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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노로부터의 자유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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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로부터의 자유 (요나 4:1~11)

일노일노(一怒一老)요, 일소일소(一笑一少)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한번 화를 내면 하번 늙어지고 한번 웃으면 하번 젊어진다는 재치 있는 속담입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던 화병이 미국 정신 의학 회에 정식 의학용어으로 공식 등록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한국 사람에게만 있는 병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병이 되었습니다만 화병이 무엇이냐 하면 분노증후군이라고 하는데 분노의 억제로 인해 발생하는 병입니다. 

바이올라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노만 라이트(Norman Wright)]는 지나친 분노는 메스꺼움, 위궤양, 변비, 설사, 옴이나 가려움증, 천식과 같은 호흡장애, 관상동맥 혈전증의 원인 및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 그 자체를 죄악으로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임과 동시에 때로는 의로운 분노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에는 크게<자학적 분노>와<타학적 분노>가 있습니다.<자학적분노>란 화가 나는 원인이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 머리를 쥐어뜯거나 가슴을 치는 등 자신에게 학대를 가하는 분노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분노는<타학적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가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나쳐서 때로는 분명히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타인에게 표현하는 분노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분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화를 잘못 다스림으로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 앞에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드린 예물 중에 동생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나 형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굉장히 화를 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네가 왜 화를 내느냐?"고 물으셨고 가인은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동생을 들로 불러내다가 죽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분노가 왜 문제이냐하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냈다는 게 문제입니다. 히11:4절에 보면"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셨고 아벨은 인정받았지만 가인은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내 믿음이 부족했구나.'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생각도 없이 다짜고짜'왜 내 제사는 안 받고 동생의 제사만 받느냐'고 생각하며 성질을 부립니다. 이것이 일명<가인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직까지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어쩔 수 없는 기질입니다. 결국보세요. 

창4:10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책임을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느니라. 땅이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분노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다스리지 못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제 고집대로만 화를 내며 살았던 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에 불만을 품은 선지자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잘못되었다고 심판하기까지 하는 못된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요나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나라는 인물을 잘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는 믿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습니다. 요나에게 율법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스스로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기뻐해야 할 일에 슬퍼하고 잔치를 지내야 될 시간에 죽기를 소원하는 정말 못난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라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무작정 방치해야할 것입니까? 그래서 모세처럼 정작 누려야할 복을 빼앗기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요나를 통해서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는 통찰을 얻어야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북쪽은 이스라엘이고 남쪽은 유다입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에 앗수르라는 나라가 쳐들어와서 포로해 가고 또 돌아와서 잡혼을 하고 해서 아주 이스라엘을 망가뜨렸습니다. 그래서 이 앗수르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느웨성은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그 니느웨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실 수가 없어서 소돔 고모라와 같이 멸망시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당장 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사십일의 시간을 주되 그 안에 회개를 하면 살려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요나 선지자를 보내서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을 잘 압니다. 자기가 가서 외쳤다가 만일에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안 망하게 하실 분임을 아는 겁니다. 

요나 입장에서는 원수 같은 니느웨가 회개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망해 버렸으면 좋겠는데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시키는 것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안가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배가 엎어져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있다가 물고기가 토해버리는 바람에 니느웨 성으로 직행을 하게 됩니다. 

이제 꼼짝 못하고 니느웨 성에 왔는데 그때까지도 마음에는 시큰둥하게 그냥 길거리를 지나면서"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는 말만 딱하고 맙니다."회개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신단다."뭐 이런 말은 하기 싫어서 안 합니다. 이것이 믿음은 있으나 사랑은 없는 전형적인 요나의 모습니다. 

자, 그런데 보세요. 놀라운 것은 그 한마디에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재를 무릅쓰고 다 회개했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이제 요나가 못마땅해 하면서 화를 냅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뿐만 아니라 괴로워하고 죽기를 소원하기까지 합니다."내가 이런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이런 꼴을 보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이러는 사람들 참 못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 요나가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생각, 내 뜻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요나는 구약의 탕자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탕자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멀리 도망치는 것에서는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니느웨성이 변화한 다음에 불평하고 화를 내는 모습에서는 큰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큰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나 역시 따지고 듭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큰 아들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화를 내고 있는 요나입니다. 

여러분, 분노의 감정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극히 내 생각 중심일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요나는 지금 자기 생각에 집착해서 자기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이 당한 굴욕을 잊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고'앗수르는 망해야 된다, 앗수르는 원수다.'는 집착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안 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네가 전에 나에게 그랬었지 너는 죽어야 된다"하는 과거에 매여서 용서하지 못하고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과거, 자기가 본 손해, 자기 민족이 당한 굴욕, 여기에 딱 붙들려 가지고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요나나 우리나 일반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요나가 화를 내면서 하나님을 심판까지 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나가 화를 내면서 하나님께 하고자하는 항의가 무엇입니까?"하나님, 잘못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흥하고 앗수르는 망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40일 후에 망한다 했으면 망해야지 망한다고 저는 심부름을 했는데 제 체면은 뭐가 됩니까? 하나님이 망하게 하겠다 하셨으면 망해야지요."참 못난 사람이지요. 하나님이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심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실상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심판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참 못마땅합니다. 하나님 왜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그럽니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 율법을 넘어서는 높은 긍휼하심에 대하여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라 하면 전하면 됩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요나가 주제넘었습니다. 오늘도 조용하게 내가 할 일 내가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까지 주제넘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도 하려고하고 안되면 화납니다. 여러분, 분노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할 일을 벗어날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자기 할 일만 잘하는 사람은 화 안냅니다. 남의 일까지 간섭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일까지도 넘보다가 스스로 분노의 감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라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성숙의 단계를 몇 가지로 말했습니다. 그 첫째 단계가 현실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 하신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이기심을 버리는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역사가 내 생활 속에 연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내가 있고 하나님의 큰 은혜 안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역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할 일은 이것뿐이요,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자기 한계를 확실하게 인정하는 순간 그 신앙생활은 온전히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나는 믿음도 있었고 수고도 많이 했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찬송을 불러야 할 시간에 절망하게 됩니다. 아직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또 원망과 불평으로 화를 내다가 끝납니다.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신다면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보고 자기를 버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여기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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