 해 보면서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을 했는데 누가라는 분이 데오빌로에게 신앙의 올바른 지도를 위해서 사도행전을 쓴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데오빌로는 누구일까요?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지만 예수 믿기로 작정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바로 사도행전의 수신자인 데오빌로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때에 갈릴리 지역을 걸어다니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신 사건까지가 기록이 되어 있죠.
그리고 그 이후의 사건들이 사도행전으로 기록이 되어져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겁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울이라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언제 처음으로 등장을 하느냐?
바로 사도행전 7장, 스데반 집사님께서 순교하시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등장으로 합니다.

58절 말씀을 보면, 성난 무리들이 스데반 집사님을 성 밖으로 끌어다가 내치고서는 돌로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에 발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울이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된 바울입니다.

신명기 19장 15절 말씀을 읽어 보면, 이스라엘 율법엔 무슨 일이든지 재판을 하려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님을 끌어다가 돌로쳐서 죽일 때에도 거짓 증인들을 두세 명 세웠던 겁니다.
그리고 그 거짓 증인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놓은 거예요.
일반적으로는 돌에 맞아 죽을 사람의 옷을 벗기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오히려 증인들이 겉옷을 벗었습니다.
아마 거짓 증인들이 오기를 부린 것 같습니다.
자기들의 주장이 참된 것이라는 뜻이었겠죠?

사울이라는 청년은 당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당대 최고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에 흠이 없는 정통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님을 죽여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을 했던 사람이었고 스데반 집사님이 처형당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증인들의 겉옷을 받아서 맡아 두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에 소극적인 참관인처럼 보입니다마는 그 속을 깊이 들여다 보면 사울이라는 청년이 스데반 집사님을 처형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입을 한 사람이었고, 그 일의 주도자였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겁니다.
또 실제적으로도 사울이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살기가 등등해가지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처형을 하기 위해서 대제장에게 가서 예수쟁이들을 잡아도 좋다는 체포영장을 발부받아서 다메섹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 보면 사울이라는 청년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머리가 헷가닥 돌아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왜 그런 게 있잖아요?
악이 받치면 사람이 홱 돌아버리잖아요?
요즘 아이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좀 저질스럽고 유치한 표현입니다마는 ‘또라이’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냥 사람 죽는 거만 봐도 그런데 생사람을 잡아 죽여요?
그것도 멀쩡한 사람을 끌어다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죽여요?

그런데 죽는 사람이 발악을 하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안한 얼굴로 죽는단 말입니다.

기도하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아주 기뻐하면서 그렇게 죽는단 말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 미칠 지경이죠.
정신이 홱 돌아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더 악을 행하게 되고 사람이 더 악랄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엔 예루살렘 박해를 피해서 다메섹으로 피난을 간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다메섹까지 쫓아갔다가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한순간에 변화를 받아서 핍박자 사울이 복음 전도자 바울로 변하게 된 거 아닙니까?(할렐루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이죠? 

그럼 도대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이 어떻게 사울을 바울로 만들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돌무더기 속에서의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딱 세마디 말씀을 남기고 가셨는데, 스데반 집사님께서 남기신 그 세 마디의 말씀을 살펴보면 아주 위대한 기독교 정신이 들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마디의 말씀 속에는 위대한 고백이 숨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스데반 집사님의 고백은 ‘소망의 고백’이었습니다.

56절 말씀을 보니까,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사도가 설교할 때에는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모두가 회개하고 죄 사함의 세례를 받았거든요.
그날 제자들의 숫자가 몇 명이나 되었다고 했어요? - 삼천명씩이나…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가슴을 치면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는 찔렸는데 오히려 이를 갈면서 귀를 막고서 일심으로 돌을 집어 들고서 달려드는 겁니다.
그러니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같은 설교를 듣고서 어떤 사람들은 회개를 하고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를 갈면서 바락바락 대드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웬만한 사람들 같았으면 실망도 하고 못된 사람들에게 화도 냈을 법도 한데 스데반 집사님은 돌을 들고 달려드는 그 난폭한 군중들 앞에서도 소망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런 소망의 고백이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55절 말씀 그대로 성령이 충만하니까, 그리고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고,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뭐만 바라봤어요?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할렐루야!

소망의 고백은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해 보면 소망이 보이는 줄 믿습니다.

현실은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을 하면 말을 할수록 오히려 오해만 더욱더 쌓여갑니다. 
심지어는 돌을 들어서 나를 내리치려고 합니다.
어디를 봐서 소망의 고백이 나올 수가 있겠어요?
세상에 대해서는 문을 닫고 오직 하늘을 주목해서 볼 때에 소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와서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몰라요.
그런데 별로 소망이 안 보이는 거예요.
조그만 시골 동네에 도시처럼 사람이나 많이 있습니까?
몇 안 되는 시골 사람들 붙들고 예수 믿으라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 봐도 안 들어 먹는 거예요.

몇 년이 지나고 나니까 섭섭한 생각도 들고 괘씸한 생각도 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니로구나.’싶어요.
내가 마음만 앞섰지 성령 충만하지 못했던 거예요.
하늘을 주목하고 바라 봐야 하는데 내 주변에 어디 도움을 받을 데 없나싶어서 도움의 손길만 기다리고 앉아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보니까, ‘여기 이 동네에는 소망이 없나보다.’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소망이 보여요.(할렐루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니까, 하늘이 열리는 것이 보이는 거예요.
꽉 막혔던 전도의 문도 열리는 것이 보이고요, 경상도 사람들의 정서도 이젠 좀 이해를 할 수 있겠고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이는 거예요.

“내가 너를 돕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실망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고린도후서 4장 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우리 속에는 뭐가 있어요? -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잖아요?
질그릇과 같은 우리 속에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스데반 집사님의 고백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59절 말씀에 스데반 집사님이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여러분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이런 기도를 꼭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밤도 주님께서 평안하게 지켜주시고 잠 잘 자고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주님만 믿고 자겠습니다. 주님께서 네 영혼을 받아 주시고 생명싸개로 보호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저녁에 누워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자다가 심장마비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엔 돌연사라는 것이 있어서 자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거북이라는 3인조 혼성 그룹의 남자 멤버 누굽니까?
뉴스에 보니까 그 사람도 자다가 그렇게 된 모양이던데… 
여러분,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못 맡기는 거예요.
요즘엔 은행도 부도가 나는 세상인데 누굴 믿고 어디다가 뭘 맡기겠어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믿음의 기도를 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우리 생명의 주인은 누구예요?
우리의 영혼은 누가 보내 주신 겁니까?
그러니까 우리 영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은 오직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뿐인 줄 믿습니다.  

제가 김포에 있을 때 암벽등반을 좀 했었습니다.
암벽등반을 할 때에는 꼭 두 사람이 2인 1조가 되어서 같이 암벽을 타게 되는데 자일을 걸고 올라가는 동안 한 사람은 밑에서 빌레이를 봐줍니다.

까마득한 절벽을 올라가다가 보면 팔에 펌핑 현상이 옵니다.
팔이 너무 아파서 절벽에 더 이상 매달릴 수가 없는 거예요.
절벽 아래엔 수십 미터 수백 미터 낭떠러지예요.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런데 손을 놓으면 떨어져죽을 것 같은데 팔은 엄청나게 아파서 더 이상 매달려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저 밑에서 빌레이를 봐 주는 사람이 손을 놓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초보자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손을 못 놓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쩌겠어요?
결국에 팔에 쥐가 날 지경이 되니까 그땐 손을 놓는 게 아니라 손을 놓지고 마는 거죠.
그러면 출렁하고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데 이제 죽었구나 싶어요.
그런데 몸에 하기스를 하고 있어서 자일에 몸이 걸리게 되어 있거든요.
절대로 떨어져서 죽는 일이 없습니다.
몇 미터 떨어지고 나면 퀵도르에 자일이 걸려서 공중에 매달려 있게 됩니다.

몇 번 그렇게 하고 나면 나중에는 재미가 들려서 조금 힘이 든다 싶으면 그냥 손을 놓고서 툭 떨어져 버립니다.
무섭기커녕 재미가 있는 걸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주일날 일 안하면 굶어죽을 것 같죠?
주일날 일 하러 안 가면 다니던 일자리에서 당장 쫓겨나고 잘릴 것 같죠?
십일조 하고 나면 돈 한푼 없어서 생활이 막막할 것 같죠?
천만에 말씀입니다.

한번 해 보세요.
절벽에서 암벽타기를 할 때처럼 정말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거든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냥 놔 버리세요.
그러면 얼마나 편안해 지는지 모릅니다.
자꾸 그렇게 해 보면 하나님 앞에 모든 걸 맡긴다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스데반 집사님의 고백은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60절 말씀을 다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는데요, 고린도전서 13장 13잘 말씀은 요절 중에 요절이죠?

다 같이 외워볼까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뭐라고요? -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 기독교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 최곱니다.
사랑의 종교라고 그러잖아요?  

사랑이 없이 냉냉한 교회는 뭔가 잘못된 교회일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거든요.(마5:39)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셨어요.
우리들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서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 선생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저 원수가 배고프다고 하면 먹여주고요, 목마르다고 그러면 물을 주어서 마시게 해주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원수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내가 한 짓이 있는데 말이죠.
마치 숯불을 피워서 머리에 올려놓는 꼴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롬12:17-21)

스데반 집사님은 죽음의 돌무더기 속에서 정말 아름다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소망의 고백이었고, 믿음의 고백이었고,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고백들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비난과 조롱과 핍박의 돌팔매들이 우리들을 공격할 때에 그 돌맹이들을 온 몸으로 맞아가면서 죽음의 돌무더기 속에서 주님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고백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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