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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해가 지기까지 그치지 않는 전쟁 (출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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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까지 그치지 않는 전쟁 (출 17:8~16)
      
  어느 주일에 목사님이 주일학교 분반 공부하는 옆을 우연히 지나다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너희들 담배는 좀 피워도 괜찮다.’라고 말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 이게 무슨 일인가 해서 예배가 끝난 후에 그 선생님을 방으로 불러서 물었습니다.
  ‘내가 우연히 지나다가 듣자하니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말하던데, 자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실제로 제가 좀 피우거든요. 그래서 그만…’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거룩한 위선이라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네.’ 

  거룩한 위선, 이것은 역설적인 말로 들리지만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둑도 자식에게는 도둑질은 나쁘다고 가르칩니다. 세계적인 테러리스트들도 자기 자식은 세계 제일의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우리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위선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의 신앙과 인격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가장 아픔을 주는 단어가 위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어서 그렇지 그 표현을 약간 다르게 하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실제의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그

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능이 없다면 수많은 여성들이 화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화장이 무엇입니까? 실제 얼굴 모습보다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소위 쌩얼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어디 화장뿐입니까. 보톡스라든가 성형수술이라든가 이 모든 것이 실제의 내 모습보다 더 나은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모뿐만이 아니에요. 삶의 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 실제의 모습보다 더 행복하고 더 잘사는 것 같은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외국 정상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면 대대적으로 길거리 청소를 하고 물청소를 하고 노점상을 철수시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나은 모습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댁에 손님이 찾아오면 대청소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남자 성도님들이 집에서 여성 셀 모임을 하면 참 좋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청소를 하니까 집안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롱이 아주 유용합니다. 지저분한 것은 다 장롱에 집어넣으면 되니까. 

  그렇다면 신앙과 도덕적인 차원에도 왜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남들에게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또 우리의 실제의 모습보다 더 행복하고 더 잘사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도 우리의 실제 모습보다 더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것이 남을 속이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내 참모습보다 더 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자기가 다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선한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 속에 주신 하나님의 법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에 주신 하나님의 법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으로 거기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고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그것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사람들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다 의로운 모습, 다 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와 선을 지향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우리의 실제 현실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마음에 소원하는 것과 우리의 실제 현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또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바울이 언제 이것을 고백했습니까. 예수 믿기 이전 과거의 얘기가 아니고 예수를 믿은 다음 그 현재의 모습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고백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리스도인에게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자신의 괴리를 인정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부인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후자가 더 위험합니다. 자기에게 이런 괴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 그것을 일부러 감추려는 사람이 위험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선인 것입니다. 

  게다가 이것보다 더 보기 싫은 것은 이런 괴리현상에 믿음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옷을 입혀서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한 것처럼, 육신적인 것을 영적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 그것이 정말로 보기 흉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원래는 인간의 육신에서 비롯된 추한 욕심인데 거기에다가 신앙이라는 옷을 입혀서 거룩한 것처럼 위장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한 예가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의 동기가 무엇이냐? 물질에 대한 욕심입니다. 물욕입니다. 기복신앙의 근본 동기는 물욕이에요. 인간 본연의 물욕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물욕이 다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 물욕에다가 신앙이라는 옷을 입혀서 이제는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는 식의 경건한 신학을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믿음의 이름으로 마음껏 욕심을 부려도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로 흉한 것입니다. 어찌 물욕뿐입니까. 명예욕에도 똑같은 짓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마음껏 본연의 욕심을 바라는 사람들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선입니다. 그리고 역겨운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모순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민하는 것이 그것이 더 바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9절에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이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도 예수님이 일반 사람이 당하는 시련을 당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예수님이 다 당해보셨어요.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예수님이 경험해 보셔서 아십니다. 모르고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과 알면서도 거룩함을 요구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우리의 고민을 아뢰는 것을 주저하면 안됩니다. 그게 진짜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경건한 말만을 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경건한 말을 사용하면 주님이 감탄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경건으로, 우리의 거룩한 언어로, 우리의 표현력으로, 문장력으로, 문학적인 재능으로 하나님을 감탄시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믿음으로 하는 기도요, 우리의 중심을 쏟아내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경건한 말만 하는 기도가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하나님께 쏟아놓는 것입니다. ‘주 예수 앞에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힘들면 힘들다고 아뢰고 싫으면 싫다고 아뢰고 이해가 안되면 이해가 안된다고 아뢰고 의심이 되면 의심된다고 아뢰면 됩니다. 다만 감사함과 예절을 갖춰서 아뢰면 하나님이 꾸짖으시는 게 아니고 오히려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제 설교 주제의 다수가 이런 식으로 제 고민을 털어놓다가 얻은 응답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은 자기 자신의 믿음에 상당히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GE의 회장이었던 웰치가 그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신앙에서 좀 멀어졌다고 하지요. 그런데 하루는 회의가 끝나고 뉴욕 록펠러 센터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걸어가다가 성 페트릭 성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성당을 만 번도 더 지나쳤지만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왠지 성당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혼자 성당에 들어가서 한 시간 동안 묵묵히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뭔가 자신의 영혼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기도라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이든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류를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늘 좋은 마음으로만 하나님께 찾아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부모님을 찾아갈 때 늘 기쁘고 좋은 소식만을 들고 가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경우가 더 많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갈 때 갈급하고 문제가 있고 경제적이고 누가 병이 들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이런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마음의 상태, 우리의 신앙마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기가 힘들다든가, 예수님의 말씀이 납득되지 않는다든가,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에 의구심이 든다든가, 과연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냐, 이 모든 것도 다 하나님만이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거기에 대해서 해답을 얻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을 누가 대답해 주겠습니까. 어느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충분한 대답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우리가 이론적인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좀 더 깊은 실존적이고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확신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은 영적인 응답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구하면 하나님이 대답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여분이 예절과 감사를 갖춰서 아뢰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갖는 의문은 내가 예수를 믿어서 달라지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욕심이 있고 시험이 있고 게다가 이제는 전과 달리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여야 되는 부담까지 안고 있다면 예수님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게 정말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려는 데 아말렉이라는 족속이 이스라엘과 맞서 싸웠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는 내버려 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으로 가려니까 아말렉이 그들을 방해하고 맞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평지에서 싸우는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졌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팔을 들고 있다가 팔이 피곤해지니까 돌을 가져다가 그 위에 앉고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팔을 지탱해 주어서 해가 지도록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마침내 아말렉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해가 질 때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가 질 때까지 손을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해가 졌다는 말은 인생의 황혼을 뜻합니다. 크리스천이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이 싸움이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 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는 여전히 우리의 육신이 문제가 됩니다. 육신의 욕심이 없어지지 않고 아말렉처럼 쳐들어옵니다. 가끔 욕심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가끔 우리가 영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손을 내리는 순간에 다시 육신의 욕심이 우리의 삶에 쳐들어옵니다. 

그러면 대책이 무엇이냐? 모세처럼 해가 질 때까지 손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기도, 예배,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에 성령과 육신은 반비례적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그만큼 육신의 욕심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그만큼 육신의 욕심이 더 늘어납니다. 이것은 천국 갈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을 게을리 하면 그만큼 육신이 점점 더 강하게 되고 더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케네스 해이건이라는 목사님이 기름부음 이라는 책에서 그분이 성령 충만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성령의 임재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면 그만큼 기도와 금식의 비중을 늘린다고 말했습니다. 기도와 금식의 양을 늘리면 다시 성령의 임재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한다고 고백했는데 이 일에 있어서는 왕도가 없습니다. 지금길이 없습니다. 목사라고 더 쉬운 게 아니고 처음 믿은 사람이든 빌리 그레함 같은 목사님이든 마찬가지에요. 원리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이것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하신 것뿐만이 아니고 당신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예수님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해가 질 때까지. 천국에 갈 때까지. 그때까지 피곤하면 안됩니다. 교회 생활이 왜 필요하냐? 혼자 손을 들고 있다 보면 피곤해집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은 아론과 훌처럼 우리가 계속 믿음을 지속하고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생활입니다. 왜 우리가 교회를 다녀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 내가 혼자 신앙생활 있는 게 아니냐? 그러나 혼자 신앙생활을 하면 피곤해졌을 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모세도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모세도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었고 때문에 아론과 훌이 좌우에서 그의 팔을 들어주었더니 ‘해가 질 때까지 팔이 내려오지 아니하고 여호수아와 칼날로 아말렉을 쳐서 폐하니라’ 승리했지요. 우리도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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