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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로라 하시니라 (요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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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라 하시니라 (요 18:1~11)
 
오늘 성경말씀의 대목은 예수께서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신체적 고통이 시작되는 장면을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늘 기도하시던 장소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라고 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만나야 할 시간이 올 때마다 이 장소에 오셔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거기는 예수께서 가끔 모이는 곳이므로 예수를 판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을 계속 기록하여 오다가 18장에서 십자가 사건의 서곡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이 될 때까지 예수님은 아주 차분하게 일을 정리하셨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고난을 제자들에게 조용히 알려주셨고 13~17장까지 제자들이 명심해야 될 긴 설교를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의 저녁을 의미 있게 제자들에게 만들어주셨고 이제는 최후의 기도를 드리시기 위해서 여기 오신 것입니다. 

이 장면에는 두 그룹이 운명적으로 만났습니다. 한 그룹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평소와 같이 기도회를 갖기 위해서 한밤중에 이 산을 찾아왔으며 또 한 그룹은 예수 체포 명령을 받은 로마 대국의 물리적 힘의 상징인 군인들이 하속들을 앞세워서 무기와 횃불을 치켜들고 나타났습니다. 밤이 깊은 시간에 이 겟세마네 기도하는 산기슭에는 무방비 상태의 나약한 시민 십여 명과 전쟁을 위해서 가장 훈련이 잘된 기동 타격대의 숙명적 만남이 무서운 분위기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여기서 운명적으로 만났는가? 지금까지 두 집단은 아주 눈에 띄게 신경전을 벌이며 대립되어 왔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나사렛 예수 중심의 국민적 동요가 당시에 두 정치 세력에 긴장감을 주었습니다. 우리 국민도 과거 식민지에서 많은 경험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이 관계는 항상 긴장 상태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이 없어도 불필요한 감시가 이루어지고 죄가 없는데도 불이익을 당하는 그런 일이 이 두 관계에서 늘 생겨지게 마련입니다. 특별히 이 지배자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 대해서 매우 긴장을 합니다. 

여기 군사 정부 시절에 대학 다닌 사람들은 학생들 모이는 것을 정부가 굉장히 신경을 써서 열 명 이상 모이는 집회는 학장 허가 받으라고 정부가 시켜서 우리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같은 민족끼리도 아무 일도 없는데 그런 초긴장 감시를 하는데 침략에 의한 식민지 백성의 관계는 더욱 심한 경계를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예수의 말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 명이 넘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지금 심상치 않게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정보가 계속 들어오니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그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니까 온 예루살렘 시민이 다 같이 나가서 열광적 환영을 했을 때 정치 집단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봐야 되겠습니까? 초긴장 상태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예수님 일행의 일거일동은 마치 CCTV를 보는 것과 똑같이 감시 체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로마의 정치 세력과 예루살렘의 종교 세력이 손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 군인들은 로마 정부 파송이요, 하속들은 예루살렘 대제사장의 파송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은 이 두 세력이 야합하여 실행합니다. 죽일 수 있는 죄목은 종교 세력이 제공했고 처형하는 방법은 로마의 권한으로 실행되어 졌습니다. 더 슬픈 일이 발생되어졌습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이 공동체는 이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열두 명 중의 하나인 유다가 이 그룹에서 빠져나가서 로마 세력과 종교 세력에게 협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유다가 각본을 써서 만든 연출입니다. 말씀 가운데 유다는 이 장소를 잘 알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예수의 기도 자리도 언제나 똑같은 자리이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시기는 인적이 드문 한 밤중을 선택했고 누구도 방해가 되지 않는 바로 산골짜기에 기도 자리를 선택해서 예수를 체포하는데 협조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하나도 관계하지 않는 잠든 밤을 이용해서 일종의 도깨비 번개 작전같이 해버리려고 이렇게 머리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무서운 작업이 이루어지는 이 순간을 예수님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신가? 

여기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작업을 연출하는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그렇게 초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0절에 보면 유다가 군병들에게 미리 말했습니다. 
“밤이 어두워 너희들은 예수가 어디 있는지 또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달려들어 입을 맞출 테니까 그 사람인줄 알고 잡아라.” 
그래서 그대로 행하려 다가온 유다에게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유다가 이런 계획을 하였을까? 성경에 나온 대로 계산하면 유다는 머리가 빠른 사람입니다. 계산이 얼마나 빠른지 그것 때문에 예수님과 조금은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유다는 그 빠른 머리로 자기 살 길을 찾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 회복이 이루어지는 날 예수는 왕이 되시고 자신들은 왕의 주변에서 권력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으로 다 계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이미 예수님이 죽음을 선언하셨고 지금 그것이 점차적으로 자기들에게 다가오니까 영광은 고사하고 자기가 죽게 될지도 모르는 절대 위기까지 고조된 그런 상태를 직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 쓰러지는 집안에서 빨리 뛰쳐나가는 것이 살 길이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세력이나 예루살렘 종교 집단에게 조금은 공로를 세울 때 거기에서 나의 살 길이 열린다는 계산을 했습니다. 

그 당시 인신매매 문화가 있습니다. 돈을 지불한 노예는 생명까지 주인의 권한입니다. 그래서 돈에 팔려 가신 것이며 합법성 있게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그 길을, 합법성 있게 유다가 제공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면 우리 역사에도 많이 있잖아요? 이 정치적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은 출세에 빠르고 고난을 피하는 능력도 있어서 아주 매끄럽게 잘 빠져나가는 그런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기울어지는 집안에서 재빠르게 빠져나와서 승산 있는 집안으로 붙어서 어제까지는 동지였으나 별안간 하루아침에 정치 철학이 정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런 우리 지도자의 모습도 많이 보고 있잖아요? 볼장 다 본 집안, 끝장나는 살림, 대장이 잡혀가 죽어야 될 이 파장 난 집에 내가 뭐 하러 붙어 있느냐? 그래서 혼자 살겠다고 그 집을 뛰쳐나가서 간첩 노릇을 해서 공로를 세우는 그 제자를 보고 “이 운명의 밤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비겁한 도망 행동은 내가 아니할 것이니 친구여, 네가 계획한 그 일이 무엇인지 속히 행하라.” 그렇게 나섰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한 삶의, 그리고 죽음의 진리를 배웠지요? 혼자 살고자 하면 혼자 죽습니다. 같이 죽고자 할 때는 같이 삽니다. 에스더 성경의 파사 나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 학살 계획이 그 나라 권력 서열 2인자 하만에 의해서 다 계획되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이 지구상에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얼마 전에 유럽에서 인종 말살 정책을 써서 다 죽이려다 유엔의 제지로 그만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집단 죽음의 역사는 얼마든지 있는 것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유대인 가운데 절대 안전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에스더입니다. 그는 파사 나라의 왕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 모두다 말살을 당해도 자기는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삼촌인 모르드개가 조카인 왕후 에스더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왕후가 되어 안전하다고 국민의 죽음을 외면하면 하나님이 너만 죽이고 우리는 살려주실 것이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혼자 살고자 하지 말고 같이 죽고자 하라.” 
그래서 그 유명한 말 “죽으면 죽으리라.”가 나온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같이 살았고 반대로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이 다 죽는 그런 부림절의 역사가 나타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6·25 세대들은 다 경험이 있습니다. 공산당이 동네에 들어오니까 재빠르게 거기 붙은 사람이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루아침에 왼쪽 팔뚝에다 붉은 완장을 차고 심판주가 되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이 사람, 저 사람을 함부로 끌어다가 다 총살시켜서 죽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경험한 일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혼자 살고자 하다가 열두 사도 가운데 혼자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혼자 살고자 하다가 혼자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고 열한 제자는 한 사람도 당시 로마 정치 세력에 의해서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모두 다 자기 사명을 완수하고 거룩한 피를 흘리고 순교를 당해서 장렬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그것을 피하여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 성경은 역설적으로, 패러독스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요 내가 가야할 길이요 마셔야 할 고난의 자리다.” 내가 겪어야 되는 사명이니까 유다의 살인적 키스를 받아들이면서 “네가 계획한 일을 속히 하라.” 이렇게 처연하게 현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이 현장에 버팀목 역할이 하나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칼을 뺐다는 것입니다. 아마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때 베드로의 용기 하나만은 평가받을 만합니다. 지금 상대가 로마 정부의 유대 권력 기구입니다. 베드로가 빼든 이 단검이 과연 무슨 소산이 있을 것인가? 아마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계란으로 바위 때리기”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비교를 한다면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이 시간 예수님을 가운데 놓고 정 반대의 편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결정적 피해를 주고자 행동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그 피해를 최대한 막으려는 행동이기 때문에 결과는 베드로가 그 이후에 초대교회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명자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는 나라가 쇠퇴하여 기울어질 때 끝까지 버티어 버팀목 역할을 했던 충신들의 역사를 매우 존경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고려가 멸망할 때 그 쓰러지는 집안에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도 고려를 행한 일편단심이야 변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티던 정몽주 선생의 시를 좋아하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고 여기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어떤 때는 기업도 어려워지잖아요? 그런데 넘어지는 기업의 버팀목이 되고자 어떤 직원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일으켜보고자 하는 직원을 볼 때는 그 사장은 망해도 행복합니다. 

저는 개척교회 여러 번 했는데 그 어렵던 시절에 교회의 버팀목이 되고자 어떤 희생도 감수하던 교인들을 기억합니다. 그 교인들을 보면 용기 백배 가슴이 벅차고 콧등이 시큰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내놓은 이 마지막 카드를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그겁니다.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한다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내린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그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류 구원 계획이다. 네가 오히려 나를 위해서 할 일이 있다면 나와 함께 이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것이다.” 

다른 성경에 보면 말고의 잘라진 귀를 예수님을 회복시켜주셨다는 그런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야, 어서 칼을 치워라! 하나님의 뜻을 헤치는 마귀 집단을 향해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은 칼을 치우고 이 핍박과 고난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마귀의 세력을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간교한 사탄의 종이 된 유다의 잔인한 위서의 키스를 예수님은 잠잠하게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주시는 잔! 그 이후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주신 이 잔이라고 믿는 신앙의 기초 때문에 무수한 사람이 순교를 당했고 그 피 흘림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졌습니다.

매우 초라하고 남루해 보이는 중년 부인이 노회 사무실을 찾아와서 
“이 교단에서 저 같은 여자에게도 목사 안수를 준다고 해서 찾아왔으니 어떻게 해야 안수를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누굽니까?” 
“네, 제 남편은 선교사입니다. 얼마나 선교 열정이 강했는지 한국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빈민굴을 찾아가자고 해서 저 방글라데시라고 하는 나라의 최고의 빈민촌을 찾아 들어가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과 결혼한 것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해서 결혼했는데 주의 종의 역할도 다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계획한 대로는 하나도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선교사가 된다고 하니 저도 할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위생시설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고 먹는 음식도 너무나 열악하고 환경이 맞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남편은 얼마나 좋아하며 선교 사역을 열심히 하는지 그분이 늘 말렸답니다. 

선교 활동을 평생 할 것을 며칠 하고 죽을 사람처럼 그렇게 열심히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좀 천천히 계획성 있게 해나가자고 했지만 잠도 자지 않고 철야기도를 해가면서 이 땅을 변화시켜 달라며 그렇게 열심히 선교를 하니 그 분 마음에 너무 걱정이 되어서 “당신 그러다가 죽으면 어떡하느냐?” 했는데 정말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도 원망스럽고 남편도 너무나 원망스러워 할 수 없이 그 동네 벌판에다 남편의 무덤을 만들어놓고 남편 무덤을 쥐어뜯으면서 하나님 앞에 막 원망했습니다. 

“당신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충성을 다하다가 순교자처럼 죽었다고 합시다. 우리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생활에 필요한 것은 하나도 마련되지 않은 이 땅에 아이들과 나만 갖다놓고 당신이 그렇게 충성하다 죽었다면 우리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보기 싫고 남편도 보기 싫고 무덤을 때리면서 우는데 
“너도 이 땅에서 죽어 네 남편 곁에 묻히라.” 
“이게 무슨 소리야?” 

그 주변에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 밖에 없는데 아주 선명한 언어로 자기에게 분명하게 들리는 겁니다. 고민이 된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건 도대체 누가 한 소리야?’ 

“고민 고민하다가 하나님이 하신 소리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최종 결정을 남편 곁에 묻히기 내가 선교 사역을 하려면 목사 안수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신학 준비 다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단에서 나에게 목사 안수를 주어서 파송해 주시면 제가 남편 곁에 가서 평생을 사역하다가 남편 곁에 묻히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사명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비록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 하여도 지금 예수님의 행동은 “피하지 말라. 그것을 받아들이라.” 십자가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내가 가야 할 길이야.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지도야. 그것을 어떻게 피하겠니? 네가 빼든 그 단검이 로마 제국을 당해낼 수 있겠냐? 꽂으라. 그리고 이 길을 초연하게 가자.” 이렇게 된 겁니다. 

이 험악해진 현장에서 예수님은 차분하게 현장 정리를 합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다.” 
“내로라.” 하십니다. 

자신 만의 책임으로 나섰습니다. 지금 내가 속하고 있는 이 공동체는 결정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했는데 그 책임을 묻는다면 “내로라. 나를 찾고자 한다면 내가 여기 있으니 행하고자 하는 일을 나에게 행하라.” 그 다음 말씀이 “나를 찾았다면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아무 죄도 책임도 없이 나를 따라다니던 이 제자들은 이 밤에 궁금하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길을 열어라. 너희가 찾는 것은 나사렛 예수 나 아니냐?”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와를 보고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감탄의 애정 표현을 했습니다.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여기 남자들 가운데 부인과 연애하실 때 그런 감탄사를 써보셨습니까? “너는 내 몸 속에 집어넣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겠다. 네 살이 내 살이요 네 뼈가 내 뼈로다.” 얼마나 예뻤으면 그런 감탄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선악과 사건이 터져버리니까 아담이 하나님 앞에 책임 추궁을 당합니다. 누가 이렇게 했느냐? 그때 아담의 말 분위기가 어떻게 해석이 됩니까? 하와를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 “저것 때문에 그랬단 말이에요. 죽이려면 저걸 죽이세요. 나는 죄가 없습니다.” 혼자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잖아요?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죽어야 되는 책임은 나에게 돌리고 다른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난다면 그 나라는 행복하고 그 공동체는 너무 행복한 공동체가 되지요? 우리 사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 공방 문화입니다. 떠넘기기 정책입니다. 지도자들도 너무 그래서 뉴스가 보기 싫습니다. 

우리 동남아 사람들은 영원히 일본을 미워합니다. 왜? 침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전쟁을 일으킨 천황과 도저 히데끼 사령관입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도저 히데끼를 영웅으로 추앙합니다. 존경합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이 끝나고 재판을 할 때 “이 전쟁은 누가 명령한 것인가?” 그 원인을 질문했잖아요? 천황이 했습니다. 천황이 사형당해야 됩니다. 

그런데 도저는 어떻게 했습니까? “절대 천황이 아니다. 내가 했다.” 그래서 천황은 살아났고 자신은 사형 당했습니다. 일본 국민은 100퍼센트 천황이 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죽은 그 도저를 “비록 전쟁 일으킨 것은 잘못되고 전쟁은 패했으나 그는 훌륭했다.” 이렇게 추앙하는 것입니다. 그 의로운 일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죄를 다신이 뒤집어쓰고 고난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모형이다.” 어떻게 보면 의로운 사람은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말 한마디 잘 하면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왜 그렇게 답답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까? 빌라도가 답답해했던 예수!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 살려줄 테니 빨리 너의 잘못이 없음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해라.” 재판관이 살려주고자 하는 피고인! 예수는 말 안했습니다. 아무 대답도 안했습니다. “빌라도가 이상히 여기니라.” “아니, 너는 바보같이 내가 살려주겠다고 하는데….” 영적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바보입니다. “어휴!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냐? 주말여행을 갈 것이지 거기 가서 예배를 드리고 또 거기 가서 시간마다 봉사를 하고 또 돈도 많이 갖다 내고, 왜 평생을 저렇게 살까?” 영적 세계를 모르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바보같이 보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농구 게임이 처음 들어올 때 선교사가 자기 집 마당에 농구대 하나를 세워놓고 혼자서 농구대에 공 던지는 것을 계속하니까 우리나라 시골 영감이 이렇게 쳐다보면서 “아니, 저렇게 바보 같은 사람 있나? 밑을 꿰매면 공이 안 빠지는데….”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내로라. 내가 한 거야.” 고통이 주어질 때는 “나는 몰라.” 우리는 다 그럽니다. 예수님은 정 반대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로라.” 나섰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구원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이 사람들은 죄가 없다.” 우리가 이 사회, 이 국가 모든 인류가 가장 훌륭한 창조적 공동체가 되는 길은 바로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고난을 감수하는 길에는 나서고, 영광을 취할 길은 자기를 감추는 것이 십자가 정신 아닙니까? 사순절 기간에 그 예수님을 생각하며 성도 여러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이 사순절 기간에 주님의 모습을 조명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고난의 순간에 자신을 내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진심으로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 우리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이렇게 사순절 기간을 기도하면서 보내고 있사오니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런 훌륭한 삶의 순례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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