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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 근심, 좌절, 메마름이 없는 삶 (요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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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근심, 좌절, 메마름이 없는 삶 (요 15:1~8)

  지난 특별 새벽 기도회 중에 한 부인이 기도 받으시러 나오셨기에 무슨 기도 제목이 있으신가 물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저도 한번 행복한 삶을 살아 볼 수 있을까요?” 하시면서 눈물을 주루룩 흘리셨습니다. 그 마음에 ‘영원히 지금처럼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기도 중에 성령님께서 그 부인의 마음에 놀라운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알기만 해도 너무나 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지요? 이런 질문에 당황스런 분이 혹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메마르고, 두려움과 근심과 좌절의 삶에서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이제는 모든 사람을 사랑만 하며 살리라!’ 결단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라고 하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근심, 좌절과 메마름은 우리 자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지고 재산이 많아도 두려움과 근심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두려움과 근심이 없습니다. 평안과 기쁨과 사랑이 충만하십니다. 강과 같이 흘러넘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림의 떡이 되면 안됩니다. 살다 보면 그림의 떡과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수 믿고 받는 변화된 삶의 축복만큼은 절대로 그림의 떡, 말로만 들은 축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가? “나는 예수 믿습니다.” 하는 말만 가지고는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 12:33)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2절)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마 3:10) “...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나요?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였기에 ‘어떻게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며, 나는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을 사모하라, 예수님을 닮기 힘쓰라는 말씀인가요? 

그러나 이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신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에 이어진 것을 알면, 곧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과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 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가 가지라는 말은 예수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가 새 생명,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의 기도는 다 응답되는 것입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전에는 내 소원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을 때는 그 기도가 응답받을 수가 없습니다. 응답 안 받는 것이 차라리 잘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 그저 내가 떼쓴다고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이 떼쓴다고 다 들어주십니까?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내 생명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니 다 응답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웨스트코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참 제자의 기도는 그리스도 말씀의 산울림이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말한다. 그들의 기도는 주께서 교훈하신 말씀이 기도의 형식으로 변화한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응답받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과 하나된 사람의 기도가 이런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믿으면 되는 것이지만 믿는 것이 어렵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정말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되는데, 이제는 믿는 것이 또 어려우니. 어떤 성도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소리 소리 질러 구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그렇게 어렵게 몸부림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믿어져야 되는 것이지, 내가 믿으려고 몸부림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믿는 것일까요?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들었을 때 그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지만,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예수님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교우들을 봅니다. “이제부터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기뻐하려고 노력하라! 평안하려고 노력하라!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귀하지만 정말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계속 두려움과 좌절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는 더 메말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두려움, 좌절, 영적인 메마름은 우리 자아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너무 힘들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어렵다!” 고 말하면서 좌절하거나 적당하게 살 수 밖에 없다고 타협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열매는 우리 노력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예수님이 친히 그 엶매를 맺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사실을 오직 믿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 옛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도록 하나님이 다 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도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도 이미 하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받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으라” 하니 믿는 것도 힘들다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안된다고 말합니다. 많은 교우들이 “죽는 것이 안된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고 합니다. 믿음은 믿으려고 몸부림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라는 말은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고 소리쳐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행하셨다는 일을 알았다면 그저 “주님이 그리하셨으니 종은 감사할 뿐입니다. 주여, 저는 오직 찬송하겠습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5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믿는 것을 예수님은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거한다는 것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앉아계신데 힘드십니까? 앉아있으려고 몸부림치시나요? 아니지요. 그냥 편안하게 앉아있는 것이지요. 

똑같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 안에 계시지요?”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바로 그 말입니다.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테일러는 1869년 좌절과 낙심으로 쓰러졌었습니다.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경건한 생활을 열심히 하면 서서히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애쓸수록 더욱 거룩하지 못한 자신을 보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는 한 순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압감 때문에 오히려 너무 신경이 예민해져서 주위 사람들에게 더 자주 화를 내었고 말도 거칠게 하는 자신을 보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금식하고, 결단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시간을 더 많이 가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믿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믿으려고 애썼지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으나, 저녁에 돌이켜 보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슬퍼해야 할 죄와 실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좌절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녕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그는 절망했습니다. 나의 체험이 그렇지 않은 데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다.”고 진지하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이러니 쓰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친구 멕카디(McCarthy) 선교사로부터 온 편지에 담긴 한 문장이 허드슨 테일러의 눈에서 비늘을 제거해 주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신실하신 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문장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빛으로 다가 왔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 분께서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믿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그 분께서는 변함없이 신실하시다.” “오, 거기에 안식이 있구나!” “그 동안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기 위해 헛되이 애써 왔구나. 이제 결코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나와 함께 거하시겠다고 -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결코 나를 저버리시지 않으시겠다고 -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그것이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포도 나무와 가지에 대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 뿐 아니라 내가 그 분의 몸과 살과 뼈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보았다. 

  그는 이후에 더 이상 염려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더라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또한 부활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이 빛을 본 이후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죄를 범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낀다. 게다가 빛 가운데를 걸으면 걸을수록 나의 양심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내 안에서 죄는 끊임없이 나타났지만. 나는 즉시 고백했고, 항상 용서를 받았다. 완전히 고백을 하지 않고 자아를 정당화 하려고 시도했던 때의 몇 시간 동안 화평과 기쁨이 돌아오지 않았던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화평과 (겸손이 함께 한) 기쁨이 즉시 회복되었다.“

허드슨테일러가 체험한 것은 소수의 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단계 중에 은혜를 받는 단계가 있고 주님의 영광을 보는 단계가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만 받는 단계에서는 죽음은 힘들어 보입니다. 죽음이 이해가 안되고 죽는 것이 어렵고 ‘꼭 이래야만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깊이 알아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열리고 나면 죽음도 죽느냐 안 죽느냐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내가 죽으므로 처리가 되어버려요. 주님의 영광을 보는 단계로 나아가면 죽음은 즉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영광스런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영광스런 하나님을 보는 순간에 이사야는 그냥 죽은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의심했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그러나 막상 영광스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하며 고꾸라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강렬한 빛 가운데서 영광스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9:3) 하셨을 때, “땅에 엎드러져 ...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 우리는 즉시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서 우리에게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진짜 예수님의 영광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8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지난 주 제게 온 선교사님의 보고 편지에 중국 홍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으로 부름을 받고 사역하다가 여러 번 공안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처음 체포될 때는 정말 두려웠다고 합니다. 중법죄인 취급을 받으며 벽에 세워져 사진을 찍는데, 너무나 마음이 참담하고 두렵더랍니다. 바로 그 때 앞의 카메라 렌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감사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더랍니다. ‘이 일이 곧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이시구나!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구나’! 이것을 깨닫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너무나 평안해지더랍니다. 그리고 취조를 받는데 조사 내용이 오히려 전도가 되어서 조사를 맡은 공안이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직원과 둘도 없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면 깨끗한 삶을 살게 됩니다.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기 전에는 깨끗함에 대한 욕구가 적습니다. 깨끗함의 중요함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깨끗함이 삶을 즐기거나 성공하는데 거추장스런 장애물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욕구가 깨끗함입니다.
세상 영광도 깨끗함을 요구합니다. 공직자로 천거된 이들 마다 자신에게 그런 귀한 기회가 올 줄 알았다면 좀 더 깨끗하게 살 것을 하고 후회합니다. 요즘 인사청문회를 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자리에 서다 보니까 과거가 다 드러나서 지난 날 과거에 더러웠던 일, 남에게 숨기고 싶었던 일들이 깨끗하게 되었으면 하는 소원이 얼마나 강하게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을 위한 영광의 자리가 마련되었다면 깨끗하게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 가고 싶지 않습니까? 천국에 하나님 앞에 갈 때 무엇이 가장 큰 소원이겠습니까? 깨끗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깨끗함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3절)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얼마나 더러운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모를 때는 죄인 줄 몰랐는데, 하나님 말씀을 읽다 보니까 ‘아, 내가 불평한 것도 죄구나! 의심했던 것도 죄구나! 내가 원망했던 것도 죄구나!’ 다 드러납니다. 이렇게 죄가 드러난 것에 대해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고백하면 또 그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겨주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의 깨끗함은 죄를 안 지은 자가 아니라 자기 죄를 깨달은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또 하나의 역사는 우리가 회개하면 즉시 용서받아 깨끗하게 됨을 믿게 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여러분,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기를 꿈꾸시지요? 두려움, 근심이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치안이 잘 되어 있는 곳, 공기도 좋고 물도 좋은 곳을 찾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거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 가도 두려움, 근심, 좌절, 영적인 메마름이 해결되는 곳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진정한 평안, 치유,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의 평안으로 내가 평안을, 그의 자유함으로 내가 자유 함을, 그의 부유하심으로 내 영혼과 육신에 부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그러나 이것이 그림의 떡이 되면 안됩니다. 그저 그렇게 들었다고 넘어가도 안됩니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받는데, 이 성찬식은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성찬은 믿음으로 받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성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어떻게 받는가? “주님, 제게 믿음을 주세요!” 라고 하지 말고 “주님, 이 성찬을 받는 자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제가 이 포도주를 마실 때 주님의 피로 내가 씻김을 받았다고 하니 오직 저는 주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시간에 여러분과 예수님이 한 몸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었던 두려움과 근심, 여러분을 깊은 절망 가운데 빠뜨렸던 좌절이 떠나갑니다. 생수의 강같은 은혜가 메마른 마음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친구 되시니 
   그 은혜를 간구하면 풍성히 받으리 
        햇빛과 비를 주시니 추수할 곡식 많도다 
귀한 열매 주시는 이 주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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