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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교회 바른 신앙 (살전 1:1~10, 살후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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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회 바른 신앙 (살전 1:1~10, 살후 2:1~17)

  2008년도 전교인 수련회 주제를 ‘좋은 교회 바른 신앙’으로 정하였습니다.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이며 그 좋다는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좋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성격이 좋고, 너그럽고 인정이 많은 마음씨가 좋거나 또는 몸 가짐이나 태도가 예의 바르다는 것 등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합니다.   교회가 좋다는 말은 무엇이 기준이 될까요?  

  시설이 편리한 교회를 좋은 교회라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극장, 카페 같은 분위기가 좋아서 그 교회에 나간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 기독교 문화 교양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회, 유명한 설교자가 있거나 찬양대의 수준이 높고 예배 순서 등이 매끄럽게 진행이 되는 예배의 분위기가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명한 인사들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가 좋다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와 사회 봉사활동이 활발한 교회를 가리켜 좋은 교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교회들은 대부분 규모가 어느 정도 큰 교회들입니다.  반대로 큰 교회보다는 작은 교회가 인간미 있고 화목하여 좋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Oxford 한인교회에 방문하는 분들 중에 ‘교회가 가족적인 분위기입니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자주 있습니다. 교인 수가 얼마 되지 않는 해외 한인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자로서 그런 말씀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이 즐겁습니다.  가족처럼 화기애애하고 다정한 교제가 해외 생활에서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이름을 아예 ‘좋은교회’라고 지은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가 불신 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는 즈음에 사람들에게 좋은 교회로 알려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소망하는 이상적인 좋은 교회상이 있습니다.  목회자 자녀로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교회들을 돌이켜 보면 저마다 장단점들이 있습니다.  어려서 철이 없을 때 아버지의 뒤를 이은 목사가 안 되려고 했던 이유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하나는 교우들 간에 다툼이 일어 상처가 생기거나 교회 안에 분란이 발생하면 제일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그 교회의 목사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저런 어려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는 어린 마음에 목사가 안 되려고 반항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좋은 교인이 되어 목회자를 힘껏 협력하여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목회자가 되어 그 동안 부교역자 시절 때부터 거쳐온 교회들의 모습을 돌이켜 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결론은 지상의 어떤 곳에도 완전한 교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가장 이상적인 교회를 향해 자라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꿈꾸는 좋은 교회상이 있습니다.   신학을 시작하면서 마음에 그리던 교회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변화된 삶의 간증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의 말씀이 바르게 전달되어 삶이 바꾸어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그저 사람만 많이 모여 인간 냄새만 풀풀 나고 모난 인간성이 판을 치는 모임은 사교클럽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보다 그 사람들의 삶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열매들이 있어야 좋은 교회입니다.  

 두 번째는, 화목한 가정처럼 성도들 사이에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정입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교우들이 모여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웃에게 칭찬을 듣는 교회입니다.  예배당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지역주민 이웃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예수쟁이들은 말만 그럴듯하게 잘하고 자기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부끄러운 말 안 듣는 교회, 밖으로도 소문이 좋아야 정말 좋은 교회입니다. 

   이렇게 좋은 교회의 모습을 나열하고 보니 결국은 저만이 아니라 모든 목회자들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고 또 교인들도 원하는 이상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교회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얼마나 있을까요?    어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상대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좋은 교회’에 대한 생각도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라는 자부심으로 신앙 생활하는 행복한 교인이 있고, 반대로 불행한 교인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교회는 우리가 힘써 이루어가야 할 교회의 모습이고 그 좋은 모델은 다른 어느 곳보다 성경에서 찾아보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기준이 됩니다.

   이번 수련회에서는 그 좋은 교회의 모델을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찾아봅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할 때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던 중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박해가 심한 데살로니가를 떠나 고린도로 왔던 바울은 교회에 남겨두고 온 초신자들의 신앙에 대하여 많이 염려를 하였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많은 반대와 핍박이 있는 환경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받은 복음을 잘 지키며 자라고 있을까 걱정되어 제자 디모데를 그곳으로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의 보고를 받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믿음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감사가 넘쳤습니다(딤전 3:1-10).  그래서 바울은 이 교회를 칭찬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이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갈 수 있도록 교훈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교회로서 갖추어야 할 좋은 점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뻤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나왔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이 기쁘고 듬직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소문이 안 좋아 듣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점이 좋았을까요?   그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이 균형 있게 자라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교회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소중한 덕목입니다.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는 이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 강조되면 건강이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한편으로 치우친 교회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랑만 강조하고 믿음과 소망이 부족하거나, 믿음만 강조하고 사랑이 없으면 건강한 교회로 자랄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교회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으로 그치고 맙니다.   1장 3절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이 좋은 교회였다.   그 교회 성도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교회로 칭찬을 들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들을 때‘아멘’을 잘하면 될까요?   열심히 일하면?  선한 마음을 가지면?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알면?   이 모든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 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가지만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서로 조화되어 삶에서 드러날 때 믿음이 증거됩니다.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아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결국 한 믿음으로 만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고백은 입술로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삶에서 증명이 되어야 정말 믿음이 됩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 말씀을 듣고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이 듣는다고 저절로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고 노력하며 결국에는 나의 삶에서 변화가 나타날 때 비로소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은 어떤 점에서 믿음의 열매가 나타났습니까?   바울과 그 일행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 그들을 본 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1:6-10). 그리고 다른 지방의 교인들에게도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믿음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이 넘쳤던 바울입니다.   이 사람들은 전도자가 전한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2:13).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1:9-10에, 그들은 환란 중에 복음을 받았습니다.   우상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증거가 있습니까?    

  어떤 학생이 학교에서 기말 평가서를 받았습니다.   학과목 성적과 함께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생활 태도를 평가하였는데, 교사가 학생에게 무엇인가 협조를 요청하면 선생님 앞에서는 정중하게 ‘예’라고 대답하는데 생활에서는 전혀 행동으로 보이질 않아 매우 실망스럽다는 평가였습니다.   정중하게 대답만 잘하면 좋은 학생이 아니라 대답한 대로 실천으로 옮겨야 정말 좋은 학생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대로 살기로 힘쓰고 있습니까?   

  이번 수련회에서 이단종파를 연구하기로 하는데,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교주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그대로 믿고 따르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리로 알고 믿고 따르는 열심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그 교리를 따르다 패가망신을 합니다.  물론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지만 그들에 비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른다는 우리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 살펴봅시다.  좋은 교회는 진리를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처럼 믿음의 역사가 있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입술고백으로만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있는 믿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이 좋은 믿음은 ‘사랑’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믿음을 실천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어떻게 실천합니까?   곧 사랑을 주고받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사랑은 바울과 전도자들에게 먼저 배운 사랑이었습니다(2:8-9).  바울은 교우들을 위해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 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의 리더들이 이 일에 더욱 힘을 써야 할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책임이 큽니다.  목사와 장로와 중직자들, 먼저 믿은 사람들이 힘써야 할 모습입니다.   보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 또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앞장 선 사람들의 사랑이 교인들의 본이 되었고 그것을 배운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사랑을 나누는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이런 사랑을 배운 교인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사랑을 공급하였는데 3:12을 보면,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9-10을 보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난을 받는 형제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돕는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어려움 당한 형제들을 위하여 풍성한 연보를 준비하여 보냈으며’(고후8:1-5), 사도행전 24:17을 보면, 그들이 고난 중에 받은 은혜를 따라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보낸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은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으로 베풀며 나누는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좋은 교회는 이런 사랑이 풍성한 교회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남을 위하여 나의 시간, 물질, 정보를 즐거이 나누는 행동이 따르는 삶이지 ‘사랑합니다’ 이런 노래만 열심히 부른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동반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우리를 살펴보는 수련회가 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3절).   초대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어떤 박해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이 모든 환란과 수고는 마칠 것이라는 소망 중에 오늘의 고통을 참고 견디던 성도들이었습니다(1:6,10; 2:14; 3:4-8; 4:13-18).   부활과 재림의 신앙을 가진 교회는 눈에 보이는 현세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교회입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자라가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이 말은 완전한 교회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보내면서 이 교회가 지금까지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자라가는 것처럼 계속하여 힘쓰고 수고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4장과 5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조목조목 기록하여 격려와 부탁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암송하는‘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유명한 말씀을 바로 이 교회를 격려하는 중에 하였습니다.  이미 좋은 소문이 각처에 퍼진 데살로니가 교회였지만 좋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계속하여 분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의 교우들입니까?   우리는 지금 세상을 향해 어떤 소문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이번 수련회에서 이단종파 비판에 대한 시간을 가집니다.  왜 이런 이단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는가 이단 발생의 이유를 연구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회적인 면입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사회가 불안하고 전쟁과 자연 재해 등으로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하여 사회불안에 대한 절망감을 고조시키면서 자신들이 제공하는 ‘피난처에 대한 희망’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의 문제입니다.  모든 이단은 교회에서 시작을 합니다.   이단의 창시자나 교주들은 모두 기존교회에 있던 성직자 혹은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탈하여 자기들만의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몰몬교 창설자 죠셉 스미스 2세는 열성적인 감리교도였고, 안식교 윌리암 밀러는 침례교인이었으며, 여호와의 증인 창설자 러셀은 회중교회 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전도관 박태선, 통일교의 문선명도 처음에는 교회에서 장로 또는 집사로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단 연구가들이 정리한 내용을 보면, 기존 교회들의 제도적인 부패와 타락,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사상으로 교회와 교인들이 말씀의 표준에서 이탈하여 방황할 때 이단이 틈을 노려 일어납니다.   교회의 극단적인 폐쇄성과 율법주의적 신앙생활 신앙생활에 대한 반발로 발생합니다.   

  교회의 물량주의, 업적주의, 개인주의, 경쟁주의, 권위주의를 보일 때, 그리고 극심한 분열주의는 병든 사회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기는커녕 도리어 실망을 주는 역기능을 하게 될 때 이단이 기승을 부립니다.   교회가 사회의 약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친근하게 다가가지 않고 안식처가 되지 못하며, 도리어 대형화되고 특정 부류들만의 모임 또는 중산층 중심의 종교로 변할 때 고통 받고 억눌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픔을 알아주고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단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기존 교회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복음을 왜곡하며 교회를 분열시키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런 병적인 이단들의 모임은 바른 신앙을 가진 좋은 교인들이 자기 자리를 바로 지키며 믿음생활에 힘쓸 때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바른 신앙을 소유한 좋은 교인들이 행동하는 믿음을 나타냄으로 좋은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전해야 하고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도록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힘써야 할 모습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이런 면에 중점을 두고 말씀을 나누기로 합니다.   우리는 이런 좋은 모델을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찾아봅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고, 사랑에는 수고가 있었으며, 장차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는 참고 견디는 인내가 있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주일 아침에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좋은 교회 바른 신앙에 대하여 계속 말씀드립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그 속에 칭찬과 감사의 고백과 사랑하는 교우들을 보고 싶은 사랑을 가득 담았습니다.    그들의 좋은 믿음과 삶이 계속 발전되고 성장하기를 당부하며 격려하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서 가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얼마 가지 않아 그 교회 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주의 강림에 대하여 오해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곧 오신다는 긴박한 기대감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등한히 하고 잘못된 종말신앙으로 교회를 혼란으로 이끌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바울은 심히 염려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잘 나가던 직장도 그만 두고 학교도 내던지고 세상 끝 날이 가까이 왔으니 종말을 대비한다고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생겨나 사람들을 불안과 혼란으로 몰고 갔습니다.   자기들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면서 믿음생활 하고 있는 이웃들에게까지 잘못된 영향을 미쳐 교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두 번째 편지를 보내어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안심시키고 또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고 믿음을 굳게 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주님 오실 때 성도들이 주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하여 오해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교정합니다.   누군가 무슨 영적인 계시를 받았다거나 말로 들었다거나 혹은 우리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는 거짓말로 주께서 이미 재림하셨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해서 쉽게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에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그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끝 날이 이르면 먼저 미혹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도 이 점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먼저 징조가 있고 그 후에 주께서 오십니다.   어떤 징조입니까?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배도하고 미혹하는 자들이며 불법자, 멸망의 아들, 대적하는 자요 악한 자들입니다.   능력과 표적도 보이며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구원을 얻지 못할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제 신천지 이단을 비판하는 시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단들은 나름대로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습니다.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를 틈타 위기감을 고조시켜 사람들의 불안감을 더 부추깁니다.   자기들만 뭔가 보고 들었다고 하면서 특별한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성경을 자기들 편리한 대로 억지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기존 교회들을 무조건 부인하며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단을 이끄는 교주들은 저마다 자신이 재림주, 메시야라고 하면서 자신을 신격화하여 절대 복종하도록 강요합니다.   결국 그들은 속이는 자들이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이 없는 가련한 자들입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멀쩡한 사람들이 빤히 보이는 이런 어리석은 가르침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거짓을 믿고 따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 이유는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심판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기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가라지를 남겨두십니다.   농부들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랄 때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을까 염려가 되어 둘 다 완전하게 자라 구분이 명확해질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런가 하면 가라지가 좋은 식물 가운데 있을 때 식물들이 가라지와 생존경쟁을 하면서 튼튼하게 자라가기 때문에 알곡의 연단을 위하여 가라지를 그냥 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추수 때가 되면 결국 알곡은 거두어 곡간으로 들이지만 가라지는 뽑아 불에 던져지고 맙니다.   멸망의 때를 위해 다만 그 심판이 지연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택하여 거룩하게 하셨고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을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그들을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사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지금 환란 중에 있는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고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는 미쁘신 분이시므로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바울은 교우들이 지켜야 할 행동규칙을 명령합니다.   바울이 명하는 행동규칙을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좋은 덕목과 더불어 살펴봅시다.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떠나라(살후3:6)고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세상의 종말이 왔으니 이 땅의 일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고 자포자기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라 책망하였습니다.   세상이 끝이 났다고 하면서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시간만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먹어야 하는데 일하지 않은 사람들은 먹을 양식을 준비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며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 시작합니다.    일은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일거리만 만드는 꼴이 되었습니다.   본래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신 입을 부지런히 놀리기 마련입니다.   남들은 일하고 있는데 게으른 자들은 한가하게 앉아 말로 대신합니다.   그리고 시끄러운 분쟁을 일으키는 역할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세상 종말 운운하면서 선지자 노릇이나 하려 들고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며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거짓말쟁이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거든 그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여 그 말씀이 명하는 길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을 발견하였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즉시 그 길을 떠나야 하고 악한 자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바울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3:13)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 가혹한 핍박과 고난 중에 서로 격려하며 주께서 약속하신 것을 참고 기다리는 소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이 고달플수록 사람의 마음이 쉽게 상처받고 지치고 피곤해지기 마련입니다.   고난 당하는 이웃과 가난한 형제들을 보살피고 베풀며 사는 일이 계속 반복되면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지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소망이 없이는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도중에 섭섭한 마음도 생기고 억울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잘해줘 보아야 고맙다는 말은 없고 돌아오는 것은 오해와 비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얼마든지 만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꼭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말씀을 따라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선을 행할 뿐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는 말씀을 의지하고 오늘도 주께서 주신 능력으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오십니다.   

  한편으로 바울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거든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혹하는 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진리로 바르게 권면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책임이지만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계속하여 어리석은 길로 행하거든 더 이상 가까이 하지 말고 교제를 끊어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부끄럼을 느끼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왕따를 당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사람을 원수처럼 여기고 미워하지 말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형제처럼 타이르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그가 돌이켜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도록 그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랑은 잃어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종말신앙과 미혹하는 사람들, 진리를 떠난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대처방안을 제시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 안에 굳게 서갈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미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그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께서 다시 오실 그날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바른 신앙으로 좋은 교회를 세워갈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d좋은 교회는 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모입니다.   바른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갑니다.   우리가 매주일 모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들이 말씀 안에서 믿고 따르는 바를 고백한 사도신경을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한 신앙고백으로 하나가 된 믿음의 가족이고 사랑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비한 역사를 제거한 기독교와 교회를 말할 수 없지만 주님의 교회는 기적이나 신비한 체험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는 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우리와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 믿음 고백처럼 살기로 서약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가입이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감사하고 축하할 기쁨의 날입니다.   오늘 예식에 임한 형제자매들의 믿음이 날마다 자라가고 또 성숙한 성도로서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삶의 기초를 세우고 바른 신앙을 가진 좋은 교인으로서 좋은 교회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리라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바른 신앙고백으로 죄악 세상을 이기고 믿음, 소망, 사랑의 공동체로서 주님 오실 그날까지 주께 받은바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하는 사명을 힘있게 감당하는 아름다운 교회 좋은 교회로 자라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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