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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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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0)

성도 여러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저희 내외는 성도들과 함께 12일간의 제 3차 성지순례를 은혜 중에 다녀왔습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목요일(10일) 저녁 때 쯤 교회에 도착하였고 도착하자마자 주일 설교를 정하려고 성서일과를 보니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의 목자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듣고 보고한 바 있는 목자에 대한 말씀이 좋겠다 싶어 요한복음의 말씀을 택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깨우침과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어떤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나름대로 의사 일을 열심히 하고 병원을 운영하느라 그만 가정생활을 등한히 했습니다. 남편은 혼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그저 술도 먹고 아편도 해보고 밖으로 나돌다가 결국 에이즈 환자가 됐습니다. 몸이 썩어가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이 사실을 알고 남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한 남자의 아내로서 도리를 하지 못했고, 병원 일만 하느라고 돌아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해서 당신이 이렇게 되었군요. 그러니 이대로 당신이 죽으면 당신 없는 세상에서 내가 건강하게 어떻게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어요. 그러지 말고 나도 에이즈에 걸려 같이 죽읍시다.’ 그들은 그 때부터 다시 신혼부부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부인이 에이즈에 전염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도 건강을 되찾고 소생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것이 의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비판하고, 책망하고, 헐뜯고, 책임을 묻자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겸손하여 상대방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면 죄인과 같이, 약한 자를 사랑하면 약한 자와 같이, 물론 이것이 쉬운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62살 때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코미디안 이주일(1940-2002)씨가 사경을 헤매면서 담배 끊기 운동, 금연 운동에 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기억할 것입니다. 덥수룩한 수염에 굵고 진한 뿔테 안경을 쓰고 병원 침대위에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지금이라도 담배를 끊으라고, 나처럼 되지 말라고’ 그는 온 국민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누구라도 뒤 늦게라도 깨달은 그 마음을 전하고 계몽 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건강이 그러하듯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면서 살아도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미워하면서 살면 되겠습니까. 성실하게 은혜 받고, 봉사하고, 주를 위해 충성하며 살아도 남은 세월이 길지 못한데 세상살이에 한 눈 팔면서 살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 혹시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아픔이 있다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주님만을 믿고 주님만을 따르는 양이 된다면 주님의 사랑 속에서 모든 것들이 해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놀라운 축복의 삶을 외로운 사람들에게, 실패한 사람들에게, 불행한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의 말씀 속에서 목자이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 속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놀라운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을 치는 목자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신랑 신부의 비유, 아버지와 둘째 아들의 비유, 농부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등 여러 가지 다양합니다. 오늘의 비유는 유명한 비유중 하나입니다. 비유는 그 듣는 사람들이 경험해서 잘 아는 내용이어야 이해가 쉽습니다. 가령 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양의 비유를 아무리 설명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흰 눈 같이 희리라’고 하셨습니다만 흰 눈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씀인지 실감이 잘 안 날 것입니다. 여전히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양을 본 적이 없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는 말씀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돼지새끼를 보라’고 번역해 준다고 합니다. 양이라는 단어조차 없는데, 그러나 돼지는 저들의 제물이라서 이해가 되니 ‘돼지새끼’로 번역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목자가 수 백마리 양떼를 인도하는 것이나 이리나 맹수가 달려들 때에 지팡이 같은 막대기로 맹수를 쳐서 해결하는 것을 직접 보고 살지 않아서 목자와 양의 비유도 우리에겐 익숙한 풍습이 아닙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성지 순례를 통하여 지금도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고 있는 베두인들을 직접 보면서 설명을 듣게 될 때 저절로 고개가 끄떡이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본문에 목자와 강도와 절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목자는 예수님 자신이고 강도와 절도는 바리새인, 서기관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6절에 보면 이 비유의 뜻을 저들이 몰랐다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넓은 초원과 목장의 조용한 아침 언덕에서 양떼 곁으로 다가가는 목자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양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밤새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나 밤에 맹수의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낮에는 종일 들판에서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저녁이면 우리에 들어가 안전하게 밤을 지냅니다. 3절이 그런 표현입니다. 아침이면 우리의 문을 여는 목자가 양들을 일일이 주목해 보면서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양은 주인의 음성을 반갑게 알아듣습니다. 

본문에서 선한 목자의 특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합리적인 길로 양을 만납니다. 그러나 절도와 강도는 다릅니다. 또한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목소리만 들어도 푸근하고 마음에 편안함이 느껴지는 사이, 이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날 사랑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고 따르며 전적으로 위탁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을 수 있어야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십만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양떼를 인도하여 광야로 나오자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행하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무리를 인도하고 비추셨습니다. 그러나 이 양떼들은 얼마가지 못해서 시퍼런 바다가 앞길을 막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뒤에는 그들을 붙잡으려는 강한 군대가 병거 육백승을 앞세우고 추격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양 무리는 혼란에 빠져 왜 여기까지 우리를 데려와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지독한 근시안들은 바다의 물결 밖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높이 들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힘없는 양들은 정말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목자의 지시를 믿고 대열을 정비했습니다. 목자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하나님께서 큰 동풍을 일으키셔서 밤새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출 14장) 선한 목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지로 양떼를 인도하시겠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목자의 이름은 모세이었습니다. 

반면에 성경에 보면 이런 목자도 있었습니다. 베들레햄에 살던 한 레위인이 에브라임 산지에 갔다가 얼떨결에 제사장이 된 이야기입니다.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많은 돈을 잃었다가 찾게 되어서 그 돈의 일부로 우상을 만들어 신당에 모셔 놓았습니다. 그런데 신당이 있고 우상을 만들어 놓았으니 제사를 지낼 제사장이 있어야 하기에, 성경에 보면 그는 미가의 집에서 지나가는 이 레위인 사람을 붙들어 이 사람으로 사제가 되게 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 멋대로 하던 시대였다(삿 17:6).’고 하였습니다. 미가의 집에서 많은 돈을 받고 이 레위인 젊은이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단 지파의 군대가 땅을 정복하러 가다가 이 집에 들어와 잘 만들어 놓은 우상과 신당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에게 우리를 따라오면 한 가정의 사제가 아니라 한 지파의 목자가 되게 해주고 더 좋은 보수를 받게 해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목자인 사제는 두 말없이 미가네 우상을 가지고 군대를 따라가 버렸습니다. 집 주인 미가가 뒤를 따라와 왜 내 것을 가져가느냐고 항의 했습니다. 목자는 못들은체 하였고 군인들이 대신 나서서 생명을 잃고 싶으냐고 위협하며 쫓아 보냈습니다.(삿 17-18장) 이익 얻을 것만 바라보고, 돌아보아야 할 자신의 양들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대표적인 삯군 목자의 이야기가 사사기 17,18장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를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한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 들에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목자는 돌을 모아 돌담을 쌓고 다른 짐승들이 뛰어 넘지 못하게 조치합니다. 한 쪽에 양의 문을 만들어 그곳에 불을 피우고 목자가 가로질러 그 문 앞에 눕습니다. 목자를 타고 넘기 전에는 그 어떤 짐승도 양의 문으로 침입할 수 없습니다. 양을 해치려고 다가오는 짐승들을 막대기로 제압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물맷돌로 쫓아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물맷돌 실력도 이렇게 양을 위해 연마되었던 것입니다. 양의 문을 지키던 능력이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구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목자도 있습니다. 그는 목자가 아니라 삯군이라는 것입니다. 길이 험하고 구덩이가 많으면 양을 버리고 자기 길로 가 버립니다. 품팔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이르면 자기부터 챙기고 양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삯군이 양의 문을 제대로 지킬 리가 없습니다. 늑대들이 몰려오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피신해 버리기도 합니다. 양의 문은 무너지고 강도들의 약탈이 양들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신 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어리석은 양과 같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근시안들입니다. 스스로는 먹을 만한 풀을 쉴만한 곳도 찾을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해하려는 세력을 물리칠 만한 힘은 더더욱 없는 무기력한 개인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심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는 나의 선한 목자 이십니다. 삯군이 아닌 선한 목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만 믿고 따르는 양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목자는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양들은 목자의 소리를 안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부르심과 그 소리를 알고 따르는 제자들은 양들이 목자의 소리를 알고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람이 아닌 자는 그의 소리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목자의 음성이 들립니까?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까?

셋째로, 8절에 보면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구원에 인도하는 자는 오로지 한 분 예수뿐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의 문, 한 가지 가능성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를 통해서만 인간들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길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의 문입니다. 예수는 양들을 위한 유일한 문입니다. 양들이 문을 드나들며 생명의 양식을 찾아 얻듯,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하신 목자 예수를 통하여 인도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통하여 먹는 것, 쉬는 것이 모두 해결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통하여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알아, 그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가 당신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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