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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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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1~7)

성경에서는 우리 인생을 향하여 나그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인생 여정을 나그네의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그 길 위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평탄할 때도 있지만, 때로 모퉁이를 돌아설 때면 왠지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퉁이 길을 빨리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길을 재촉할 때도 잇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잘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미래를 좀 더 잘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복병처럼 나타나 우리의 생각과는 점점 다른 길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일들 때문에 우리에게는 염려도 있고, 불안감도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인데 이 말씀이 기록 될 때 그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나 60대 정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절 13절에 보면 그가 지금 병상에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지기 전에, 내가 죽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 성군입니다. 그런데 의롭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 치고 주변에 정적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들은 다윗이 다시 소생할지, 소생하지 못할지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병색이 깊어지자 은근히 좋아했습니다. 하나같이 원수들은 건강하고 형통하여 다윗을 비웃으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이는 들고 몸은 병들어 대응할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향해 저주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입을 꼭 다물고 참았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내가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가 왜 이 모양이 되었지?'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화가 목에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부를 다시 한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부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마음을 줄 것도 못 되고, 내가 의지할 것도 못 되. 하나님,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할 자입니다. 하나님, 나를 받으시옵소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고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봤듯이 사람이 병이 들면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인생의 실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 세상을 보는 안목도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젊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이 나이가 들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것을 보게 되고, 그 동안 뒤에 숨겨져 있던 것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을 보는,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실패한다든지 위기를 만날 때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뀝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김재봉 장로님의 뜻하지 않는 사고로 커다란 충격에 빠져있습니다. 늘 겸손하시고 좌, 중을 훈훈하게 하셨고, 교인들에게는 예수를 믿으면 저런 모습이구나를 연상할 정도로 교회 안에 그 분처럼 닮기를 원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 번 성지 순례를 떠날 때 어느 분이 저에게 찾아오셔서 김장로님 경비를 자신이 부담하겠으니 꼭 장로님이 갔으면 좋겠다고 저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며 그 분에게 "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가"라고 물어보았습니다. 뭐, 대답이 분명하세요. "자신이 지금까지 신앙 생활 하면서 정말 닮고 싶은 분이라고, 그래서 삶에 최선을 다하시며 사신 어르신을 이번 기회에 여행을 보내드리고 싶다"고 할 때 목사로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참 누구에게나 자상하셨고, 또 부족한 저에 목회에 항상 격려하시고 도와주신 믿음의 어르신인데 차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 가닥 남은 생명의 거친 호흡을 하시다가 오늘 새벽에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살아가면서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누가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오고, 또 질병이 찾아올 줄 누가 알겠습니까? 갑자기 하던 사업이 순식간에 어려움을 당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측하지 못하는 문제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있어요. 이것을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에 세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면서 어떤 때는 우리의 심령이 방황할 때 있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의 사로잡혀서 주저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본문의 다윗처럼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고 안목을 바꾸어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새로운 비상을 체험해야 합니다. 지금 다윗에게도 고난의 파도가 자신을 거세게 덮어오는 현실 앞에서 세 가지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생각할 것은 4절에 다윗이 고백한 "나의 종말과 연한을 알게 하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허무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나무들을 잎이 다 떨어집니다. 얼마나 춥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나무들은 백년을 살고 이백 년을 살고 몇백 년을 사는 나무들도 있지만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영원하지만 마치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우리들은 금방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존재입니까? 

일장춘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몸이 나른해서 점심이라도 먹고 나면 식곤증이 자신도 몰래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살짝 조는데 그 잠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 짧은 시간에도 깊은 꿈을 꾸지 않습니까? 꿈에서는 일확천금을 얻어 커다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수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뿐 깨고 나면 한바탕 허망한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래서 봄날에 꾸는 꿈같은 인생이 일장춘몽입니다.

지금 다윗은 5절에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윗이 한 60년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지금 앞으로 남은 인생이 몇 년이나 될까 손가락을 세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도대체 내가 한 생을 살았다고 하는 데 그것이 고작 한 뼘에 불과하구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길이를 잴 때 기본 단위는 한 뼘이었습니다. 다윗이 병상에서 새삼스럽게 이 사실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 아무것도 아니구나!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굉장한 인생을 산 것 같은데, 나의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별 것 아니구나. 한 뼘뿐인 인생,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겠구나.' 다윗은 자신을 정확하게 직시했습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 가운데서 5절 중간을 보면 묘한 뉘앙스를 줍니다.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누구에게나 든든하게 서 있는 것 같이 늙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고, 잘못되지도 않을 것 같은 전성기가 있습니다. 그 때가 든든히 선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춘을 자랑하는 때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과시할 때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여 명성을 떨칠 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기가 세운 기록이 깨어지는 날이 오고, 명성도 사라지고, 공로도 잊혀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릴 때만해도 가지고 못 가진 것 때문에 또 배우고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얼마나 열등감에 허우적거렸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요즘 여자가 나이가 들면 40대가 되면 그때부터 '얼마나 배웠는가?' 하는 것이 무너지게 되지 않습니까? 또 50대가 되면 '얼마나 예쁜가?' 하는 것이 무너지게 되고, 60-70대가 되면 '얼마나 잘 사는가?' 하는 것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사실 세상에서의 자랑은 그 때뿐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이름만 대도 알만한 대단한 목사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한참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그 설교 한 마디를 들으려고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박력 있고 영감이 넘치는 설교 말씀 앞에 모든 청중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새 사람이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나왔고 기념관도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20년, 30년이 지나고 난 후 과연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그 메시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메시지를 듣고 감동하던 청중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가 남겨놓은 책들은 지금쯤 고서가 있는 곳에 가서 뒤져야 발견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분을 기념해서 세운 탑, 집,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중에는 관리할 사람조차 없어 먼지가 앉는 초라한 모습으로 변할지 모릅니다. 이전 세대를 다음 세대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세상의 것은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든든히 선 때도 허사 뿐이니이다."라는 성경 말씀은 절대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뭐, 젊다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건강하다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이 거드름 피우지 마십시오. 성공했다고 큰 소리를 치지 마십시오. 

이사야 2장 22절에 말씀대로 우리는 숨만 끊어지면 수에 끼일 가치조차, 손으로 헤아릴 가치조차도 없는 존재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인간의 유한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불만입니다. 

시편 89편 47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우리에게도 이런 탄식과 원망이 나올 정도로 인간 자체를 보면 너무나 허무합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실존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입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이 진동할 정도로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한 것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 인간의 성공이나 명성이 별 것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두 번째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6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많은 이들의 인생이 대부분 재물을 모으는데 목적을 둡니다. 헛된 일에 분요하여 재물을 쌓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돈은 내가 죽어라 벌어서 모아 놓았는데 정작 그 재물의 주인은 누가 될지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까? 물론, 세상에 살면서 열심히 일해 돈버는 것,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돈버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요즘 학 1:6의 말씀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옛날 시골에서 우물물을 긷는 두레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통은 값싼 양철로 두레박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물을 잘 길을 수 있지만 오래 쓰다보면 양철로 만든 두레박은 우물 벽 여기저기에 부딪혀서 찌그러집니다. 그리고 두레박 밑은 녹이 슬어서 구멍도 생깁니다. 이런 구멍 뚫린 두레박을 가지고 물을 길으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는 물이 가득 담겼지만, 올라오면서 다 새 버리고 올려보면 물이 밑바닥에 조금만 남습니다. 무엇인가 힘을 썼고, 노력을 했지만, 구멍 뚫어진 두레박과 같은 인생이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일컬어진 록펠러가 죽었을 때 한 기자가 그의 변호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록펠러씨는 재산을 얼마나 남기셨습니까?" 변호사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남기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져 갈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남긴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져 갈 수 없는 게 물질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자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쌓아둔, 하늘에 많이 쌓아둔 그런 부자가 있는가 하면 땅에다가 쌓아두고 쌓아둘 수 있는 줄 알고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아주 망가져 버리는 인간이 있어요.

이제 다윗은 고백합니다. 7절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베들레헴의 작은 농가에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에는 목동으로 지내다가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블레셋의 골리앗을 무찌르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다가 사울 왕의 미움을 사서 뭐, 거의 20여 년의 세월을 쫓겨다니면서 미친 짓도 해보고, 안 해본 게 없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년엔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아버지가 왕위를 버리고 눈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기도 했습니다.

정말 인생을 살면서 가장 처참한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며 산 경험, 그리고 당대의 최고의 권력을 누려본 인생이지만, 그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는 진지하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여기 '바란다'라는 말은 ‘소원한다''소망을 가진다''갈급한 마음으로 갈망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한때 그 역시 세상의 것에 눈을 돌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시선은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주님께 모두어졌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WEC 선교회를 창설한 C. T. 스터드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옥스포드 출신으로 재벌가 집안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자 평생 복음을 위해 살기로 작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고,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그 유산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그가 나이가 들어 임종을 눈앞에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온 것 같다. 이제 돌아보니 즐거웠던 몇 가지 일이 생각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중국에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 가족들은 다 반대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결단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것,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즐거운 추억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이 있다.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나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유산 받은 것을 선교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다 흩어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유쾌한 추억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앞에 펼쳐질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두고 가는 것이 아까워서 눈을 못 감는 사람에 비해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재물도 바로 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6-7절을 보면서 오늘의 설교를 정리해야겠습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우리의 욕망을 포기하고 진정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과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146:5절에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실망을 느끼신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성공한 것 같고 인생의 전성기를 산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세상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감각적인 것이나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요12:25절에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나 중심적인 인생으로 마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우리의 생을 마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다가 인생을 끝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갈 것입니까? 아직도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중에 나는 인생의 전성기를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시면서 이 세상의 삶도 그런 대로 괜찮다고 보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신 것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라고 하십니다. 

우리 인생은 짧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손바닥 넓이와 같은 인생을 깨닫지 못한 채 땅에 매여 허우적거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세상의 재물, 내 손에 있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이제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고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쓰십시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참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을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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