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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와 함께 하라 (눅 5: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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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 하라 (눅 5:33~38)

저는 오늘 33절의 말씀을 보면서 또 다시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우리 제자들도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타이타닉 조커가 생각났습니다.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호의 광경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위에 구명보트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타고 나가고 마지막에 구명용 보트의 자리가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다섯 명이 있으므로 네 사람이 떨어져 나가야합니다. 먼저 한 사람이 뛰어내립니다. 그 사람이 들었던 말은 ‘당신은 신사다’ 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영국 남자였습니다. 또 한 사람이 뛰어내립니다. ‘당신은 영웅이 될 거요’ 라는 말을 듣고 뛰어내린 이 사람은 미국사람입니다. 또 ‘이것은 법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뛰어내린 사람은 독일 사람입니다. 이제 두 사람이 남았는데 아무리 해도 이 사람들은 뛰어내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중에 아주 겁을 먹고 있던 남자, 절대로 뛰어내릴 것 같지 않던 일본 남자가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무슨 말을 듣고 뛰어내렸을까요? ‘남들도 다 합니다’ 라는 소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하는 바가 우리 제자들도 다 금식하고 기도하며 심지어 당신네들과 비슷한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다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하지 않습니까? 즉 당신은 왜 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종교행위가 세 가지 있습니다. 참으로 괜찮은 것인데 이 세 가지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구제입니다. 요즘은 힘들어도 조금씩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당시는 거의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즘과 상황이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제한적인 몇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좋은 미풍입니다. 

또 하나는 금식입니다. 그런데 구제와 금식은 같이 갑니다. 당시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면 내가 먹을 것을 먹지 않아야합니다. 내가 먹을 것을 먹지 않으면 음식이 남으므로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하면 구제하기 때문에 아주 실용적이고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굶고 있을 때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같이 갔습니다.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종교행위였습니다. 

유대교는 아예 금식하는 날을 정해두었습니다. 자주 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이라고 날짜를 정해놓고 이 날은 모든 유대교인들은 금식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나라에 중대한 사건이 있을 때 공식적으로 금식을 선포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도 기도를 선포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무현씨가 탄핵을 받았을 그때 우리는 노무현씨를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탄핵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혼란스럽지 않고 평화스럽게 이끌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과가 잘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큰 혼란, 난리는 없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인 비가 오래 오지 않아서 기근이 심할 때에도 모든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세 번째, 특별히 경건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규칙적으로 금식했으므로 습관이 되었습니다. 월요일, 목요일 일주일에 이틀 동안 금식했으므로 상당히 자주 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말하는 것이 이 세 번째입니다. 조금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기도하는데 당신은 왜 하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마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가지고 있는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도 다른 사람이 하면 다 하는가? 다른 교회에서 하면 우리도 해야 하는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기회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혼인잔치와 금식, 두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금식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공생애를 시작할 때 4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로 금식을 반대하지 않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금식에는 유익이 많습니다. 저도 요즘은 금식을 못하고 있지만 한때는 자주 했습니다. 

금식의 유익한 면 중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말씀드리면 첫 번째는 내가 즐기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는 훈련이 됩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오락 같은 취미활동을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아이들도 금식 자체만 가르치지 말고 이런 것을 가르쳐보면 다 알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요즘 아이들이 전부다 가지고 있는 오락 놀이기구 때문에 무역수지 적자의 중대한 요인이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들도 같이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이런 것들을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두 번째 유익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돈, 사람, 건강이 다 내 것인줄 알았는데 금식하게 되면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언제까지나 건강할 줄 알았는데 건강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굶으면 알게 되고 내 몸,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집이나 재산도 잠시 내가 빌려 쓰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산이든 교회에서든 어디서하든 금식해보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다 내가 소유한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소유당하고 있고 내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건강을 지키려고 건강에 끌려가고, 돈을 더 불리고 잘 지키려고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식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피차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금식을 하게 되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상당히 자유롭습니다. 

세 번째는 나는 무엇이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옛날에는 이것이 없으면 절대로 못살 것 같았는데 굶어보면 얼마든지 내가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 버릴 수 있고 다 떨어져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네 번째는 나도 대단히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도 포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유행가도 그대 없인 못산다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그냥 노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공통된 심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굶어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금식하면 내가 기왕에 받은 것이 얼마나 충분한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 좀 줄까?’ 라고 물으신다면 굶을 때는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보통 때는 가지면 가질수록, 배가 차면 배가 찰수록 욕심이 더 많이 생기는데 금식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됩니다. 자녀가 좀 부족해도 고맙게 느껴지고, 이전에는 내 남편, 내 아내를 다른 사람과 많이 비교했는데 이제는 그 사람 자체가 고맙게 느껴집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옛날에는 나 같은 인생이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세상사람 날 부러워하지 않아도 나 역시 세상 사람이 부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많이 가져야만, 높은 자리에 있어야만 멋진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멋진 것은 따로 있습니다. 금식하게 되면 이런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식에 있어서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본래 유익한 의미가 전혀 없는 금식입니다. 이런 좋은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서 많이 그러하고 예수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도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습관적으로 금식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 금식하는데 그것도 귀하지만 금식하는 날이 되면 미리 잘 먹고 저녁 6시가 지나면 무엇을 먹을까 그것만 생각합니다. 저도 금식할 때 그렇게 했는데 습관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내가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가지고 있는데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바리새인, 제사장, 목사 이런 직분 때문에 금식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도 그럭저럭 귀하지만 금식 본래의 의미와 가치는 누릴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요즘은 금식하면 별로 표를 내지 않지만 당시는 얼굴에 칠하고 다녔기 때문에 금식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금식할 때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에 숯으로 검정 칠하는 것 때문에 상을 받았으므로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럴 바에는 금식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주님께서는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7-18).. 평소와 똑같이 티내지 말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배경이 있습니다. 유대에서는 혼인잔치를 하면 신랑신부는 요즘처럼 신혼여행을 가지 않고 자기 집에 신방을 차렸는데 그 기간이 보통 일주일간이었습니다. 그 일주일동안 친구들을 초청했는데 잔칫날은 여러 사람들이 많이 오지만 이 일주일동안은 신랑신부의 친한 친구들이 함께 즐겼습니다. 그 때 신랑은 왕의 옷을 입고 신부는 왕비의 옷을 입고 친구들이나 당사자들은 왕, 왕비라고 연극을 하면서 잔치를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들이 일주일 동안 잔치를 즐기면서 무엇을 즐기는가 라는 것입니다. 물론 음식을 즐기는 것도 있지만 신랑을 즐깁니다. 요즘말로 하면 신랑신부를 즐기는데 당시는 항상 신랑위주였으므로 신랑을 즐겼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열 처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언제 올지 선포하지 않으므로 신부는 무조건 기다리도록 되어있습니다. 신랑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간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중요성을 높이기 위해서 밤 열두시에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말로 하면 신부친구들도 즐기는 것은 신랑이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고 아무리 신랑이 없으면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준비하면서 옛날 제가 어렸을 때 일을 하나 기억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저보다 약 3살가량 어린 질녀가 시집을 가는데 식을 끝내고 난 후에도 신랑친구들이 신혼부부를 보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랑 친구들을 붙들고 이야기하는 틈에 신랑신부를 빼내서 신혼여행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준비한 봉투를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저를 상당히 원망했습니다. 조카사위의 친구들이 돈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신랑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아무리 돈이 있고 음식이 좋고 맛이 있어도 신랑이 없으면 잔치는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빈약한 식탁이고 음식이 맛이 없고 음식이 떨어졌다고 할지라도 신랑, 신부만 있으면 즐거워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말씀을 이 배경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좋은 잔칫날 맛있는 음식, 신랑, 신부 다 있는데 거기서 금식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제 정신이겠는가 라고 말씀하시면서 금식하는 사람들도 도리어 같이 와서 즐기는 것이 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은 잔칫날이다 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신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뒤에 우리 주님께서는 본론으로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먼저 만약 낡은 옷이 떨어졌는데 이 낡은 옷을 살리기 위해서 새 옷을 잘라서 조각을 내서 붙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또 당시는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가죽부대에 저장하였습니다. 포도주는 가스가 나오므로 가죽부대를 오래 쓰면 가스 때문에 상해서 터지기 쉽습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가 나왔는데 헌 포도주 가죽부대가 있고 새포도주 가죽부대가 있으면 어디에 넣겠는가? 아깝다고 헌 가죽부대에 새포도주를 넣는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가죽부대가 있으니 거기에 넣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낡은 옷도 귀하고 헌 옷도 귀하지만 새 옷이 있는데 헌옷을 입으려고 새 옷을 찢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언제 터질지 모를 헌 가죽부대에 넣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새 옷의 시대, 새 가죽부대의 시대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새 옷이 생겼으므로 헌옷은 이제 버려라, 새 가죽부대가 있으니 헌 가죽부대는 버리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마지막 가장 중요한 결론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새 옷, 새 가죽부대, 신랑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전부 다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왔다 즉 예수가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정말로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봉사도 좋지만 봉사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입니다. 아무리 봉사가 중요해도 예수와 함께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예배당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당에 예수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입니다. 지금은 예수의 시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예수와 함께 하지 않고, 예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받지 못하고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그렇게 풍요로운 이 세상임에도 왜 이렇습니까? 예수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셨다고 하면서도 예수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보잘것없고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큰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으면서 착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이루어 나가고 있으면서 많은 것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이고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착각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예수와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예수의 시대, 예수의 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하면 실망했던 사람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게 길이 보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길이 보입니다. 그렇게 힘들던 일이 예수와 함께 하면 힘이 들지 않습니다. 인생의 주인이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 예수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풍요롭고 넉넉해도 재미도 없고, 삶의 의미도 없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하면 무언지 몰라도 삶의 체계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하면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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