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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롬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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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롬 8:1~11)

우리나라의 시인 중에 윤동주라는 시인이 남긴 족적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시인들의 메시지들과 견줄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윤동주의 서시는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 1위에 올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만큼 이 시는 우리들에게 많은 자리매김을 하며 감동을 주고 있는 시입니다.


----------- 서 시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저는 개인적으로 윤동주시인이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를 깊이 읊조리면서 느끼는 감동이 있습니다.

이런 감동입니다.

윤동주의 서시를 읽으면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 식민 치하를 살던 우리 민족의 얼을 깨우고 일제에 굴복하는 부끄럼에서 우리 민족들이 벗어날 것을 깨우쳐 주는 감동도 있지만 그것보다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는 목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가 생각했던 어휘들 때문에 얻는 감동입니다.

윤동주는 그의 작품에서 이런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하늘, 잎새, 별, 바람, 구름, 달, 강물, 꽃, 숲, 사랑들이라는 어휘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까?
그가 얼마나 깨끗한 마음으로 삶을 영위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일주일 동안 우리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들이 무엇입니까?
돈, 아파트, 대학, 자동차, 주식시세, 땅, 선거, 정권, 음식, 복권 등 입니까?
만약에 우리들의 일주일간의 언어가 그런 단어들로 포장되어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인생을 잘못 사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25번째의 강해를 통해서 우리 교우들과 함께 깊이 묵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에 이끌려 산다는 점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이끌려 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나는 무엇에 이끌려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지금 안양에는 초등학생의 여자아이를 둔 엄마들이 학교 앞까지 마중 나가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안양의 초등학교 여학생 살인 사건으로 인한 민감함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아이들을 왜 무자비하게 살해했습니까? 
소아 기호증이라는 그릇된 여성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잘못되고 왜곡된 그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에 따라 그것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불행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지배되는 삶은 세상 사람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두 가지의 생각에 사로잡혀 살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저는 오늘 로마서 25 번째의 강해를 통해서 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으로 우리 교우들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2주 전 로마서 24 번째의 강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누리는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① 정죄를 당하지 않게 되는 은혜였습니다.
②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은혜였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러한 은혜는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심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는 율법에 매여 정죄를 당하여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매여 연약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허덕여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고통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정죄당하지 않게 해주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당하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이끄는 존재들일 때만 가능하다는 전제입니다.

다음 주에 생각해 볼 말씀을 한 구절만 빌려옵니다.
롬 8: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에게 이끌림을 당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당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아주 선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6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1. 육신적인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6절 본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절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본문의 세 개의 구절에서 동일하게 ‘육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sarx’는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조금 더 리얼하게 표현하면 ‘고깃덩어리’입니다.
바울은 이 고깃덩어리에 집착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하면 현대 크리스천들의 상당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너무 많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땅을 대고 있는 것을 자꾸만 포기하라고만 하고 손해를 보라고만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세상에 나가면 우리들이 현실적으로 맞닥뜨리고 사는 현장은 손해 보아서는 안 되는 삶을 사는데 왜 자꾸만 손해를 보라고 강요하느냐고 마음속으로 항의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무식한 목사의 일침이라고 매도하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21세기를 목회하는 목사들의 딜레마가 솔직히 여기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도를 생각하면 부드럽게 설교를 해야 하고, 성경을 묵상하면 전해야 할 것은 전해야 하고 도무지 어떤 것이 중용이며, 현대적인 감각의 목회인가? 에 대하여 갈등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읽다가 이 개인적인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에 있는 한 마을에 도착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나병 환자 10명이 있었습니다.
이 10명 중 9명은 유대인이고 단 한 사람만이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주님에게 이렇게 소리를 쳤습니다.

눅 17:13절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 간절한 간구를 들으신 주님께서 그들을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10명의 나병환자가 모두 다 질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의 기사를 싣고 있는 의사 누가는 이어지는 후속편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17:15-19절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많은 목회자들이 이 기사를 기초로 하여 설교를 할 때 아주 빈번하게 감사절에 행하는 설교의 본문으로 사용합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성도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기사를 통하여 받는 아주 큰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치료와 관심은 우리들의 육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도리어 주님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영혼의 문제임을 다시 금 재확인하게 됩니다.

감사하고 있는 사마리아 출신의 치료 받은 나환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영적인 것입니다.
나병 환자 치료 기사의 내용을 통해 저는 항상 영적인 부분에 초점을 흐리지 말아야 한다는 결벽증적인 부담감을 갖고 설교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모든 이 땅에서의 대상은 육신적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는 육신적인 부분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초점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 육신적인 것을 도모하고 살고 있느냐를 자문할 때 정말로 내 삶이 육신적이라면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이 육신의 일을 도모하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육신적인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우리에게는 두 번째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바울이 육신의 생각과는 반대급부로 이야기하는 성령의 생각을 하는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5절-6절을 다시 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사는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생명과 평안이라고 바울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원어성경에 보면 ‘생명’이라는 단어는 ‘zwhv’의 번역입니다.
zwhv’라는 단어는 앞서 설명한 고깃덩어리를 말하는 sarx’의 반의어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린다면 ‘조에’는 ‘본질적으로 윤리적으로 "말씀"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생명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산다는 것은 우리들의 ‘사륵스’가 ‘조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하여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영에 이끌린다는 표현을 하면 흔히 하는 표현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교우들이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노파심으로 재확인하여 선포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 중에 몇 몇 분들이 ** 교회의 예언하는 권사에게 예언 기도를 받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예언을 받는지는 저는 모릅니다.
특별히 이런 일을 하는 분들은 저에게는 아주 비밀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령이 충만해 보여서 속아 넘어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막아도, 막아도 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가 예언 기도를 받는다든지, 아니면 심지어 우리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도 예언기도를 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유는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상당히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를 ‘ aybin:’(출 7:1)라고 합니다.

출 7: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대언자로 번역된 ‘나비’라는 이 단어는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자’라는 한자를 쓸 때도 미리 ‘豫’ 자를 쓰는 예언자라고 쓰지 않고 참여할 ‘預’ 자를 쓰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은 예언자가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대신 참여하여 말하는 자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내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예언을 통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은 일하십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성경을 통해 바른 믿음을 소유하면 그 사람이 진리를 지키면 그 진리를 지키는 것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일을 예언한다는 것은 이미 예언이 아니라 무당들의 놀음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의 은사인 예언은 무엇입니까?” 하고 불만 섞인 모습으로 질문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질문을 하시는 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말하는 ‘예언’이라는 단어 ‘profhteia’(프로페테이아)라는 단어는 미래에 하나님의 교회에 일어날 주님이 주시는 통찰력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지 절대로 사람에게 행하라고 주는 예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강도의 행위입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들은 계시록 21장 8절에 기록한 둘째 사망의 들어갈 ‘점술가’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은 예언을 해주는 점술가들에게 이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인격적인 성령께서 나의 전인격을 주관하셔서 잘못된 삶을 살 때 올바르게 살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단순화 시키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산다는 것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11절의 본문은 참 은혜가 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는 지난 주일 다비다의 이야기를 나누며 부활주일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바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올곧게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올바르게 살면 우리들의 죽었던 몸도 다시 살 것이라고 바울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다시 삶은 말 할 것도 없이 영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면 다시 살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휘감아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신림에 거주하는 우리 교우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차를 주차하기 위해서 주변을 보았는데 집사님의 집 옆에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간 옆의 집은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어서 그곳에 안심하고 주차를 한 뒤에 심방을 했습니다.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누군가가 차를 세웠습니다.

차를 세우자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남의 집 앞에 차를 세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를 내며 이렇게 저에게 말했습니다.

제 차의 정면에 아내가 보는 성경이 있었는데 그것을 같고 이렇게 저에게 공격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인가 본데 형편이 없구만!’
졸지에 형편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중하게 사죄를 하고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졸지에 형편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은 속이 상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뭔가가 다르기를 기대하는 폭이 있습니다.
그래도 너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요청이 있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한국교회를 향하여 손짓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면 한국교회는 새롭게 도약할 것이며 영적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감찰회에 두 교회가 교역자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두 교회는 우리 중앙교회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중보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부임 인사차 어제 교회에 와서 교제를 했습니다.

제가 단독목회를 할 때의 연배를 갖고 있는 후배이고 또 어려운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해야 할 안타까움도 있고 해서 선배인 제가 무언가를 말해주어야 할 말이 있어야 하겠는데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교회가 어려운 교회이지만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목회의 본질에 목숨 걸고 바르게 목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저를 되씹어 보았습니다.
나는 목회의 본질을 사수하며 목회를 하고 있느냐의 질문을 말입니다.
아직은 부끄러운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후배와의 교제 속에서 다짐을 다시 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목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바르게 목회를 하는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나를 쳐서 복종해야 함을 말입니다.

세상의 삶도, 목회도 기술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삶도, 목회도 시대에 걸 맞는 테크닉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영은 항상 2번째로 밀려 있는 경우가 하다합니다.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 교우들은 경책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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