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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간구 (살전 5: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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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간구 (살전 5:23~26)

사람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이나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몸이 약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건강하게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남들만큼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는 사람이라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할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분이라면 직장에서 보다 안정적인 위치로 승진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학생들이라면 당연히 공부 잘 할 수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소망을 담아 하나님 앞에 간구를 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라는 바 소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또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바울의 간구와 축복이 무엇인지 함께 살핌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간구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간절하게 당부를 하던 바울 사도는 이제 자기의 당부를 마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소원을 담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 기도를 받으시고 이루실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왜 바울 사도가 마지막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설명하는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로 승리케 하시는 여호와 닛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목자 되신 하나님, 우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등등 많은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긋났던 관계가 바로잡혀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나아오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평안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요 아버지 되신 하나님으로 관계가 회복되었기에 언제 어디서나 평안하게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또한 우리를 언제나 지켜 주시니 언제 어디서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참된 평강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두려워서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이요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언제든지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이미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위해 그 크신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를 언제든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순종하며 충성하는 것이요 이웃을 향해서는 그 받은 사랑으로 이웃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거저 받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이웃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하고 내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용서라고 하는 것이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희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미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고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섭섭함이 남아 있고 불신이 남아 있습니다. 분명히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자꾸만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용서는 했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뜨겁게 축복하며 사랑하지를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용서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축복하며 사랑하기까지 나아가는 이 길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잊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되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 역시 이렇게 용서하였다면 다시는 그것을 생각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나요. 그것은 우리로 자꾸 그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이미 용서 받은 죄도 다시금 생각나게 하면서 정말 네가 용서 받은 것이 맞느냐고 속삭입니다.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 아무개를 용서했다고? 그렇다면 그 사람을 정말로 믿어 줄 수 있어? 그 사람이 너한테 했던 일을 생각해봐 하면서 자꾸 그 생각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지금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니까 우리가 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또한 참된 사랑을 나누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온전한 사랑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흠 없게 보존해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왜요? 이는 결국 우리를 시험하는 사탄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을 우리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만 이길 수 있는 싸움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더 이상 우리는 설 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권능을 받았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권능,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권능은 한번 받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권능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가 지금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우리 역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해 주세요. 마지막 날까지 흠 없게 보존해 주세요.” 하는 이 기도는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흔들림이 없이 살게 해주세요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바울의 기도대로 또한 우리의 기도대로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은 미쁘신 분입니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그리고 흠 없게 지켜주실 것을 기도하고 말씀대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의 마지막 당부와 축복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1절로 12절에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서를 세운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연결 고리가 되는 사도 역할을 하는 사람,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사람, 목사와 교사가 든든히 서 있어야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연결고리가 되는 목회자와 지도자가 되시는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또한 기도하여야 합니다. 

계속해서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당부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로 16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교제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음으로 함께 세워져가는 비결입니다. 여기 누구 하나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다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분들입니다. 보십시오. 계속해서 바울 사도가 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까?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여기 모든 형제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빼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가 어느 특별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연약한 사람이 있다면 붙들어주고 잘못된 사람이 있으면 바로 세워주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사람은 격려함으로 세워나가는 일을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기 때문에 도움만 받아야 된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세워져 가는 사랑의 공동체가 다 되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축복입니다. 

이제 바울은 맨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함으로 자신의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때입니다. 그것도 어느 특별한 때만이 아니라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 안에 있을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심을 믿을 때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단지 우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은혜로 채워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간구해야 하고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항상 있기를 위해서 서로를 축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 우리가 축복한 사람도 그 은혜 가운데 살게 되고 나는 더욱 은혜 가운데 살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능력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힘입어서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도 되고 모든 병도 고치는 믿음의 사람이 되며 우리를 시험하는 악한 마귀도 다 쫓아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이는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모든 마귀의 유혹을 우리가 물리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속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속지 않고 나를 용서하지 못하도록 내 마음을 사로잡아가는 악한 마귀는 내게서 떠나가라고 담대하게 명령할 수 있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럴 때 마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합니다. 

왜 우리가 다툽니까? 우리를 속이는 자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악한 마귀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듣고서도 가만히 있느냐고 악한 마귀는 속삭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를 시험 들게 하고 서로 다투게 하는 악한 마귀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에게서 떠나가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이요 그럴 때 귀신은 두말 못하고 쫓겨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위해서 서로를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이후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며 주님만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통해 든든하게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그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셨습니다. 

그때 유다는 혼자 올라가지 않고 열 두 지파 가운데서도 제일로 약한 시므온 지파에게 같이 올라가자고 말합니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물론 유다 지파는 열두 지파 가운데 제일로 강한 지파입니다. 하지만 시므온 지파는 그 반대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강한 지파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유다 지파는 거꾸로 제일 약한 시므온 지파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유다 지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들이 얻은 땅 자기들에게 분배되었던 땅 가운데 일부를 시므온 지파에게 내주어 그들이 살게 만들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설 수 없었던 시므온 지파를 든든하게 설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이런 유다 지파의 사랑과 베풂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약한 자를 붙들어 좋은 하나님의 일꾼으로까지 세워나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날마다 간구하며 서로를 축복하며 사랑으로 도움을 주고받음으로 주님 안에서 함께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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