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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하지 말라 (눅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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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눅 12:1~12) 

◈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수만 명이 모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모인 기록입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흥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이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좀 다른 모습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주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1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심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이 책망은 정신은 없고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남은 형식주의 믿음에 대한 책망이었다. 
겉모습을 중요하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환영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남들은 가르치면서도 자기들은 행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율법사들은 자기들이 가진 율법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책망을 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더 가까이 붙어서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눅 11:53-54) 『[53] 예수께서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몹시 앙심을 품고서, 여러 가지 물음으로 예수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렸다.』(표준새번역)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반대하고 핍박을 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 가지의 가르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가는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 외식은 진실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외식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것,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원하는 것, 다른 사람들의 죄를 판단하면서 자신의 결점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속은 더러우면서도 겉만 깨끗한 척 꾸미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척하고, 실제로 구제하지 않으면서 조그마한 구제를 할 때는 
나팔을 붑니다. 금식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합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 또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율법을 가르치나 자기들은 행치 않는 것, 이것들이 위선입다. 

㉡ 외식이라는 말은 배우와 같다는 말입니다. 
배우들은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꿉니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립니다. 배우들이 사랑을 하는 것을 보면 혼동할 만큼 멋있는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연속극 때문에 부부싸움도 많아지고 이혼도 많아진다고 합니다. 

저는 명성황후를 열심히 본 적이 있습니다. 제 관점입니다. 처음에 이미연이라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정말 잘했습니다. 언론에서는 명성황후의 혼이 씌었다고 까지 했습니다. 
저도 정신 없이 봤습니다. 그러다가 도중하차했습니다. 그 이유는 음주 운전을 하다가 단속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기는 연기일 뿐입니다. 배우에게 있어서 연기와 실제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보기에 바리새인들이 배우 같다는 것입니다. 
겉 모양은 좋은데 속으로는 부패하고 악합니다. 신앙 생활이 배우 같으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배우처럼 행동하다가 죽었습니다. 

◈ 예수님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제자들의 위선으로 망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을 제거하라고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2절에 있습니다. 
(눅 12: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인 신앙 생활을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위안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속마음을 감추어도 때가 되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십니다. 진실한 성도는 눈가림으로 신앙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이 어떠한가를 보십니다.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 한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귓속말로 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됩니다.
히브리서 4:13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리라”

성도 여러분 
이중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감추고 있으면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감추어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마음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주님은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한 것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이중적이고 형식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디서나 투명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투명한 삶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삶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온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찬송할 때 마음 중심으로 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만 의지하는 생활입니다. 
말씀을 배울 때 겸손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배우는 생활입니다. 

위선을 버리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투명한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을 꾸미는 신앙생활보다 내면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더욱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박해의 상황이 되어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①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나 무서움입니다. 
단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은 왕궁벽에 쓰인 글씨를 보았을 때 얼굴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힐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사울 왕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군대와 싸우기에 앞서 두려움을 미리 겁을 먹고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 그리고 웅덩이에 숨었습니다. 

② 동시에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의미합니다. 
(시 56:3-4)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다윗은 두려움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박해와 핍박의 사건은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영역은 인생에게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파괴할 수 있지만 그의 영혼은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영혼까지도 파괴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외식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중심과 겉이 다르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든 사람의 눈과 귀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아서라도 자기를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무조건 안 했다고 오리발을 내밀거나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엄포를 놓기도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 앞에 치사하고 비굴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떳떳하고 당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종이 되어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똑똑한 듯하나 멍청이의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멍청한 듯하나 똑똑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 -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관심 중에서도 가장 세밀하십니다. 
하나님은 군중 속에 있는 한 개인을 잊지 않으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이라고 합니다. 마태는 참새 두 마리에 한 앗사리온이라고 합니다. 다섯 마리에 두 앗사리온이면 한 마리는 덤으로 주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는 한 푼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라도 잊어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너무 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십니다. 
금발 머리는 약 14만 5천개, 흑발 머리는 약 12만개, 붉은 머리는 약 9만개라고 합니다. 
그리스 원문의 뜻을 살펴보면 그것들에 표시를 해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수를 세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은 나를 돌보신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섬세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서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도 아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할 일이 여전히 있습니다.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담대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꿇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이 땅에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두려워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이 되던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3. 박해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예수를 시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자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인정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8-9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생활을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쉽게 하지만, 
불신자들 앞에서나 예수님을 핍박하고 멸시하는 자들 앞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 라고 시인하는 일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나, 환난과 핍박이 오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이오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외침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우리를 시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난동을 보시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핍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려워 말라 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라고 하셨습니다. 

11-사람들이 저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서 심문을 당할 것이라” 
그러나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할까 염려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성령이 그때 그때마다 할 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12절 -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성령님께서는 핍박받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시고, 할 말을 가르치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거기에 합당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때그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핍박 중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예수님을 시인하라. 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시고 책임져주십니다.
이 말씀에는 더 담대하게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고 내가 주님만 두려워한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팀 라헤이 목사는 두려움은 커다란 죄이다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이기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잘해야 할 텐데, 내 자존심에 관한 것인데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이 모든 일이 다 자존심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합니다. 
① 두려움을 죄로 여겨라
② 당신의 두려움을 죄로 고백하라
③ 두려워하는 습관을 고치도록 하나님께 요청하라.
④ 성령 충만을 구하라
⑤ 두려움을 이기게 하셨음을 믿고 감사하라.
⑥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반복해서 외쳐라.

우리가 더 열심을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수시로 밀려오는 두려움을 오늘 말씀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참새 한 마리도 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영혼까지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를 지키시고 책임지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담대히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시인하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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