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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관계의 중심 (창 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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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중심 (창16:7~14)

• 가물가물한 희망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은 85세에 이르기까지 약속의 후손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희망은 가물가물해지고, 아들을 보리라는 기대는 늙은이의 과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께 자기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이라고는 종인 엘리에셀뿐이라고 푸념하듯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창15: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믿기 어려운 그 약속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내 사래로부터 새로운 제안을 받게 됩니다. 몸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적인 방도 사이에서 아브람이 택한 것은 인간적인 방도였습니다. 언제 어떻게 성취될지 모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기에는 그의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인 렘브란트는 이 긴장된 순간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노년의 기색이 역력한 아브람은 맥이 풀린 모습으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누워 있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여윈 사래는 침상 가까이에 다가가 손짓을 해가며 아브람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수줍은 듯 보이지만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는 교태스러운 하갈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한 폭의 그림은 고심참담한 사래의 절박한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본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결혼 때 데려온 몸종을 통해 자식을 보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몸종은 태어날 아이가 주인의 친자식임을 확증하기 위해 여주인의 무릎 위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일종의 씨받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멸시와 학대의 악순환

마침내 하갈은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합니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는 여주인을 깔보았습니다. ‘멸시하다, 깔보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마스 hamas’는 사실 폭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상처입은 여인의 주관적 느낌일 수 있겠습니다. 하갈이 실제로 사래를 업신여기어 호락호락하게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사래는 그렇게 느꼈던 것입니다. 하갈의 배가 불러지면서 사래의 불안감도 커졌습니다. 하갈의 예사로운 말과 눈빛조차 사래에게는 화살처럼 아프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마침내 더 견딜 수 없어진 사래는 아브람을 붙잡고 불퉁거립니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창16:5)

하갈의 몸을 빌어서 집안의 대를 이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자 했던 사래의 희망은 오히려 불화로 바뀌고 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사래와 하갈 모두 가부장적 세계의 희생자들입니다. 사래가 자기 대신 아이를 낳아야 하는 하갈을 고맙게 또 안쓰럽게 보았더라면, 하갈 역시 남편을 다른 여인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사래의 쓰린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여백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둘은 앙숙처럼 으르렁거립니다. 

사래는 가장인 아브람에게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요청에는 당신의 태도가 분명치 않으니 몸종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냐는 질책이 들어있습니다. 아브람은 이때 심판관인 동시에 피고입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말은 참 무책임합니다.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아브람은 자신의 책무를 방기합니다. 골치 아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는 분쟁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사래에게 모든 일을 위임합니다. “당신의 종이니,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6)

아브람은 ‘책임적 자아’(responsible self)로 서야 할 자리에서 영혼의 비겁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분쟁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상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아브람의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굼뜨고 무기력합니다. ‘당신이 좋을 대로’라는 말이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아브람은 몰랐습니다. 사래는 아브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람의 가정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과 갈등을 빚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멸시’와 ‘학대’의 악순환 속에서 신음하는 것은 우리 속에 타자에 대한 연민과 감사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갈은 주인의 학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굴종하며 살기에는 그의 피가 너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브람의 집을 벗어나 광야로 나갑니다. 학대를 견디며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광야의 자유가 낫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태중의 자식이 받을 냉대가 더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임신한 여인이 견뎌내기에는 너무 가혹한 곳이었습니다. 길 가에 있던 샘터에서 하갈은 절망감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다가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마치 친숙한 사이인 듯 말을 건넵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너무나 간명하고 단호한 권고입니다. 여주인에게 복종하며 살라는 말은 기존질서(status quo)를 합리화하는 말 같아 불편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권고가 합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결기 때문에 주인의 집을 박차고 나오긴 했지만 광야는 임신한 하갈이 머물 장소가 못됩니다. 그에게는 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에게 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주저하는 하갈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합니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11)

이스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약자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신 분으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태어날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하갈의 가슴에 희망의 씨가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됩니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12)

이건 얼핏 보면 빈정거리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과 싸우면서 들나귀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경탄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굴욕적인 삶을 거부한 하갈의 피를 이은 사람답게 자유인으로 살아갈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슴 벅찬 희망은 하갈과 이스마엘로 하여금 어떤 곤고함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의 샘터였을 겁니다. 그래서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그곳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습니다.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이를 보시는 분이고, 그들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 인간에 대한 도구화 

과연 하갈이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 주인에게 복종하며 살았을까요? 창세기 21장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는 이야기가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원만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가정에서 일어난 이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꾼은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일까요? 그는 사래나 하갈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도구화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뿐입니다. 사래는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결국 사래에게 하갈은 도구적 존재일 뿐입니다. 도구화된 사람이 그 주인을 존중할 리는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도구화는 이처럼 이중적인 비인간화를 낳고, 그 결과는 ‘멸시’와 ‘학대’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될 때 세상은 황무지로 변합니다.

요즘 들어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시도가 부쩍 늘고 있습니다. 병든 세상이 만든 불구의 인간들이 세상을 위험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어느 분은 왕자로 태어나 거지로 살아가는 것이 죄라 했습니다.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도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대하는 순간, 누군가를 쾌락 충족의 도구로 삼는 순간 그는 비인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또한 누군가를 내 이기적인 욕망충족을 위해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뜻을 알지 못하고 살면 인간은 짐승 이하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 뜻이 들어가면 변한다

얼마 전 안양 교도소가 시행한 ‘평화 인문학' 강의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복역 중인 죄수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내로라하는 강사들이 두어 달 동안 기결수들에게 철학, 문학, 예술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처음에는 웬 따분한 인문학 공부인가 하고 심드렁하게 참여했던 기결수들은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 

강사로 수고했던 <수유+너머 연구소>의 윤세진 연구원은 “그들에게서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못 만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희망의 인문학 강의를 수료한 이들은 24명이었는데, 그들의 죄목은 다양했습니다. 군무이탈, 절도, 폭행, 사기, 살인…하지만 수료증을 전달받는 자리에서 그들은 사뭇 진지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다짐했습니다. 그들이 과연 복역 기간이 끝나 출소한 후에도 그런 결심을 유지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충동이 쉽게 그들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 속에 뜻이 들어가면 그는 존재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의 삶이 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을 강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사랑하셨을 뿐입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신분질서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던 하갈의 신음소리를 들으셨고, 그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하갈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세상이 달라보이는 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들의 관계의 중심에 주님을 모실 때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서로를 비인간화시킴으로 ‘멸시'와 ‘학대'의 열매를 맺는 삶은 끝나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연민으로 이루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열쇠들입니다. 이 소명을 붙들고 오늘도 내일도 사랑의 매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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