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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인을 바꾸라 (막 1: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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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바꾸라 (막 1:21~28)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 몽상과 희망 사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사실 버려둘 것조차 없는 상황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만, 그래도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나의 선택을 가족들의 기대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익숙했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뜻인 동시에, 미래의 꿈조차 주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땅으로 향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습니다. 사서 하는 고생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단이요 모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 안전과 이익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신앙적 결단은 무모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어려운 결단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은 늘 그렇고 그런 곳이지’ 하며 체념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람들에게 현실은 극복되고 지양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희망이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라면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제가 번역했던 버나드 브랜든 스캇의 <<예수 비유 새로 듣기>>의 부제는 ‘reimagine the world’입니다. 저는 그것을 ‘세상 다시 그리기’라고 옮겨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종소리였습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세상을 다시 그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 평화의 세상을 그렸던 이사야,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던 미가, 가장 높은 이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세상을 꿈꾸었던 예수님, 그들은 몽상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꿈이라도 있어야 세상은 시장이나 전쟁터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꿈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꿈을 꾸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그 꿈을 구체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가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머리의 깨달음이 가슴의 뜨거움으로 변화되고, 가슴의 뜨거움이 손과 발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꿈은 몽상이 아니라 희망이 됩니다. 꿈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지식과 감성과 의지의 변화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늘 알을 깨는 아픔을 수반한 과정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 와 계십니까?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꿈에 지펴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소금 땀을 흘리는 이들은 아주 적습니다. 배움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함께 보낸 제자들의 3년 세월은 주님의 꿈이라는 씨앗이 그들의 가슴에 심기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 더러운 영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가버나움에 들어갔습니다만 이 대목부터 제자들은 이야기 뒤로 숨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는 그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만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2)

여기서 ‘놀랐다’(ekkepresento)라고 번역된 단어 속에는 ‘때리다’는 뜻의 ‘플렛소’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수동태’로 표기되어 있는 데 그렇다면 이 단어는 단순히 놀랐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았다’고 번역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일까요? 아직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가는 그 놀람의 이유를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권위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어떤 부분이 율법학자들과 달랐던 것일까요? 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율법이나 랍비들의 전통적인 해석에 입각하여 가르쳤을 겁니다. 늘 듣던 말씀, 긴장 없이도 들을 수 있는 말씀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셨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은 안일한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던 저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꾸짖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얼른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회당 안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라 하지만 사실은 더러운 ‘pneuma’, 곧 더러운 영이라 해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과 ‘더러운 영’은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하면 그 사람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있겠지만, 더러운 영에 들렸다고 하면 그건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말하는 ‘더러운 영’이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7장 20-23절이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사기 방탕, 질시, 배신,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 더러운 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는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어쩌면 회당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실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날, 거룩한 장소에 나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속에는 온통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주님은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 거룩한 영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이 송두리째 벗겨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더러운 영 안에 있던 사람은 큰 소리로 주님께 외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24)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고도 부릅니다.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사람들은 즉각 ‘나실인/나지르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대립관계에 있던 이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궁벽한 시골 동네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호칭 속에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요1:46) 한 나다나엘의 말을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가리켜 한편으론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느끼는 불편함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입을 다물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말씀하십니다. 그의 속에 들어 앉아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더러운 영의 지배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거룩한 분뿐입니다. 우리 마음을 속으로부터 뒤흔들어놓는 것은 힘센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닙니다. 영이 맑은 사람입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앗시시(Assisi)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Lower Basilica of San Francesco) 벽면에는 13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지오토(Giotto, 1267-1337)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그린 그림인데, 그중에서 제 발걸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은 것은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라는 제목의 그림이었습니다. 성인은 허리를 숙인 채 새들에게 설교를 하고, 새들은 즐겁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날카로운 것이 사라진 사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기력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움브리아의 작은 마을 구비오(Gubbio)에는 사람들과 가축들을 해치는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서워서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프란체스코는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늑대가 있는 숲을 찾아갑니다. 늑대가 사나운 이를 드러내며 성인에게 다가오자, 성인은 늑대를 조용히 꾸짖으며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때부터 늑대는 사람들과 가축들을 해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늑대가 먹을 것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늑대가 죽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그 늑대는 성인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표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영이 맑은 사람만이 폭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맑은 영에서 나오는 권능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과 프란체스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욕심이 없었기에 마음이 맑았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렸기에 그들의 삶은 강한 감화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삶으로는 그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를 믿지만 그를 닮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이런 의식의 분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내적 혁명

‘그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더러운 영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여기서 ‘경련을 일으킨다’는 말도 오해의 소지가 많은 단어입니다. 이런 번역은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선입견에서 나온 것인데, 사실 이 단어는 ‘찢어 놓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더러운 영 안에 있던 사람이 예수라는 거룩한 영과 만나 겪는 내적 갈등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하튼 그 사람은 더러운 영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내적인 혁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더러운 영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영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놀라운 변화의 사건 앞에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혼잣소리처럼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27) 

예수와 참답게 만난 사람은 이처럼 내적인 혁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더러운 영이 준동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뉴타운 이야기를 하고, 재개발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하루에도 여러 번씩 좋은 부동산이 나왔으니 투자할 의향이 없냐는 전화를 받습니다. 여기는 교회라고, 부동산에 관심이 없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돈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당장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더러운 영을 향해 외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지금 우리 삶을 지배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지위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늘 불안과 불평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입니까? 그렇다면 내적인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우리 가정 안에 있는,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사회 안에 있는 더러운 영에게 퇴거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삶의 주인을 바꾸십시오. 그래야 사람다운 삶이 가능해집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롬8:6) 우리 모두 거룩한 영의 이끌림을 받으며 담백하게 인생의 길을 걷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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