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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림을 정말 믿으십니까? (마 24: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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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을 정말 믿으십니까? (마 24:40~51)

  기독교의 역사는 대략 2000년 정도입니다.  이 기간 동안 그 시대마다 우리처럼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역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믿음과 삶이 뛰어난 사람들을 말한다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1세기를 살던 성도들을 꼽습니다.  그들은 대략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인 AD 30년부터 80년 정도까지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때는 성령이 최초로 이 땅에 오신 시기였기에 어느 때보다도 성령으로 영성이 있던 때입니다.  

기독교역사 이래 그때보다 더 뜨거웠던 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교회의 부흥이 가장 왕성하던 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시작으로 세워진 교회마다 차고 넘치는 부흥을 경험하던 때입니다.  이때는 세상으로부터 가장 큰 공격을 받던 때입니다.  당시 유대인, 로마인, 이방인들은 기독교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이 땅에서 기독교의 씨를 말리려고 했던 때입니다.  그때만큼 박해와 시련과 고통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때만큼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주던 때도 없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도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흩어지면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빛과 소금으로서 경건과 삶의 조화를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1세기의 성도들은 기독교역사에서 믿음의 귀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믿음과 신앙이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졌던 신앙이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그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2개의 중요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익투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희랍어로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의 첫 글자를 모은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비밀스럽게 물고기의 모양을 그리며, 서로를 향해 그리스도인이요, 성도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단어는 ‘마라나타’입니다.  이 말은 아람어로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 나오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신앙입니다.  ‘익투스와 마라나타’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으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도라는 영예를 얻은 것입니다.  여기 익투스는 곧 부활신앙을 가리키는 것이고, 마라나타는 재림신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신앙은 곧 부활신앙과 재림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부활신앙을 다짐했습니다.  부활을 모두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부활을 믿고 나갈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부활신앙과 함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재림신앙을 다짐해야 합니다.  재림신앙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을 포함한 마태복음 24장은 주님의 재림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지만 반드시 주님이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재림신앙으로 사는 성도들이 어떻게 주님을 맞이해야 할 것인지를 본문에서 결론적으로 강조합니다.  우리가 재림을 믿고 신앙을 다짐하는 것은 그냥 하늘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재림을 소망하면서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본문에서 몇 가지로 알려줍니다.


첫째는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42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그러면서 왜 깨어 있어야 하는 가를 아울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또한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주님은 분명 오시지만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주님은 갑자기 옵니다.  생각지 않은 때 오십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주님은 2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에서 더 자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재림을 말씀하시는 24장에 이어 25장에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3가지의 비유를 통해 그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이야기입니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깨어서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신부들이 있는가 하면, 깨어 있지 못하고 기름도 준비하지 않아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미련한 신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신랑되신 주님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즉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성도들 향하여 끊임없이 깨어있을 것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여기 깨어있으라는 말은 물론 영적인 의미에서 깨어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깊은 잠 가운데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나태하지 말고, 영적긴장의 끈을 풀지 말고, 신앙이 침체되거나 흔들리거나, 주저하거나, 정체되거나, 심지어는 뒤로 후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영적으로 깨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은 그 방법까지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과 함께 기도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경건을 늘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신앙은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까?  혹이라도 잠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깊은 잠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깨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말고, 경건에 초점을 맞추고, 경건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재림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 맞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충성된 사람, 지혜 있는 종을 찾고 있습니다.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충성하라는 말씀은 25장에 나오는 두 번째 비유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타국에 갈 때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은 받은 것으로 최선을 다해 수고하여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었고,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다시 왔을 때 앞의 두 사람은 칭찬을 받았지만,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종을 악하고 무익한 종이라고 부르셨고, 밖의 어두운 곳으로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해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맡은 달란트에 따라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책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셨을 때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주인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능력과 재능과 달란트와 그분의 전적인 뜻에 따라 각자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그 일이 끝나야 세상을 떠납니다.  그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는 날은 사명이 끝난 날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 맡긴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명을 받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충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충성하고, 맡은 일에 충성하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우리 주변에 신실하신 분이 많은 것을 봅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시대에 귀한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신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신실하게 모든 것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재림신앙을 갖는 자는 누구보다도 충성해야 합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다시 한 번 맡겨진 일에 충성하기를 다짐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48절부터 마지막 51절까지 주님은 충성하는 종을 강조하시면서 반대로 충성하지 못한 종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 지혜롭지 못한 종을 ‘악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악한 종에게서 나오는 악한 행동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선하면 선한 행동을 하겠지만 악하기에 악한 행동을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며 착한 종으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25장에 나오는 세 번째 비유에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양에 속하여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된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칭찬받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도 모르게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돌아본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선을 행한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고, 아직 남아 있는 동안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인생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선을 행하는 것보다 귀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보다 기쁜 일이 없습니다.  세상이 악하기에, 선을 행하는 자가 그리운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눈떠도 코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이 많은지 모릅니다.  악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악한 행동이 모두를 놀라게 하고 때론 두렵게 합니다.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것도 단순하게 죽이지 않고 잔인하게 죽입니다.  무서운 세상이요, 정말 악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사람들은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아니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점점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더욱 큰 악으로 달려갑니다.  이런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주님은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선이 무엇인지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이 일에 앞장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림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 그 진가를 발휘해야 합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아니 더 심하게 악을 행하지는 않습니까?  재림신앙에서 선이 빠지지 않습니다.   선을 위해 살고, 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다 죽는데 과연 어디서 어떻게 죽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는 것도 잘 살아야겠지만 죽는 것도 잘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 어느 곳에서 주님을 맞이하면 좋겠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느 병원에 응급환자가 급하게 실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죽은 그 사람의 왼손이 꼭 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의사가 조심스럽게 펴보니 화투 2장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죽기 전날 밤새도록 노름을 한 것입니다.  돈을 모두 잃어 속상하면서 올인을 했는데 마지막에 광땡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화투짝을 보면서 그만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도 믿고 재림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재림신앙은 깨어있는 것이고, 충성하는 것이며, 그리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새기고 한주간도, 남은 생애도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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