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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을 넘어 사명으로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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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넘어 사명으로 (요 20:19~23)

몇 주 전에 목동 지구촌교회에서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미래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의 모임에 참석했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책 한 권을 주었다. 그 책의 이름이 ‘부흥을 넘어 변화로..’ 였다.

설교자들은 항상 설교 제목을 붙이는 일에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지난 주간에도 본문은 정해 졌는데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그 책의 제목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절망을 넘어 사명으로..”로 정했다.

언젠가 한 증권회사 중견 간부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 받는 사람이었다. 고객들에게도 신뢰가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그를 믿고 증권에 투자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중적으로 투자한 회사들이 경영난에 빠지고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는 순식간에 수십 억원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손해 본 것을 만회하려고 노력했으나 더 손해를 보게 되었고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이다.

많은 고객들이 증권회사의 직원을 믿고 그에게 돈을 맡겼다. 돈을 맡긴 사람들은 주로 친척,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잘 될 때 쏠쏠한 재미를 보았기 때문에 투자액이 점점 증가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잘 돼 왔었기 때문에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통해서 재산이 증식될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순식간에 투자자들을 절망의 수렁 속에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퇴직금을 받아 맡겼던 한 고객은 완전히 망했다고 통곡을 했다. 어떤 사람은 빌려서 투자한 것이라고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되었다고 통곡을 했다.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종종 있기 마련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이와 흡사하다 할 수 있다. 
오늘 본문 19절 상반절에,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그날은 안식 후 첫날, 지금으로 말하면 주일날 저녁 시간이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어느 집에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 그들의 유일한 의지요 소망이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직업을 버렸고, 가족들 마져 버리고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비참하게 십자가에 처형 당한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한 후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들은 지금 극심한 두려움과 절망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을 찾고 있었고 그들은 지금 숨어다니는 입장이 된 것이다. 만약 유대인들에게 발각되면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보장 받을 수 없는 위태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그들 중에서 어떤 여인들은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을 하였고, 베드로 역시 무덤으로 달려가 확인해 보니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그들에게 소망을 준 것이 아니라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서로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못했다.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한 사람들 조차 혹시 유령을 본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요 20:19)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그들에게 먼저 평강을 선포하셨다. 
사실 제자들의 태도는 책망 받아 마땅한 모습들이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능력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직접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행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고난 당하실 것과 제 삼일에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여러 차례 가르침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선생을 배신하고 도망친 모습이나 지금 숨어서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평강’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놀라고 의심하여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상처 자국을 보여 주셨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 오시므로 그들 가운데 나타난 세 가지 효과가 있다.


1) 의심이 사라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새벽녘이었다. 아직 날이 밝기 전에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제자였다. 돌아와서 이 소식을 전했으나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 

(막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마침 그 자리에 도마라는 제자가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기 오셨다 가셨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도마를 믿도록 보여 주셨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2) 두려움이 사라짐

제자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예수님 없는 제자들의 삶은 목자를 잃어버린 양무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 중에 나타나셔서 평강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실 때 두려움이 사라졌다. 잃었던 목자를 다시 찾았던 것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3) 슬픔이 사라짐

(막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이 한 구절이 제자들의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주님을 잃어버린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과 유대인들에게 대한 두려움과 부활하셨다는 증언들에 대한 불신과 의심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슬픔은 즉시 기쁨으로 바뀌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심으로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고, 의심이 변하여 확신할 믿음이 되었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현대인들의 문제점들을 그대로 보게 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현실에 대한 불만과 슬픔,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으려는 불신앙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확실한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기쁨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실 때 슬픔은 끝이 나고 기쁨은 시작되는 것이다.

유명한 영화, ‘벤허’(챨톤 헤스톤), 벤허의 원작자 월러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자였다. 어느날 그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는 얼마후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영화 속의 주인공인 ‘벤허’라는 인물 속에 그대로 투영시켰다. 

벤허는 창과 칼로 민족을 해방시키려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삶에 변화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서 칼과 창을 빼앗아 간 사람은 바로 예수였다. 

오늘날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그분은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을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가 나타난다.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는 것이다. .


기쁨에서 사명으로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근심을 기쁨으로 바꿔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사명을 부여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슬픔에 젖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목적은 단순히 그들에게 기쁨을 회복시키고 평강을 선포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부여하시기 전에 다시 한번 평강을 선포하셨다.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명을 받기 전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제자들의 심령 속에 평안인 것이다. 그런데 이 평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눌 때 이미 약속하신 것이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인 것이다. 일시적 평안이 아닌, 주님의 평안, 그 평안으로 무장되었을 때 그들은 험한 세상에서 담대한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의 복락을 구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평안을 구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주님이 주신 평안이 있다. 그 평안을 누리기 바란다. 이런 복음성가가 있다.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앗아갈 수 없네, 주는 내 마음에 구주 되시었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주님이 날 구하시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주님의 평안을 받은 사람이 사명을 감당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받은 사명은 무엇인가? 21절 하반절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다. 

(요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나가야 한다. 누구에게로 가야 하는가?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로 가야 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가야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엉뚱한데로 갔다. 어디로 갔는가? 갈릴리 호수로 갔다. 왜 갔는가? 고기 잡으로 갔다. 
요 21장에 보면,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이 위험지역인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고향 갈릴리로 돌아왔다. 하루하루 할 일 없이 지내기가 무료해서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간다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함께 따라 나섰다. 

(요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를 포함해서 7명의 제자들이 배에 올라 탔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왜 못잡았을까?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엉뚱한 짓하고 있으니 실패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갈릴리 호숫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5:10)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사명을 받은 성도들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엉뚱한 짓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은 오래가지 못한다. 감동만 가지고는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다. 제자들은 사명을 받았으나 감당할 힘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낚는 대신 고기 잡으러 간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는 ‘전도하라’는 것이다. 가장 부담스러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전도해야 한다는 사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전도를 부담스러워 하고, 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령충만치 못하기 때문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순절 성령충만의 사건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사명을 받았지만 사명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부활에 대한 확신, 곧 부활 신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이 된다. 그리고 내세에 소망을 갖게 되고, 구원자 되신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것이 부활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성도들이 받아야 할 중요한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동은 복음서에서 여기가 유일하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은 상징적인 행동을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는가? 그 이유에 대한 해답을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시기 전까지 아담은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생기가 코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생령’ 곧 생명을 가진 인간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사람을 낚는 어부, 곧 사명자로서의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들어가게 될 때 제자들은 사명을 감당할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 증거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의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도 사명에 대하여는 무능력했던 제자들이 이제는 적극적인 사명자로 변신한 것을 보게 된다. 전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 했으나 성령을 받은 후 그들은 달라졌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핍박하고 협박할 때 이렇게 대답했다.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성령을 받은 제자들 앞에 장애물은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하여 전파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복음은 퍼져 나갔고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세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요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사죄권이 부여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죄함을 받고, 받아 들이지 않는 자들은 정죄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죄를 용서 받게 하는 복음은 오직 주님의 제자들과 교회에게 맡긴 일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소중함이 있고, 교회의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사명을 소홀히 여기고 감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976년, 제가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았다. 의심의 터널을 빠져 나왔고, 교회당에 나와 앉았을 때마다 마음에 기쁨이 있었고, 죄로부터 자유함과 인생에 자신감이 생겼었다. 나의 애창곡 찬송가 495장을 부를 때마다 그 때의 감동을 느낀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어디나 하늘나라. 

여러분이 한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 복음을 전할 때, 그 사람이 영원한 멸망의 포구에서 빠져 나올 수 있고, 절망과 슬픔의 도가니 속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나눠야 한다. 나누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예루살렘 어느 다락방에 문 꼭꼭 닫아 걸고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 속에 번민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안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나의 육신의 복락과 내세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사명을 잃은 신자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절망에서 벗어나 기쁨을 얻었다면 이제는 기쁨을 넘어 사명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될 줄로 믿는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내가 성령 충만할 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주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될 줄로 믿는다. 근심을 넘어, 기쁨을 넘어,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나의 vip를 정하고 절망에 빠진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여 내가 누리는 기쁨과 평안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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