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섬김의 태도(IV) (롬 12:10~13)

  • 잡초 잡초
  • 310
  • 0

첨부 1


섬김의 태도(IV) (롬 12:10~13)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로마서 12:10-13)

어제는 제89주년 3.1절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과 2008년 3월 1일 사이에 이 땅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22만 명으로 총 인구의 1.5%였고 오늘은 826만 명으로 총 인구의 18.3%이고, 37배 정도 증가했습니다.

3.1운동 당시 평양에 동양 최대의 장대현교회가 있었고 지금은 세계 최대의 교회와 각 교단마다 세계 최대교회들이 24개가 한국에 있습니다. 위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던 피선교국가였으나 지금은 세계 제2위의 선교국가가 되어 공식기록으로 1만 8천여 명의 선교사가 174개국에서 섬기고 있고, 기록되지 않은 선교사를 포함하면 약2만 명 정도 될 것입니다. 3.1운동 당시 한국 교회는 일본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북한에서 교회가 아직도 핍박을 받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교회가 가끔 비판과 책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3.1운동 당시 민족의 염원은 자주 독립이요, 오늘의 염원은 평화통일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이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기독교 대표자 16명 가운데 한 명으로서 민족의 지도자로 부각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1.5%였던 시대에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인사들 50%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민족의 어려운 짐을 짊어지고 나가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이명박 장로 대통령이 탄생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승만, 윤보선,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 네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장관들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번에 임명된 장관들 중에 가장 청렴하다고 평가 받은 국방부 장관이 저희 교회 집사님이십니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 문화, 교육, 과학, 체육 등 각계각층에 특출한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가 예수 믿는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 대통령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국민이 원하는 일을 먼저 이행하고 윤리적인 면에서 특별히 앞장서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잘 섬겨야 할 시기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섬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최고의 인물이 되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어떤 태도로 섬겨야 하는가, 그 네 번째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9절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 섬김은 반드시 사랑이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이 가미되지 않는 섬김은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으로 섬기되 그 속에 거짓이 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위선이 없는 사랑” 즉 속과 겉이 똑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관성과 투명성이 있어야 됩니다. 이번 정부의 장관 인선을 위한 검증과정을 보면서 장관이 되려면 평상시에 잘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상시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골 3:23)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사람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성령이 내 안에 계시므로 언행에 일관성 있게 해야 합니다. 사람은 우리를 늘 볼 수 없습니다. 벽 하나만 있어도 그 뒤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서 어디로 가오리까? 저 하늘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저 음부에 가도 거기 계시니 우리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시편 139:7-8).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우리에게 큰 위로입니다. 언제 어디에 있어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엄청난 위협입니다. “네가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디 숨을 건데?” 숨을 수 없습니다. 시편 139편에서는 “내 생각을 아시고 내 입술의 말을 아신다”고 했습니다(시편 13:1-4).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숨기려 하고 위선을 행하고 거짓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정직한 영, 깨끗한 영을 주시옵소서. 투명하게 주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여러분과 제 입술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두려울 것도, 주저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 앞에서 거짓 없는 사랑으로 잘 잘 섬기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은혜와 진리 어느 한쪽만 충만해도 문제입니다. 은혜만 충만하고 진리이 없다면 진리 없는 은혜라 거품입니다. 진리만 있고 은혜가 없다면 싸늘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는 진리와 은혜가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엡4:15)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도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해서 진실한 사랑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습니다. ‘미워하다’의 영어표현에는 ‘hate’가 있는데, 그보다 더 강한 단어가 ‘abhor’입니다. 구약에도 여러 번 나온 단어로 ‘증오’를 강하게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싫어하다가 미워하다가 증오합니다. 사도 바울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흉내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악한 것은 비슷한 것조차도 싫어합니다. 악한 것은 자세하게 알거나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악을 보고 듣고 생각하면 그것이 여러분을 악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은행을 턴 강도 이야기 들으셨지요? “어떻게 이런 일을 했나?”고 물었더니 영화를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고 했습니다. 영화를 얼마나 감동적으로 보았던지 그대로 한 것입니다. 악한 것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감동적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악한 이야기가 나오면 일어나서 나가십시오. 끝까지 앉아서 악한 이야기, 지저분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을 증오하고 선을 꾸준히 추구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악이 내 가슴에 있으면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언젠가는 꼭 드러나게 됩니다. “실체는 반드시 드러난다”는 철학적 정의가 있지 않습니까? 있는 것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이번에 장관 검증 중에도 그 분들의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일생동안 다른 사람들 앞에서 존경받고 살아왔는데 장관 후보가 됬다가 인생의 막바지에 어려운 일을 당하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위선 없이, 거짓 없이, 진실 되게 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이 머릿속에 들어오면 머리를 흔들고, 성경을 펴서 읽거나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시편 1편을 외워서 악이 내 속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라. 악을 증오하고 멀리하며 모양도 흉내 내지 말라.” 언제나 선한 결과를 위해 섬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건강하고 밝고 투명한 인생을 살면서 잘 섬기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악은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할 때 ‘속하라’는 ‘바짝 따라가라’는 뜻으로 선은 단단히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생각, 말, 태도, 분위기 등 무엇이든지 선한 곳에 힘을 실어주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평생 선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이 여러분의 얼굴과 표정과 언어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선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되고 그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때 어디서 섬기더라도 우리는 꼭 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10절에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라고 했습니다. ‘우애’라는 단어가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친절과 애정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Be kindly affectionate to one another." 심지어 사람을 비판할 때도 친절과 사랑으로 한다면 유익이 되고 좋은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독하게, 야비하게, 멸시하는 태도로 하면 오히려 적만 만듭니다.

이번 장관 후보자들의 검증과정 중에도 국회의원들이 후보자들을 얼마나 무시하는지요. 어느 국회의원이 검사들이 피의자들의 인격을 모욕한다는 언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후보자들의 인격을 모욕하더군요. 국회의원들이 국민 앞에서 발언을 할 때 좋은 태도로 해야 국회위원들을 존경하고 짇자들을 통해 배울 것입니다. 빈정대고, 모욕하고, 꼬집고, 야비하게 구는 태도라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도자들의 말과 태도가 멋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랑 안에서 은혜롭게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밖에서 놀다가 시커멓게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가 보고 “이놈이, 어디 가서 그렇게 하고 들어와. 조심 못하고. 가서 씻어!”하고 야단을 칩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안한 마음으로 들어오는데 엄마한테 야단을 맞았어요. 여러분도 어릴 때 야단맞아 본 적이 있으시지요? 저도 한두 번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위로 형님 세 분, 누이 한 분, 이렇게 네 분이 있었기 때문에 ‘아, 저렇게 하면 야단을 맞는구나!’하고 야단맞지 않는 법을 눈치로 배웠어요. 

그런데 우리가 야단맞을 때 우리 잘못보다 더 심하게 야단맞았던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때는 속이 상하고 ‘잘 못 했다고 했는데 왜 계속 이렇게 심하게 혼내요?’ 속으로 반발을 하게 되지요. 아이가 놀다가 지저분해져서 집에 돌아오면 “너 어떻게 된 거니? 이리와 봐”하면서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주면서 “닦으니까 예뻐지네! 조심해라”하고 가르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요 녀석이, 몇 번째 말을 하는 거야?”하면서 모질게 야단만 치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기가 힘들지요. 태도가 중요해요.

결국 건설적인 비판은 섬세한 예술입니다. 잘 해야 되요. 세심하고 건설적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판을 받아도 오히려 정말 고맙죠. “그분이 그때 그렇게 말을 안 해 줬으면 내가 정말 잘못 될 뻔 했지. 큰 일 날 뻔 했네! 정말 고마운 분이야. 나를 사랑하셔.” 애정을 가지고 은혜롭고 친절하게 비판한다면 얼마나 유익이 되겠습니까? 좋은 태도가 소중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BBK사건과 관련하여 정치인들이 별 있는 것 없는 것을 멋대로 말해서 고소를 당했잖아요! 최근 검찰이 소환하자 정치적 발언이었다면서 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야당 탄압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정치적인 발언이라도 진실을 갖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근거 없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멋대로 하면 서로 원수가 될 뿐, 정치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의 언어생활이 좀 더 친절하고, 은혜가 있고 건강해야 됩니다. 사실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어요. 사실과 함께 사랑과 은혜와 친절함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질이 있어야 유익한 정치인입니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서고 관계가 좋아지고 국민의 정신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요청하기 전에 여러분과 제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격려하고 우애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또 ‘서로’라고 했습니다. 사랑도 서로 해야지 한쪽만 하면 피곤해 지고 지칩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참 사랑을 표현하고 선을 베풀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전혀 반응이 없으면 몇 번 하다가 하기 싫어져요. 낙심이 됩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사랑을 표현하면 사랑으로 반응을 보이시고 여러분도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시너지가 여러분 가정에 풍성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도 ‘서로’와 ‘먼저’라는 태도는 섬김에 있어서 좋은 단어 입니다. ‘먼저’라는 태도는 참 좋은 자질입니다. 제가 지도자들에 대해서 책을 두 권을 썼습니다. 첫 번째 책은 ‘목회자의 리더십’이라는, 목사님들을 연구해서 목회자들을 위해서 쓴 책이고, 두 번째 책은 ‘지도자에게서 배우라’는 부모님들을 위해 쓴 책입니다. 

세계의 가장 성공한 지도자 153명의 자서전을 모아서 어떻게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었나를 분석했습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솔선수범’입니다. 먼저, 앞장서서 자기가 미리 알아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앞장서서 나아갈 때 무에서 유가 창조되며 죽었던 것들이 살아납니다. 창조가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경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들을 존경하는 ‘먼저’의 태도로 우리 모두가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를 경시하는 자녀들을 볼 때입니다. 자녀들이 어머니와 대화 하는 것을 들어보면 마치 자기 후배나 동생이나 친구들에게 하듯 합니다. 말을 마구 놓아서 아무렇게나 합니다. 친구들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단히 좋지 않습니다. 이런 자녀들은 앞으로 복 받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이 땅에서 잘 된다”고 했습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부모에게는 존경하는 태도로 공경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이 땅의 복과 저주가 달려 있습니다.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그 아이들이 그럴까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혹시 엄마가 그 아이를 키울 때 함부로 말하면서 키운 것이 아닌가? 아이들을 무시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는지. 그 아이들이 누구에게서 언어를 배웠습니까? 심지어 5, 6세 아이들도 자기 엄마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합니다. 사용하는 단어가 좋지 않아요. 유치원에서 배웠나요? 친구들에게서 배웠나요? 아니면 집에서 아빠한테 배운 것 아닙니까? 아빠가 집에서 엄마를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아이들이 엄마한테 그러는 것 아닙니까?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 아빠, 엄마라도 아이들을 먼저 존중하시길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말로 애정으로 대할 때 그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를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모처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부모가 아무리 잘 해도 잘 못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어른들이 자녀들을 존중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존경해야 존경을 받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금년에 많은 국가적 책임을 안게 되었습니다. 집과 교회, 직장과 이웃에서 위선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악은 철저하게 미워하되 선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친절과 애정으로 하며, 모두가 앞장서서 먼저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좋은 태도로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아름다운 자질들을 잘 개발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네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이 여러분과 저에게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김상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