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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은 우리의 충성을 보신다!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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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우리의 충성을 보신다! (마 25:14~30)
 
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붙잡혀 크게 쓰임을 받았던 영적 지도자들은 끊임없는 자기 훈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훈련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교회를 일깨웠습니다.  하나님이 더 크게 붙들어 쓰셨던 영적 지도자는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과 용납함으로 관대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합니다.  어쩌다가 실수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여러 이유와 변명을 대면서 관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섭섭해하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에게는 그렇게 관대함을 요구하면서 상대방에 대해서는 한 치의 빈틈도 주지 않고 엄격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그렇게 가져서는 안됩니다.  또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그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한 시대와 역사 앞에 하나님께 강하게 잡혀서 쓰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이 무거웠습니다.  말은 적게 하고 기도는 많이 하였습니다.  사실 목사가 사람을 쓰는 것도 아니며, 세상이 사람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상황, 어떤 사람들을 만나든지 말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들과의 전화는 30분이든, 1시간이든 붙잡고 늘어지게 이야기를 합니다.  끝없이 자기 말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루 단 30분도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주 앞에 무릎 꿇는 훈련을 많이 하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만날 때에 격려와 용기와 희망이 말들을 많이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쓸 때에 언제나 끝없는 격려와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용기와 격려와 희망의 말을 한다면 그 심령이 살아나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영적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붙들어 쓰는 기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남에게 공포를 준다든가, 남을 자꾸 저주한다든가, 불안과 근심을 준다든가 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렇습니다.  참 성령의 역사는 생명과 평안을 줍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은 그가 하는 말이 언제나 평안과 기쁨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상대방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입만 열면 그 마음에 격려를 주고 용기와 희망을 끝없이 줄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달란트 비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  그리고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섯 달란트 남겼던 사람, 두 달란트를 남겼던 사람에게 칭찬을 내리면서 이런 유명한 칭찬을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도 벌써 3월이 지나가고 4월의 둘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섬김과 봉사를, 우리들의 선교와 사명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대해서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의 봉사는 얼마나 충성되었다고 내 나름대로 평가를 내릴 수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칭찬을 받았던 종들로 하여금 그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게 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우리의 전 일생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을 결산하는 그 날, 여러분과 제가 충성된 종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반드시 대답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과 저를 충성된 종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맡은 자의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청지기 의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 14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본문에 보니까 주인이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맡겼습니다.  종들 편에서는 주인이 맡겨 주신 것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인이 맡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했습니다.  좀 더 고대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이 청지기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것을 맡은 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이 맡았느냐?  그것은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맡은 것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느냐?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자와는 다르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가 적게 받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에게 맡겨진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푸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19절의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성경은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혹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주인이 떠나간 후에 오랜 동안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마도 주인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런지도 몰라.  그리고 맡겨주신 것에 관해서 책임의식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5장의 한 부분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한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사건,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주님의 재림을 믿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두뇌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역사와 시간 속에서 다시 돌아오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사십니까?

그 분이 다시 돌아오실 것이고 따라서 내가 살아왔던 삶, 또 인류의 모든 역사는 그 분 앞에서 반드시 심판되고 결산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하니까 세상이 끝난다고 하면서 집을 떠나고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등지고 산으로 올라가든지 기도원으로 올라간다든지 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 속에 다시 오실 그 분, 그리고 역사를 마침내 심판하고 결산할 그 분 앞에서 언제 역사의 종말이 와도, 언제 내 개인의 종말이 와도 그 분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되어져야 할 삶,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의 본질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내 삶은 심판된다, 결산의 날은 온다, 그 날은 반드시 온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오늘 하루하루의 삶은 그 분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야 할 우리의 삶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을 어떻게 사십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기듯이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무엇을 맡기셨습니까?  시간도 맡겨 주셨습니다.  돈도 맡겨 주시고, 재능도 맡겨 주셨습니다.  은사도 맡겨 주시고, 우리의 몸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목숨과 인생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겨 주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돈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이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맡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능과 달란트를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달란트,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서도 별로 볼 품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주 적은 재능을 가지고서도 그것을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면서 아주 유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인생에서 얼마나 기회가 주어졌느냐 출세할 수 있는 기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 인생에서 얼마나 좋은 기회가 주어졌느냐?  그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리고 나서 우리의 삶을 다 살고, 맡겨 주신 모든 것들을 다 관리한 후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들은 둘 중에 하나로 결정될 것입니다.  하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고, 다른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우리 인생이 결산되는 그날 착하고 성실한 종, 충성된 종으로 결산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맡은 자 의식입니다.  내게 주어진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삶이 주 앞에서 신실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그런 삶의 모습들이 조금이라도 비추어진다면 우리는 다시 맡은 자의 의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짧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짧습니다.  그 동안에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주님, 내가 청지기임을 잊지 말게 도와주십시오."
여러분과 저의 의식 속에서 이 맡은 자의 의식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시간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정말 충성된 종으로 한 평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두 번째로 중요한 의식을 저는 '신뢰 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이 또 다른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여기서 충성이란 단어를 본래의 뜻대로 다시 옮긴다면 그것은 '믿음직스럽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믿음이란 단어에서 충성이란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피스테'란 말이 '믿음직스럽다' 라는 말입니다.  이 믿음직스럽다는 말은 철저하게 우리의 내적인 성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어떤 모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간직되어 있는 내적인 성실성,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진 중요한 단어입니다.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비서로 취직하려고 어떤 사무실에 갔습니다.  마치 벤처기업 같은 젊은 사장이 조그만 사무실을 하나 만들어 놓고 사람을 모집한 것입니다.  한참 사무실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비서로 자원했던 아가씨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의 초점은 '나를 멋있는 사장으로 당신이 만들 수 있느냐?  나를 잘 선전해 주고 PR해 줄 수가 있느냐?' 하면서 내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인지 이런 이야기를 한참하고 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사무실 문을 노크합니다.
"쉬∼  내가 하는 거 잘 보라구."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이 사람이 전화를 탁 들더니 뭐라고 마구 떠듭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것처럼 열심히 떠들어댑니다.  한참 후에 전화를 끊더니 "아 죄송합니다.  마침 기업체 아무개 회장님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요.  그래,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유니폼 입은 사람이 이리저리 한참 쳐다보더니 "저요, 사무실 열었다고 해서 전화선을 연결하려고 전화국에서 왔는데요."  물론 이 아가씨가 그 회사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세상일수록 우리 세상은 성실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충성스러운 사람, 성실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들의 성실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내가 성실한 사람이 되자 라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성실은 성실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신명기 32장 4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진실무망하십니다.  당신은 성실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십니다.  그 성실하신 하나님은 역사와 우주를 성실
하게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에게 성실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성실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좀 성실해보자.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그러나 아직도 성실한 가치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 그 분은 성실하시며 그 분은 인생들에게 어떤 성실한 과제를 맡겨 주신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내 인생을 걸고 성실을 향해서 나의 존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중요한 기초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유일하게 칭찬 받지 못하고 책망을 받았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경우에는 이 주인관이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성실한 가치가 없다 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성실하게 살게끔 되어 있습니다.  역사관에 어떤 성실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성실한 인생을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자기에게 맡겨 주신 주인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인을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24절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보십시오.  주인을 향해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당신은 인색한 사람입니다.  주인보고 인색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혹은 두 달란트를 주면서 나에게만은 왜 한 달란트 밖에 주지 않느냐?  당신은 나에게만 짜고 인색한 분이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숨어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달란트란 것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금 한 달란트면 적게 쳐도 20년은 살 수 있는 생계비에 해당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고 20년을 살 수 있다.  이게 적습니까?  감동이 안 됩니까?  10년이 아니고 20년이란 말입니다.  굉장한 겁니다.

'나에게도 이렇게 많이 맡겨 주셨구나.  고맙구나.  내가 이것을 제대로 잘 관리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대신에, 아니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면서 왜 나에게만 한 달란트를 주는가?

왜 이런 불평을 가졌을까요?  비교하니까 그렇습니다.  비교라는 것이 항상 인생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아주 복잡해집니다.

저는 이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만약 비교했다면 불평할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있었다고 봅니다.  왜?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이 어떻게 불평할 수가 있습니까?  왜 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는가?

이 세상에는 항상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존재합니다.  나보다 더 많이 있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항상 나는 비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초점을 거기다 맞추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맡겨 주셨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내가 이만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맡기셨겠지.  만약 그 주님을 바라보고 내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 앞에 성실했더라면 얼마만큼 달라졌을까요?  이것이 바로 신뢰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나의 삶에 대한 가능성을 신뢰하는 믿음.  여기서부터 우리의 성실성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남은 인생을 다 산 후에 역사의 심판자이신 주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충성된 종으로 나타날 수가 있겠습니까?  인생을 너무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항상 신뢰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맡겨 주셨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신뢰하는 의식.  살아가야 할 내일의 인생을 내다보면서 저는 주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이 신뢰하는 의식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충성된 자로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의식을 '존재의 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소유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소유가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은 이것은 훨씬 적은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의 가치관,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은 기술을 소유하기 위해서, 소유, 소유, 소유를 위해서 달려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고 거기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땀을 흘립니다.  소유와 성취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물게는 존재의 가치관,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인생은 소유로만 따질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을 다 살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인생을 존재의 가치관에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만 있습니다.

저는 본문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들이 칭찬을 받았던 이유가 반드시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다섯 달란트 남겼고,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에 주인이 칭찬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님께서 보셨던 어떤 성실함, 그것이 칭찬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칭찬한 내용을 잘 보십시오.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

칭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떤 질적인 칭찬을 했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여러분, 제가 한 달란트 받으면 20년을 살 수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다섯 달란트를 가지면 몇 년 살 수가 있습니까?  100년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가지고 얼마를 남겼습니까?  다섯 달란트입니다.  또 100년을 살 수 있는 액수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어떻게 칭찬합니까?
"네가 정말 너에게 맡겨준 어마어마한 것을 가지고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겼으니 너는 정말 어마어마한 종이다" 그렇게 칭찬하고 있습니까?  뭐라고 칭찬했습니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주인이 보시기에는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도 작은 일이라는 겁니다.  크고 작은 것을 나누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큰 일, 작은 일, 위대한 일, 평범한 일, 그렇게 나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가 볼 때는 다 작은 일이다는 겁니다.  네가 볼 때 뭔가 굉장한 일 같지만 내가 볼 때에는 작은 일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작은 일 앞에 얼마나 성실할 수가 있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성실한 과정이나 성실한 태도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그 일 자체, 결론 자체만 강조점을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큰 일이 주어져야만 일을 합니다.

저는 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판단은 그가 차지한 자리나 그가 쓰고 있었던 벼슬에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그 감투의 자리를 벗어 놓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뭐가 남아 있느냐?  그것이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지미 카터 전대통령.  정치가로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사람의 인격의 무게가,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빛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 기자가 지미 카터의 퇴임 후에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이런 인상 깊은 기사를 썼습니다.
'백악관이 목표가 아니었던 아마도 유일한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백악관이 목적이 목표가 아니었던 유일한 대통령.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최고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아마 청와대 입성일 겁니다.  그러나 백악관이 목표가 아니었던 사람.  백악관은 수단이라는 겁니다.
 
지미 카터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섬김의 한 과정에서 백악관이라는 자리가 주어졌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백악관에서 나와도 괜찮은 겁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다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면 됩니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자리에 가서 또 섬기면 됩니다.
 
그는 조지아로 돌아왔습니다.  조그만 시골 교회로 다시 돌아와서 거기서 옛날처럼 교회학교 교사를 합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확하게 그는 자원 봉사자로서 교회 청소를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정성스럽게 합니다.  카터가 어떻게 청소하나 사람들이 많이 구경온다고 합니다.  교회학교를 어떻게 가르치나 그것도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그 교회는 교인보다 구경꾼들이 더 많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나면 지금도 국제분쟁 지역에 카터를 조정자로 보내달라는 요구가 높습니다.  왜냐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는 겁니다.  김일성이 죽기 전에 자기가 믿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 카터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실성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관은 어떤 자리가 아닙니다.  벼슬이 아니란 말입니다.  소유가 아닙니다.  그의 존재, 그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날이 갈수록 그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무게는 더 감동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존재의 의식에 가치를 두었던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젊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인생도 빠르게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인생을 결산할 때 우리의 주인되신 그분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을 걸 수 있는 그 작은 일을 발견했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 앞에 드러내야 할 이 신실함의 열매, 충성의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서 준비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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