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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탐심으로부터의 자유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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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심으로부터의 자유 (눅 12:13~21)

다섯 살 난 아이가 혼자 놀다가 입구가 좁은 화병에 손을 넣고는 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엄마는 기겁을 하고 온갖 노력으로 아이의 손을 빼 보려고 애썼으나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방법으로 비록 값비싼 화병이었지만 그것을 깨뜨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병이 산산조각이 나자 마침내 아이의 손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손이 화병에서 빠져나왔는데도 아이가 손을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그 주먹을 펴보니 그 손안에 100원짜리 동전하나를 꼭 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화병 안에 있던 동전을 가지려고 손을 집어넣었다가 동전을 잡은 채로 손을 빼려고 하니 손이 빠질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이가 움켜쥐고 놓지 않은 100원짜리 동전 때문에 몇 배나 값비싼 화병을 깨트려야 하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웃지 못 할 이 사건 속에 우리 인생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그 무엇 하나를 움켜쥐고는 놓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더 크고 놀라운 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작 욕심내어야 할 것에는 관심이 없고 욕심 내지 말아야 할 것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어느 때보다도 모든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부각되어지는 단어가 있다면<경제>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대통령도 경제를 살리겠다고 말하고 서민들도 경제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경제가 무엇입니까? 인간 생활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물질을 만족시키고 이용하는 과정의 일체 활동을 경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생산, 교환, 분배, 소비 모두가 포함됩니다. 그만큼 이 경제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 필수요건이며 그래서 늘 우리 모두에게 관심의 주제가 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경제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있어야만 살수 있다는<생존>이라는 개념으로 이해가 되고 또한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다 많은 재화를 확보할까라는<투자>와<관리>의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 집니다. 

어쨌거나 모든 경우에 다 그러하듯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말은 자연스럽게 주요 관심사가 되고 주요 관심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각의 중심 속에 자리를 잡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오늘 가진 사람이든 못 가진 사람이든지 그 받아들이는 의미는 다르다 할지라도 경제의 풍요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서 상식 밖의 일들이나 비윤리적인 사건들이 속속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욕심, 탐심이라는 인간본능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탐심이라는 말은 정도에 지나친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내 것 이상의 것을 가지려하고, 지나친 것을 얻으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지켜가되 지나쳐서 욕심이나 탐심으로 변질 되지 않는 정도까지를 지켜가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의미도 이런 문제입니다. 얼마나 인간 본연의 감정을 잘 조절하여 지나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형과 유산 문제로 다투고 있는 동생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형과의 분쟁을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답을 주시기보다는 피를 섞은 형제의 우애까지 흔들리도록 한 상황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주의해서 볼 것은 지금 형제의 문제인 <유산>에 국한시키지 아니하시고"모든 탐심(all kinds of greed)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시는 근본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합니다. 다만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야망들을 들여다보고 올바른 가치관을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한 부자를 등장시키는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비유에서 가장 익숙하고 가장 쉽게 연결할 수 있는 직업인 농부를 부자로 등장시키는 것도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반드시 농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직업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나에게 하는 말씀이 되고 내가 말씀 앞에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본다면 농부가 더 많이 가지려고 애썼던<소출>은 권력가에게는 더 높은<지위>로 학자에게는 더 많은<명성>으로 사업가에게는 더 큰<사업>으로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먼저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지금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 부자의 모습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부자가 잘못하고 있지 않은 점은 전혀 없을까하는 문제입니다. 아니 어쩌면 잘못 했다기보다는 지극히 당연하며 심지어 배워야 하는 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은 바로 훌륭한 관리자의 모습입니다. 생각지 않았던 풍년이 왔습니다. 당연히 소출이 차고 넘치니 이때 더 커다란 곡간을 지어 그 곳에 그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기로 계획하는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농부로서의 당연히 해야 할 관리 방법 아니겠습니까? 누구라도 그 해의 잉여소산으로 혹시 올지 모르는 흉년을 대비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모든 사람들이 아껴 저축하거나 은퇴를 준비하며 노후를 대비하는 모습과 유사한 지혜로운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예외 없이 미래를 대비하며 연금이니 보험이니 하는 장치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를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가지고 보니까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희한합니다. 없을 때는 단순하게 그것만으로도 잘 살아집니다. 그런데 많아지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욕심은 없을 때보다 가졌을 때가 오히려 더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농부가 그랬습니다. 부자가 되고 보니 생각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보이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중에서"내가","내"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 본문입니다. 이것은 곧 부자의<자기중심의 생각>을 분명히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은 19절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는 말에서 몇 가지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이 자신의 영혼의 주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누가 맘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농부가 스스로 "여러 해"라고 정하고 있는 것 자체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역시도 우리의 계획 속에 스스로 "여러 해"라는 한계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 살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이 새삼 생각납니다만"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는 고백이 얼마나 현명한 고백입니까? 

그리고 오늘 농부는 자기의 소유가 안정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빌려주신 것이고 맡겨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영원한 내 것으로 착각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오늘 우리들 역시도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농부의 잘못은 자신 만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철저히 모르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면 우리 마음대로 계획을 세우고 우리의 원하는 대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우리 것인 양 우리만을 위해 사용하여서는 안 되며 참 주인의 뜻을 좇아 써야 마땅한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잘 쓰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장수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남에게 줄 줄 아는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도 적게 느끼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며 스트레스도 적고 질병에도 덜 걸린다는 것입니다. 금연이나 주 4회 이상의 운동보다도 구제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건강에 더 좋다고 합니다. 

미국<미시간대학>의 학자들이 5년간 400명의 노인부부들을 상대로 연구해 본 결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수명이 훨씬 더 길다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그 연구의 책임자인[브라운 교수]는 단언하기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고 말했답니다. 

1999년 미국<캘리포니아 대학>에서 2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와 연구는 두 개 이상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향후 5년간 죽을 확률이 63%나 줄어든다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주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 마음과 생각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자신이라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부자를 보고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 결정적인 근거가 무엇입니까? 시14:1절에"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과 생각의 함수 속에는<하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절대적<변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내 계획을 실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전혀 인식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 또한 어리석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라 할지라도 그 수 앞에 +기호가 붙여지느냐 -기호가 붙여지느냐에 따라 그 수의 가치가 정하여 지듯이 우리의 모든 계산의 결과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탐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이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탐심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오늘 본문이 한 부자 농부의 이야기라고 해서 탐심의 범위가 물질적 소유에 제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재능도 그렇고 우리의 미래를 향한 계획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각자의 재능을 개발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고 있습니까? 오직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야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미래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비전>이라야 합니다. 돈만이 재산은 아닙니다. 

요즈음은 돈보다 지식이 재산입니다. 신용도 재산이고 아이디어도 재산이고 명예도 재산이고 인격도 재산이고 봉사심과 봉사할 수 있는 건강도 재산이고 인심을 얻어놓은 것도 재산이고 존경받는 것도 재산입니다. 돈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 그 일에 앞장서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보증인의 인격과 신망과 명예 때문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돈 하나만 움켜쥐느라고 사람도, 관계도, 지식도 신용도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그 하나님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곧 탐심을 이기는 길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탐심이란 하나님 없이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오늘 탐심으로부터 자유 하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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