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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소망하는 교회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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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망하는 교회 (행 13:1~3)
 
고든 맥도날드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쓴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에 보면 같은 인생이지만, 전혀 다른 두 삶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유형의 인생은 '쫓기며 사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부름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똑 같이 바빠요. 구분이 잘 안될 정도로 얼마나 분주하게 보내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정이라든지, 또 직장과 사업, 그리고 심지어 교회 생활에서까지 얼마나 복잡한 가운데 정말 쫓기는 듯 살아갑니까?

그러나 똑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도, 한 인생은 쫓기는 듯이 그냥 그렇게 끌려 다니며 사는 인생이고, 다른 한쪽은 정말 보람차고 영광스럽게 살아갑니다. 이 둘의 차이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뭐, 간단해요. 바로 부르심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다릅니다. 자신의 삶에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힘들어도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습니다. 심지어 잿더미에 주저 앉아도 재기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만에게 주신 사명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고자하는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을 때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까? 행11:19절에 보면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며, 사랑이 충만하여 유무 상통한 교회였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동반하는 그런 권세와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핍박이 있고 환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납득이 가지를 않는 이야기입니다. 뭐, 분쟁이 많고 타락된 교회라면 핍박이 있어도 당연합니다만 초대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할 일을 안 하는 교회, 말만 하는 교회라면 또 한번 핍박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 핍박이란 사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자! 이제는 다시 잡히면 죽을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됩니다. 집을 두고 목적지도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도망입니다. 도망자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온 민족이 함께 당하는 수난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당하는 수난입니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 했고,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방랑 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본의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리 방황하며 쫓기는 흩어진 자가 된 것입니다.

이 흩어진 자들이 피하여 들어온 지역이 바로 안디옥입니다. 당시에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서 세계에서 세 번째 큰 도시입니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해 있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고, 천연요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경제가치가 있는 도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내에는 항상 군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군사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우상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안디옥은 문명은 발달했지만, 타락하고 방종과 사치가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화려하고 엄청난 세속의 도시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핍박 성도들의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 아닙니까? 자의가 아닌 핍박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은 그들이 이제 가까스로 모이긴 했지만, 자기 앞가림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물꼬를 여는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세상 앞에 타협하지도 굴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세워질 수가 있었습니까?

1. 그것은 고난이라는 값비싼 경험을 통하여 비로서 자신들이 쫓기는 자의 인생이 아니라 부름 받은 자의 인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원치 않는 환란으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이것 역시 나를 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교회의 핵심 구성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 구성원들의 연령을 보십시오. 나이가 많은 바나바에서부터 젊은 사람 사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습니다. 또 자라온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나바는 귀족출신으로 땅을 기증할 정도로 부자였던 사람입니다. 마나엔이라는 사람은 당시 예루살렘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헤롯왕의 젖을 같이 먹고 자란 젖 동생입니다. 대단한 귀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나오는데 이 니게르라는 말에서 Negro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즉 흑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구레네 사람 루기오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도 흑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레네가 북아프리카지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출생한 유대인입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 우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수재 중의 수재였습니다. 이처럼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종의 다양성과 신분의 다양성, 그리고 나이차이도 많은 사람들이었고 이들 모두 너무도 큰 상처를 가진 자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한번 상처를 입게 되면 이 상처는 우리를 아프게 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그 상처에서 고름이 나옵니다.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몸을 썩게 만듭니다. 그런데 육체의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상처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깊어지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채 두면 마음에는 쓴 뿌리가 자라게 됩니다. 잘못하면 절제력을 상실한 채 분노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마음의 평안을 상실하고, 피해의식 속에 살게 됩니다.

지금 이 안디옥 교회 성도들 역시 처음에 자신들에게 당한 이 고난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영문도 모른 채 당하는 아픔을 어떻게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가 될 수 없는 현실을 이렇게 멋지게 하나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은, 고난의 한 복판에서 그들 속에 역사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버린 자신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치료하신 그 은혜 앞에 자신들을 세우시고 불러주신 사명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하는 하나됨을 통하여 고난도, 핍박도 넉넉히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다음 주 장애인 주일을 맞아 보다 우리의 이웃을 잘 섬기기 위해 조그마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작년에 구입한 '오르간'을 연주해서 모은 헌금을 이들 장애우들과 함께 아름다운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오르간을 작년에 구입하면서 느낀 게 하나 있었습니다. 모델마다 가격 차이가 엄청 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가격의 차이가 많이 나는가에 대해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악기이고 나무가 들어가는 악기는 나무의 소재에 따라 값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는 아픔을 견딘 나무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여기 오르간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가운데 명품들도 로키산맥에서 자생하는 나무를 최고의 가치로 친다고 합니다. 해발 3천 미터 정도 올라가면 거기서 부터는 수목한계선 지대가 있는데 여기서는 나무가 자생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간간히 나무가 자라는데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곱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이나 아주 귀한 목재로 만들어지는 악기들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아픔을 견딘 나무가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고난을 견딘 나무를 통해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소리를 담은 악기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도 예외가 아니지 않습니까? 성도 가운데 아름다운 영혼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보면 대체적으로 무릎 꿇은 나무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압니다. 그리고 참된 위로자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 주변을 참 아름답게 만들 줄 압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입니다.

지금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이 겪어온 아픔을 통해서 삶의 우선순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세상 적인 것들을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자신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데 우선 순위를 둡니다. 

여기 2절에 보면 이들의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상반 절에 '주를 섬겨'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 섬긴다는 말은 본래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표준새번역은 이 부분을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 할 때에"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예배하면 예배했지 왜 금식까지 했을까요? 

오늘 여러분 가운데 정말 갈급한 심정을 가지고 온맘 다해 온 정성을 모두어 이 예배를 섬기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 신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가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내 삶 전체를 몽땅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월트 디즈니가 왜 성공한 줄 아십니까? 백설공주를 그린 만화가 중의 한 사람 월트 킴볼은 일곱 난장이가 백설 공주를 위해 스프를 끓여주려다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약 4분 30초짜리 우스운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월트 디즈니는 장면을 완성시키기 위해 무려 240일을 작업했고, 아무리 재미있어도 본 목적과 흐름에 맞지 않을 때는 과감하게 장면을 삭제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월트 디즈니 만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이유입니다. 자기 작품에 인생을 걸었기에 그런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엇에 인생을 걸어야합니까?

교회에는 예배 구경꾼들이 있습니다. 저는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예배 구경합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고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십 년이 되고 이십 년이 되도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수의 공연을 보듯이 보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가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봅니다. 그리고 비평합니다. 성가대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봅니다. 그리고 오늘은 잘했다 못했다 판단합니다. 좋은 일은 아닙니다.

미국의 영적 대각성을 주도한 디 엘 무디 목사님은 공부를 많이 한 분이 아닙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하버드 대학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며 복음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하고 내려오는데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님 한분이 "목사님 오늘 말씀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말씀 중에 문법이 무려 스물여섯 군데나 틀렸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순간 당황했지만, 다시 정색하며 교수님에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저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이 지식으로 생명을 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데 사용합니다. 교수님은 하나님 주신 지혜와 놀라운 실력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이야기 앞에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여러분, 예배는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인 동시에, 생명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예배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한없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무기력하게 쓰러져 가던 사람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아무 소망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예배를 통해서 목숨걸고 흔들 수 있는 깃발을 발견합니다. 예배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이 종국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안다옥 교회를 묵상하며 정말 놀라운 것을 하나 보게 됩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 앞에 절대 순종과 헌신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여기에서 '따로 세우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안디옥 교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의 주축이 되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리더를 선교사로 파송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회를 잘하고 있는 담임 목사와 그리고 함께 동역하여 안디옥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간 두 지도자를 선교사로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제 좀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되어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갑자기 교회의 핵심인물인 바나바와 바울을 달라는 이 음성 앞에 하나님께서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겨우 교회가 안정되어 가는 순간인데, 선교를 하라니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헌신을 요청한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자기들의 교회도 할 일이 많아 일꾼이 많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복음을 위한 순종은 때로는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에 희생의 대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동안 우리 교회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와 여러분 속에 전도와 선교에 대한 부담은 사라지고, 우리끼리 교회 나와서 위로 받는 데에 만족하여 돌아간다면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계획하시는 역사 무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주님 꿈을 꾸십시다. 우리는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은이 실업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 실업자 보다 청년 실업자가 늘어가는 것은 사회 문제이기에 앞서 앞날과 미래에 상처가 됩니다. 희망을 잃은 시대를 복음으로 다시 살린 선조들처럼 주님께서 지펴주신 복음의 뜨거운 사랑을 다시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채봉씨가 쓴 '모래알 한 가운데서'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짝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독수리/윗 독수리로부터 할큄 당한 독수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죽느니보다 못하다는 데 금방 의견이 일치했다. 이때 망두에서 파수를 보던 독수리 중에 영웅이 쏜살같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다. 
"왜 자살하려고 하느냐?" 
"괴로와서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영웅 독수리가 말했다. 
"나는 어떤가? 상처하나 없을 것 같지? 그러나 이 몸을 봐라." 
"이건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윗 독수리한테 당한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상처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웅 독수리가 조용히 말했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여러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여러분은 위대한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게 될 위대한 백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바꿀 위대한 백성 거룩한 백성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표가 어디 있어요? 복음을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래서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위대한 일에 부름 받은 자 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모두 여러분의 처한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의 구원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힘차게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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