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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으로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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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으로 (요일 4:7~12)

세계적인 심리학자로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이며, 교육학 교수이며,  지능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 박사가 있습니다. 그 분의 유명한 저서인 ‘사랑의 기술’이란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사랑을 연구하면서 “사랑의 삼각형 이론”을 발표하였습니다. 사랑은 정삼각형처럼 삼각 균형이 잘 잡힐 때에 참 사랑이 가능하다는 이론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 요소는 친밀감(Intimacy)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친밀함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함께 있으면 평안합니다.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집니다.   서로 아껴주고 도와주고, 감정적으로 친밀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밀감은 10가지의 요소들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랑의 두 번째 요소는 열정(Passion)이라고 했습니다.    이성을 잃을 정도의 열정이 생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세 번째 사랑의 요소에는 서로에게 헌신하리라고 결정(Promise and Responsibility)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삼각형의 구조를 이루어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한번 일독하면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됩니다.  아내가 실수한 것은 내가 실수한 것이요, 내 책임이 됩니다.  사랑은 곧 일체감입니다. 동일시하는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세 가지 요소는 상호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친밀감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상대방의 감정은 전혀 무시하면서 열정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헌신에 대한 결정만이라면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이 식어지고 메마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도 참으로 귀한 축복이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게 하고,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것입니다.  만일 사랑하는 아내가 없고, 사랑하는 남편이 없다면 이 세상은 견딜 수 없는 삭막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일전에 ‘일곱 통의 편지’라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 살고 있는 ‘헌틀리’ 부부는 큰 사고로 버려진 장애아를 잠시 맡아 길러주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정이 들면서 그 아이를 양자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입양 신청서를 받아 입양을 허락하고 결정해주는 담당판사님은 헌틀리 부부가 이미 60세를 넘긴 노인이 되었고, 맡아 입양하려는 아이는 정상아도 아닌 장애아였기에 계속해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안 된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헌틀리 부부는 판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자기들은 충분히 아이를 키울 수 있으며, 장애아지만 정상아보다 더 잘 돌볼 것이라고 간절히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판사는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만약 헌틀리 부부의 자녀들이 모두다 재산 상속을 포기한다면 아이의 입양을 허가하겠습니다.    그러면 헌틀리 씨와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셔도 아이의 장래는 보장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했던 헌틀리 부부의 일곱 자녀들은 모두 입양된 아이들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장성하여 제 길을 찾아 떠난 뒤였습니다.  

이 부부는 그동안 검소하게 살면서 땅과 집, 그리고 얼마의 돈을 저축할 수 있었으며, 사후에는 장성한 자녀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기로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헌틀리 부부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이제 입양할 아이에 대하여 자세하게 적고는, 모든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면 법적으로 장애아지만 아이를 입양할 수 있다는 말을 기록하였습니다.   

헌틀리 가의 네 번째로 입양된 ‘잭’은 양부모의 편지를 받아들자 오하이오의 자기 집이 떠올랐습니다.  양아버지는 성실한 철도공무원이었고, 그가 가져오는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입양된 일곱 자녀들은 부모님을 사랑하였고, 형제들은 서로를 신뢰하였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행복하였고, 열심히 공부하고 성장하여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잭은 감사한 마음으로 편지를 띄웠습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어서 빨리 우리의 새 동생을 보고 싶군요.” 재산상속을 포기하겠다는 잭의 편지가 헌틀리 부부에게 도착했을 때 헌틀리 부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섯 명의 자녀들로부터 모든 재산을 이번에 새로 입양될 아이에게 상속하는데 동의한다는 편지를 받아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60세가 넘은 노인 부부가 장애아를 입양하여 남은여생을 장애아의 부모로서 사랑을 쏟으며 최선을 다하여 양육하겠다는 것이 정말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고로 버려진 장애아라고 하여도 당당히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온 식구들이 장애아를 한 식구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충격적인 감동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아는 상식을 말하며, 지적능력을 동원하여 지성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사람을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을 잘 한다’, ‘야! 참 똑똑하다’, ‘교회에 들어가면 배울 것이 있겠구나.’ 하지만 “나는 안 믿는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는 교회 안에서만 이해되고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 은혜, 믿음, 소망, 구원, 의, 영광, 감사 등등 그런 좋은 말들이 교회 밖에서는 가식으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나치 독일에 의하여 순교한 본 회퍼는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안 믿는 사람들이 알아들 수 있는 언어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A라는 문법으로 말을 하고 대화를 하는데, 우리 교회는 B라는 문법만 고집하고, A라는 문법을 알려고 아니하고,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지적하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불신자가 모처럼 마음을 비우고 기독 신자들과 이야기를 하려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말합니다.  “기독교인- 당신네들은 왜 알아들 수 없는 당신들의 언어로만 말을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믿음의 언어를 이 사회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랑의 언어로 말을 할 때에, 저들은 사랑의 언어를 들으면서 믿음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는 논리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의 언어는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을 깨드리기고 합니다.  사랑의 언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몸짓이 있고, 자기 헌신이 있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사랑의 언어에 속합니다.  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고, 끝까지 돌아보는 것은 사랑의 언어에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요한일서에서 택하여 보았습니다. 

요한이라는 사도는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사도요, 베드로는 소망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요한이 참으로 인간답기도 하고, 닮고 싶은 좋은 사도입니다. 그는 자기를 부를 때에 “주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말하면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자기가 드러나야 하는 자리에 있을 때, 자기의 이름을 쓰는 대신에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아마도 사도요한이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보여집니다.  

주님이 부활했다는 말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들은 요한은 베드로 더불어 무덤에 달려가는데 먼저 달려가 도착한 사람이 사도요한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셨을 때에 사도 요한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라고 말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받은 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도요한만을 사랑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13:1에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만을 사랑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다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실 때에 모두 사랑하셨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나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십자가 앞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같던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를 부탁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음성을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 우리 주님의 사랑을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감사하여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은 은혜를 받고도 큰 사랑으로 갚아드리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요19:26-27에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요, 인정이 있고, 사랑이 넘쳐나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자기를 생각할 때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어머니를 모셔달라고 부탁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 알고 평생 모셔달라는 부탁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로 알고 모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도 그것을 사랑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을 강조하실 때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면 그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미워할 사람은 하나도 없고, 무두다 사랑할 사람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까?   

요일3:18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7-8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간결한 문장으로 하나님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속성이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하는 설명은 참으로 좋은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시작이요, 마지막이 되십니다.  그것은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때에 가장 좋은 말이 그 분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9-10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세상에 더러운 죄를 구원하려고 자기 아들과 바꾸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3:16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성경의 요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이 직접하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사도요한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바로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예전에도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하심은 자신을 희생하시고 양보하시는데,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1:12-13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신앙고백을 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하십니다.    요13:35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의 요한일서 강해에서 “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판별하는 궁극적인 시금석이 서로 사랑하는 문제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시금석(Touchstone)이란 말은 “경도가 높고 검은 빛깔의 돌인데, 귀금속의 순도를 판정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귀금속의 순도를 알아볼 때 시금석에 문질러보아 순도를 판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금석이란 말이 상징성을 가지면서 전의 되어 어떤 사물의 가치나 어떤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만한 사물이나 일을 시금석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이냐,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냐 하는 것을 판정하는 잣대가 되고 시금석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요, 주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 아니요, 주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고전13:1-3에서“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정말 영광스럽고 능력이 있는 것이지만, 그 보다 더 깊은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1936년 12월 11일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저는 황태자로서, 그리고 국왕으로서 25년간 봉사했던 국가와 제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후원 없이 왕으로서 내가 원하는 대로 어려운 책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오늘로 국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남기고 왕위에서 포기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구축함을 타고 미국으로 가서 심프슨 여인을 데리고 와서 프랑스에서 결혼하고 일생을 윈저공이란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심프슨 여인의 세 번째 남편으로 만족하면서 그와 함께 일생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희생, 하나님의 양보, 하나님의 낮아지심,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오래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인내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이 지은 인간이 되었고, 죄인이 죽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영국의 왕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얼마나 사랑하신 것입니까?  어거스틴의 말을 잘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데 천하인간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너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나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언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귀한 것은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귀한 존재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사랑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받은 사랑을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헤아려보셨습니까?  

사랑의 사람은 수용을 잘 합니다.  사랑의 사람은 관용합니다.  사랑의 사람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죽겠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사랑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족 모든 형제들은 사랑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도 사랑할 사람들입니다.  지금 힘들게 살아가고, 장애를 입은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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