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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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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자이신 하나님 (시 23:1~6)
 
인간은 늘 부족함과 두려움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고민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족함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에 대한 문제입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물질적으로도 모자라고 마음과 영적으로도 모자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 삶의 문제입니다. 세계적으로 쌀 파동이 일어나면서 특별히 제 3국가에서 식량이 모자라는 사실을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북녘에서는 굶주려 죽는 이가 많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듣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안에서는 거주할 집이 모자라 부동산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족함 때문에 서로가 싸우면서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마음의 문제, 정신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만족감이 없습니다. 모자라기에 이것, 저것 탐내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두 번째, 두려움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험난한 세상을 사는 것이 겁이 나고 무섭습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두렵고 무서우며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우리는 이처럼 두려움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누구에겐가 신뢰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친구로 만들어 친밀함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는 믿음과 신뢰가 생기지 않습니다.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때로는 아주 어렵고 힘이 듭니다. 상대방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오히려 서로 상처를 받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파하고 미워합니다. 그 다음에는 분노가 속에서 쓰레기처럼 쌓여가는 것을 보고 이런 모습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처럼 반복될 때마다 상처를 받습니다. 

  독일의 염세주의자이자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는 인관관계의 친밀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엄청나게 추운 겨울밤 서로 추위를 이겨 보려고 꼭 껴안고 있는 고슴도치의 모습과 같다고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밖이 추우면 추울수록 우리는 따뜻함을 찾아 상대를 더욱 세게 껴안는다. 그러나 서로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상대방의 가시에 의해서 더 많이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 춥고 쓸쓸한 겨울밤, 우리는 상대에게서 떨어져 나가 혼자 바깥에서 헤매다가 추위 속에서 외롭게 얼어 죽는다.”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습니다. 때로는 작은 가시도 있지만 큰 가시도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 속에서 이 가시 때문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서로 상처를 주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한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 있는 가시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까이 하면 할수록 부부간에도 상처가 생깁니다. 때로는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고 부모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찔러버립니다. 그리고는 가슴에 상처를 입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친구간의 관계일 때도 있고, 목사와 성도간의 관계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런 가시로 받은 상처 때문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신뢰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깊이 빠진 사람은 모든 삶 자체가 두려움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다가와서 “나는 당신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돕고 당신과 함께 있으려고 왔습니다.”라고 말해도 그 말을 듣는 순간도 두렵습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속으로는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의구심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인간관계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상처 받은 인생을 치유해 주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진정한 친밀성, 진정한 사랑의 관계, 가까이 갈수록 축복된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앙과 믿음에 의한 관계입니다. 

시편기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과의 신뢰로 기대에 찬 삶을 살면서 고백하는 시인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려움이 없었을까요? 문제가 없었을까요? 상처가 없었을까요? 그의 삶도 결코 쉽지 않은 전쟁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시편 23:4) 

  실제로 그는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으로 마치 아침 안개가 꽉차있는 골짜기와 같은 곳에서 보낸 적도 있다고 고백합니다. 슬픔도 맛보았고 좌절도 경험했으며 눈물도 흘려보았습니다. 삶이란 결코 축복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밑바닥 인생, 시궁창 같은 낮은 자리에까지 가서 애통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세상이 결코 쉽지 않은 황야 같은 가시덤불과 같고, 생명을 위협하는 독초가 널려져 있습니다. 시인은 악한 생명이 우리의 생명을 넘보며 넘어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려보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만난 분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다른 인간관계와 달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위로를 받습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 상처가 치유되고, 은총과 사랑의 역사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깨닫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 인물이 시편 23편을 쓴 다윗입니다.   죽기 원했던 영혼, 슬픔과 눈물로 탄식하던 영혼이었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합니다. 

  고난의 아픔으로 쓰러진 영혼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생명을 부어주셔서 삶의 목표가 되어주시고 친히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바로 이 시인은 자신이 목자이신 하나님의 양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양하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나의 요새입니다. 나의 방패입니다. 나의 산성입니다.” 

  이것은 아주 멋진 말들로 강력한 힘이 느껴집니다. 안전함과 편안함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무생물체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편 23편에서는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목자는 살아있는 인격체입니다. 사랑하는 분, 대화할 수 있는 분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내가 당하는 고난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상처를 싸매주시고 만지시며 쓰다듬는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23편은 아주 개인적인 기록으로 인격적인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시편 23편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말이 15번 이상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사랑의 친밀성을 고백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목자이십니다. 나의 기쁨이십니다. 나의 감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과분의 관계입니다. 목자 없는 양을 상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양 없는 목자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양과 목자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자 없는 양은 참혹한 자리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 죽어갑니다. 
목자 없는 양은 사나운 맹수의 먹이가 됩니다. 
목자 없는 양은 도적의 약탈의 대상이 됩니다. 

사실 양은 홀로 있으면 너무 순하고 무능한 짐승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양이 없는 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양 없는 목자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양 없는 목자는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 존재입니다. 
양 없는 목자는 사명감을 잃어버립니다. 
양 없는 목자는 친구와 벗을 상실한 존재입니다. 

  결국 양 없는 목자는 병사 없는 장교, 학생 없는 스승, 교인 없는 목사와도 같습니다. 더 이상 목자가 아닙니다. 아무 의미 없이 혼자만 있을 뿐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양이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유약하고 저항력이 없는 미련한 양의 보호자입니다. 

  양은 짐승 중에 가장 미약한 존재이고 좀 느립니다. 적을 향해 저항력도 없습니다. 때로는 생각도 모자라고 미련한 짐승 중의 하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솝우화에서 생각 없이 미련한 양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 옛날, 늑대들이 양들에게 자기의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싸움을 했는데 이제는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하면서 늑대들이 질문을 합니다. “우리들이 그동안 이렇게 싸움을 한 것을 멈춰야 하는데, 이 싸움에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그것은 저 못된 개들 때문이다. 우리가 너희 가까이 와서 사귀고 너희와 친해지려면 이 개들이 쉴 새 없이 우리를 향해서 짖어대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에 너희와 친하게 지낼 수 없다. 그러니 너희들이 개들을 쫒아 버려줄래? 그러면 너희하고 우리는 영원한 우정과 평화가 생길 것이다.”

  어리석은 양들은 늑대의 말에 솔깃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함께 있던 개들을 다 쫒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늑대들은 보호자 없는 양들을 찾아가서 너무 손쉽게 잡아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늑대들은 양고기 파티를 열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늑대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떠나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네 목자라고 아니다. 네 인생은 네 스스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인생에 얼마나 큰 제약을 받고 있느냐? 예수님 때문에 놀고 싶은 것을 못하지 않느냐? 예수님 때문에 술 한 잔 먹고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양심에 갇혀 못하게 하지 않느냐? 예수 믿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고, 예수 믿기 때문에 풍파가 생기는 것이 아니냐?  예수 믿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려움이 생기니까 네 인생에서 예수를 쫒아 버려라. 그리고 나와 친해지면 네 인생은 탄탄대로를 지나가는 자리에 들어설 것이다.” 

목자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밥 한 그릇에 신앙의 절개를 팔아서는 안 됩니다. 술 한 잔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을 사탄에게 넘겨주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시선에 피곤해져서 하나님 시선에 서기 보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우리의 삶이 우왕좌왕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세상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 사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가진 최고의 축복인 예수님과 하나님이 목자 되신 것을 흩어 버리려고 지금도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예수님도 당신 스스로 우리를 이끄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양의 안위와 양이 튼튼하고 건강하게 배불리 먹이는 일입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 목자의 목표입니다. 신령한 음식을 먹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입니다. 

  다윗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자기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10-11)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신앙에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다윗은 목자가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고 또 한손에는 막대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팡이는 위가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양이 잘못된 길을 가면 양의 다리를 걸고 가지 못하게 합니다. 양을 인도하는 목자의 고뇌, 목자의 교훈을 상징하는 것이 지팡이입니다. 막대기는 짐승을 공격하는 도구입니다. 짐승이 몰려올 때 목자는 막대기를 들고 짐승을 쫒아냅니다. 목자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일깨워주신다고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3)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주님께 고백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셔서 선한 목자가 되심을 내게 보여 달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시인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4)
 
  내가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도 있었고 슬픔의 언덕에 올라갈 때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기쁨으로 찬양할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슬픔의 골짜기에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며 나와 함께 하셨다는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슬픔 때문에 어찌할 줄 몰라서 아파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눈물을 흘릴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5)

  우리 인생에 부족함이 있는데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에 두려움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인도하는 목자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위기에 처해있습니까? 고통 속에 있습니까? 어떤 아픔 속에 있습니까? 내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이 슬픔이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나의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모습 앞에 서야 합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칼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둔한 무감각과 믿음의 평안은 전혀 다른 것이다.” 

  감각이 없어서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편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파도가 쳐도 주님과 더불어 살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을 목자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계시록 7:16-17)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가 되어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이미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실 때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서 하나님 더불어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약속된 것에 따라 주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슬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생명의 기쁨,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기쁨으로 다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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