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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을 행하라 (벧전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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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라 (벧전 3:13~17) 

미국의 대표적 카운슬러인 잭 캔필드(Jack Canfield)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목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빛이 그들을 에워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늘의 메시지를 기다립니다. 잠시 후 음성이 들립니다. 

"너희는 지금 많은 돌을 모으라. 그리고 배낭 속에 넣어라. 그런 다음 짊어지고 하루 동안을 걸어가라. 내일 밤이 되면 그 돌 때문에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할 것이다." 

그 순간 유목민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노골적으로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부와 장수를 가져다주고 세상에 온 목적을 실현시켜줄 위대한 진리를 듣기를 기대했는데, 의미도 없는 힘든 노동만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빛 때문에 투덜거리면서도 마지못해 몇 개의 돌을 배낭에 넣고 짊어졌습니다. 그냥 걸어도 힘든 길을 돌멩이를 지고 가자니 더 힘들고 고달픕니다. 하루 동안을 걸어간 뒤 밤이 되자 천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배낭에 있는 돌들을 꺼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돌들이 다이아몬드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더 많은 돌을 줍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고난입니다. 당시의 수신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핍박과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기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알아야 합니다. 고난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본문에서 가르칩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영원의 관점입니다.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점을 정확히 인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일시적인 고난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영원히 해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난이 영적 생활까지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일시적 고난이 그리스도인이 상속할 영원한 기업을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친다해도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선을 행한다고 모두가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적대감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4절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이것이 고난 가운데서도 선을 행할 근거이며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고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행으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 은 나다나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작품입니다. 어느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마을에는 어니스트(Ernest)라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전설을 전해 듣고는 그 예언이 성취되기 원하면서 큰 바위 얼굴을 보고 자랐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업가로 돈을 많이 모은 부자, 의지가 강한 장군, 뛰어난 언변으로 명성을 얻은 정치가입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그들을 만나 본 뒤 실망합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진실한 생활 속에서 큰바위 얼굴을 보며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인물을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 지혜와 덕을 갖춘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노년이 되었을 때 어느 시인이 그를 찾아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교훈하는 백발의 어니스트를 바라보던 시인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예언의 인물이 어니스트임을 깨닫고 마을에 알립니다. 누구나 본 받고 싶은 큰 바위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얼굴을 바라보면 닮게 되어 결국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이 된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높여드릴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아직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언제 두려움에 빠집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삼지 않고 사람이나 환경을 주로 삼을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면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불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거룩함뿐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마귀가 흔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더라도 거룩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만이 담대하게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 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극히 적은 자만이 그의 쓴잔을 마신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은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그분의 은혜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이 다가 올 때 십자가의 주를 더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본받아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둘째로 산 소망을 가지라 

중국인들은 자녀가 태어나면 오동(梧桐)나무를 심습니다. 자녀가 성장하면 결혼할 때 오동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주려고 심은 것입니다. 집집마다 오동나무가 한 두 그루씩은 있습니다. 그들은 나무와 함께 소망을 심습니다. 자녀가 튼튼하게 자랄 소망을 심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으로 커갈 소망을 심었습니다.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할 소망을 함께 심었습니다. 중국의 농촌 마을길을 차로 달리면 온 천지가 오동나무 꽃 천지입니다. 집집마다 소망이 가득해 보입니다. 작은 묘목이 자라서 큰 목재가 되는 바램처럼 소망은 복되고 아름다운 날이 올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보잘 것 없어도 장차 큰 거목이 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화초를 심지 않습니다. 자라기도 전에 시들어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헛된 소망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소망을 확고히 가지면 어떤 고난이라도 이기게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소망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명예는 산소망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 명예는 땅에서만 족하기 때문입니다. 부귀도 산소망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땅에서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권력 역시 산소망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오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화초와 같이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라지지 않는 산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산소망은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죽음 너머 영원토록 기쁨을 주고 바램이 되는 것이 산소망입니다. 산소망을 가져야 고난을 이기며 선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칭찬을 받으며 상급 받는 날을 바라보는 소망이 선을 행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선한 양심을 가지라 

한 대학교 총장이 학교 건물을 한창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물을 완공하는데 백만달러가 모자랐습니다. 어려운 사정으로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정부 고위관리로부터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의 말은 2장의 서류에 사인을 해주면 백만달러를 희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가 사인을 하게되면 고위관리에게는 3백만 달러가 생기고 총장에게는 건축에 필요한 백만달러가 생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총장이 그 서류를 자세히 검토해보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만든 위조서류였습니다. 총장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눈을 감고 사인을 두 번만하면 경제적으로 유익하고 아무에게도 손해를 주지 않고도 학교 건물을 완공할 수 있는데..." 그러자 고위관리는 사인을 해도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그냥 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총장은 결국 거절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몇 초만에 백만달러의 건축비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양심에 의해 어리석은 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먼저 선한 양심을 가지라 한 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행을 말합니다. '너희의 선한 양심' 이라 하지 않고 '너희의 선행' 이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면 선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래서 본문은 선한 행동을 하라지 않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합니다. 선한 양심만 있으면 선한 행동이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선한 양심의 판단기준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선한 양심이 유지되고 선한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여기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무감각해지고 무디어진 양심을 되살려주십니다. 계속해서 양심을 일깨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따라야 어떤 고난 가운데도 선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온갖 부와 명성을 뒤로 하고 배고파 죽어 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 의 영화가 아니라, 메마르고 굶주린 땅 아프리카에서였습니다." 그녀는 투병 끝에 조용히 눈을 감았지만, 그녀가 남긴 글은 오래도록 마음에 기억될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또 다른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는 자신을 위한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도와 주기 위한 손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선을 행하라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고난의 그리스도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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