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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하건대 (롬 8: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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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건대 (롬 8:18~25)

크리스천 프리랜서 작가인 갠 가이어의 ‘영혼의 창’이라는 책에서 아프리카의 성자인 슈바이처의 헌신의 줄거리를 싣고 있는데 요약하여 설명을 드리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가 가족과 함께 프랑스 콜마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가족들과 함께 마을 광장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조각한 바르톨리의 작품인 브뤼아 장군의 동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브뤼아 장군의 조각상 앞에서 슈바이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위대한 장군의 조각상이 아니라 동상 밑 사방 모서리에 있는 그보다 작은 네 개의 인물상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쇠사슬에 묶인 아프리카 노예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아프리카 노예는 힘이 넘치는 듯 한 모습으로 거의 알몸이 되어 머리를 땅으로 하고 앉아 우울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예상은 슈바이처에게는 충격이었고 그 노예의 모습에 슈바이처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갠 가이어는 그의 책‘유년기와 청년기 회고록’을 책에서 소개하면서 슈바이처가 그 인물상과 거기서 받은 인상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스의 몸매를 갖춘 인물이었지만 얼굴은 생각에 잠긴 슬픈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잊어지지가 않았다. 가족들이 콜마에 갈 때마다 나는 꼭 시간을 내 그 인물상을 찾아가곤 했다. 그 표정은 내게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의 참상을 말해주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콜마에 갈 때면 그곳을 참배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슈바이처는 1886년의 어느 봄날, 혼자서 편안하게 부활절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슈바이처의 나른한 마음속에 다시 날아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예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독백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평탄한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인류를 위한 봉사를 감당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러한 의지적인 생각을 갖게 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콩고에서 그의 전 인생의 삶을 투자하며 그의 인생의 창에서 보았던 아프리카를 섬기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왜 제가 슈바이처의 아프리카 헌신에 대한 동기를 소개했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개시할 때 그 시작은 생각에서 시작됨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성을 감동이 되거나 혹은 마음이 가는 그 어떤 것 때문에 일을 시작하고 도모하고 심지어는 그 일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생각은 이성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과학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인 생각으로 모든 것을 가늠하는 과학의 독점물로 생각을 간주해 버리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 신앙이 더 생각이라는 것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8절을 주목해 보십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절에서 눈에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생각하건대’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로마서 8:18절의 말씀을 읽으면 무조건 감동을 받습니다.
그냥 말씀자체로 행복해 합니다.
그래 오늘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은 앞으로 나에게는 영광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야’ 라고 간주하며 우리는 그 은혜로 족해 합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28번째의 강해를 통해서 정말로 주목해야 은혜는 한 계단 더 올라선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라는 18절의 첫 번째 단어의 원어는 ‘logizomai’입니다.

‘로기조마이’라는 이 헬라어 단어는 요한복음 1: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기록한 ‘말씀’이라고 번역된 ‘logo"’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로고스’라는 단어는 ‘합당한’, ‘이유에 적절한’, ‘이성적으로 맞는’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 18절로 돌아가서 적용합니다.
어떤 의미가 됩니까?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야 우리들이 지금 겪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들에 펼쳐질 고난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것입니다.

그 고백이 18절의 본문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해보건대 우리들이 지금 당하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상급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야하는 고난임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을 바울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1.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뿌린 열매를 보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18절을 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주목해야 할 단어는 ‘나타날’이라는 단어입니다.
19절을 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고대하는’과 ‘나타나는’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 지적한 세 단어 ‘나타날’, ‘고대하는’, ‘나타나는’의 원어성경에 보면 어원이 모두 다 한 어원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말할 때 쓰는 ‘계시’ 라는 단어의 어원이 이 세 단어의 어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무슨 책입니까?
하나님께서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요한에게 장차 나타날 일들에 대하여 알려주신 책이 아닙니까?

그래서 계시록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루어지 일들을 보여주는 것을 계시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교우들에게 선포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은 현재일이지만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영광을 받기 위한 통로이기에 지금의 고난은 고난의 의미를 뛰어넘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조급한 삶을 영위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18-19절의 본문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 교우들에게 허락하시는 말씀의 도전을 이렇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뿌린 열매를 보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은혜입니다.

성경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주 하나님께서 냉정해 보이실 때가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뽑으라면 민수기 20장의 기사입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을 고지하시고, 아론에 대하여서는 죽음을 고지하시고 그의 옷을 벗겨 아들에게 입히라고 하는 명령이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데스 바네아의 다툼과 므리바 물가에서의 순종하지 않음의 결과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민수기 20:24-29절입니다.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 산에 오르니라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삼십 일 동안 애곡하였더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아론과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시각이며 그래야 그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0장에서 하나님은 아론의 옷은 벗겨서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고 했고,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심지어 이 일을 후에 다시 곱씹는 신명기 3:25-27절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나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기도에 대해 단호하게 거절을 하셨습니다.

신 3:2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나안에 들이지 않으셨고, 아론은 옷을 벗겨 죽음을 당하게 하셨을까?
목회를 하는 저에게는 정말로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을 읽다가 이 답답함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의 옷을 벗기시고 가나안의 목전에서 죽음을 당하게 한 것과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의 삶의 여정에서 결말을 보게 될 경우에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으로 둔갑되어 이제까지 쌓아올린 하나님과의 관계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저에게 이 말씀의 비밀을 알게 해 준 사건이 논문 작성을 위해 읽게 된 조선의 왕실과 외척이라는 책에서 태종의 정신장애를 분석하는 어간에 알게 된 은혜였습니다.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의 몸에서 네 아들을 두었습니다.
태종은 이 네 명의 아들 중에서 장남이었던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 예로 외척들이 권력을 갖고 아들에게 대항할까 처남들인 민무구를 비롯한 처남들을 다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개국공신들 역시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갖은 모의를 하여 그들을 축출하거나 죽이는 일을 자행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정신병적인 기질로 아들들을 위해서는 악한 일들까지도 자행하였습니다.
왜 이토록 왕권에 집착하였을까? 
그것은 태종이 당대에 왕권에 대한 집착이 편집증으로 발전하여 자신이 그것을 이루려는 조급한 욕심 때문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분석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떠한 결말을 보고자 했던 욕심이 태종은 역사가 부정적인 측면의 왕으로 평가하게 했던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강원도 주문진을 가기 위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2000년에 일어난 강릉지역의 산불로 인해 초토화 된 산을 보게 됩니다.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때의 처참함은 여지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민둥산이자 처참한 산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8년 전에 보았던 그 때의 산이 8년이 지난 지금 그래도 생명력이 움트고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8년 전에 나무를 심으면서 그 나무가 우리들의 생애에 완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를 심은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심는 나무가 언젠가는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푸르른 모습으로 회복될 것을 믿으며 나무를 심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원도를 방문하여 그 산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이 바로 이래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내 사역은 내 사역으로 끝내야 합니다.
이후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내 방법을 동원하려는 욕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세의 삶의 끝은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느보산이었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몫이었습니다.
거기까지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역사하시는 결론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방법으로 그 무언가의 결말을 얻고자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난 주에 교계 신문에 통일교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내용인 즉은 문선명씨가 30세의 막내아들에게 통일교의 교단 권력을 승계하면서 사실상의 세습을 끝냈다는 보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일탈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래서 이단이지 하는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방법이라고 밖에는 말 할 수 밖에 없는 우리 교계의 최대의 감리교회에서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지난 주일 세습을 완료했습니다.

그곳은 통일교와 같은 이단이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의 감리교단의 최대의 교회입니다.
감리교회의 가장 영향력을 주는 교회에서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저는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교회세습에 대하여 재삼 비판하고자 함으로 이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세습한 교회의 1세대의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목회적인 혈통이 대를 이어 사역하면 가장 알맞기 때문에 세습을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신학적으로 반대적인 이론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심은 나무들의 열매를 자신이 얻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당하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생각하건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조급한 마음으로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이런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탄식하는 존재들입니다.   

22-23절을 보겠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2절과 23절에서 똑같은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탄식’ 이라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의 탄식은 자연을 포함한 피조물 전체의 탄식이고, 두 번째의 탄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식입니다.
본문에 ‘탄식’이라고 번역된 단어 ‘stenazw’라는 단어는 ‘고통을 느끼며 신음하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표현하면 ‘스테나조’는 고통을 느낄 정도로 간절함을 갖고 사모하는 것을 말하는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을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대상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구원의 대상에서 예외가 되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로 알 수 있는가하면 구원의 대상자들이 고통으로 슬픔을 느끼며 탄식할 정도로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충북밀알 선교단이 1년에 한 번 장애우들의 시설 건립을 위하여 실시하는 일일 찻집을 격려하기 위하여 다녀왔습니다.
저 역시 신학교 시절에 장애우들이 기거하는 재활원에서 야학을 하면서 봉사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 선지식이 있는데 특별히 뇌성마비 장애우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사랑이 담긴 스킨십입니다.

그 날 한 형제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이리로 돌리고 저리로 돌리고 저에게 바짝 붙어서 스킨십을 요구하였습니다.
스킨십을 요구하는 형제의 모습은 제가 보기에는 필사적이었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 때문입니다.

왕상 19장을 아십니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850:1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으로 승리했습니다.

가장 영적으로 다이나믹하게 승리를 경험했기에 영적인 분위기가 충천해야 했는데 도리어 이세벨의 살해 위협에 영적으로 급직하 하여 심각한 침체에 빠져 브엘세바 근처의 로뎀나무 그늘에서 주님을 향하여 죽기를 간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상 19:4절입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 구절을 자주 만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정말로 엘리야기 죽기를 바란 말씀입니까?
해석에 따라 그럴 수 도 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에서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께 강력한 스킨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사랑을 달라는 탄식입니다.

적어도 주님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 강력하게 요청하는 탄식을 주님께 드리는 성도들입니다.

나는 주님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향한 탄식을 드리는 사람들이 바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군에서 고문관이라는 소리를 듣는 병사들에게 고참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지!’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이 지내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이 나를 인정하며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탄식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은 문자로 기록된 어록이 아닙니다.

렘 33:2-3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 구절이 나에게 적용되게 하려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3.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24-25절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참된 소망은 오직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말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가끔 전도를 하다보면 이런 질문 겸 공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 달라는 반론입니다.

그러면 제가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무엇 하러 믿습니까?’
정말로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는 분이 보이는 분이라면 그 분은 공간에 제한을 받는 분이십니다.
공간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은 곧 인간에 의해서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존재임을 감사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을 우리는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절대적인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벧후 3:13-14절입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 안에서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해인 수녀는 그래서 자신의 두 번째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나에게서 당신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가난뱅이 여인 
나에게 당신을 옷 입히면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는 궁전의 여인 
하느님 아무래도 
당신은 기적의 神입니다. 

보이지 않는 당신이 순간마다 내 안에 살아오시니
내가 감히 당신을 사랑하다니 
당신은 물입니까
당신은 불입니까
당신은 바람입니까 
사랑하는 자에게만 
사랑으로 탄생하는 사랑의 신이시여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깊은 기도를 바치게 하소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매 순간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분의 승리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전도 사역을 함께 했습니다.
어깨에 띠를 두르고 지나가는 촌로들을 붙잡고 사영리를 전하는 젊은 집사님들의 간절함은 차라리 절규와 같았습니다.

손자, 손녀 뻘이 되는 아랫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여가며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노권사님과 집사님들의 모습은 이미 이 땅을 목적으로 두지 않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날 디모데전서 4장의 말씀은 더욱 종에 가슴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딤후 4:7-8절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의 교회의 교우의 부군이 세상을 떠나서 장례를 집례했습니다.
남편이 믿지를 않은 분이었지만 남아 있는 자매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장례를 허락했습니다.
그 날 장례의 언어는 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성도라고 부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소천)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순전히 유족들을 위로하는 장례로 인도했습니다.
고인에 대하여는 한 마디로 하지 못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내 장례식에는 하나님 앞에서 보고를 드릴 것이 많은 장례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구나”

교우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를 서둘러 얻으려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을 탄식하는 마음으로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소망을 비라보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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