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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어도 다시 사는 선행 (행 9: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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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다시 사는 선행 (행 9:36~43)

고후4:9절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 
오늘 도르가와 같은 성도가 바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는 표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8장에 
스데반의 순교와 9장 전반에 사울의 변화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며 성도들이 각처로 나아가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 속에서 
베드로를 통한 이방 전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특히 베드로를 통한 기적 중 도르가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변화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31절에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 
예루살렘 뿐만이 아니라 갈릴리 나아가 사마리아까지 
    교회가 점점 더 성장하게 되니
아마도 사도들의 발걸음이 더욱 바빠진 것 같습니다.

32절에 보면 [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교회의 총책임자라고도 할 수 있는            
사도 베드로가 주변 교회들을 심방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룻다라는 곳에 내려갔는데
거기서 중풍병으로 8년째나 누워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에 또 한 가지 기적의 사건이 나옵니다. 
욥바라는 곳에 도르가라는 과부가 죽었습니다.


1.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도르가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36-37절)

36절에 보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56km 지점인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항구 도시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름도 여전히 ‘야파(욥바)’입니다. 
이곳에 벌써 복음이 전해져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진실한 믿음을 가진 다비다라는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다비다는 당시 널리 사용하던 아람어 이름이고 
         헬라어 이름은 도르가입니다.
도르가란 이름은 ‘아름답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르가는 아름답고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풀러 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미국의 저명한 목회자인 옥켄가 목사는 
도르가를 가리켜 “자비의 천사”(an angel of mercy) 라고 부르면서 
“도르가는 분명히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제 이름답고 우아한 여인 `자비의 천사` 도르가에 대해
36절에 [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사람 ]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도르가가 적당히 구제와 선행의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아주 헌신적인 태도로 최선을 다해 구제와 선행을 베풀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도르가는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형편이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 손수 옷을 지어 입힌 일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큰 애정과 수고 없이는 하기 힘든 선행이었습니다. 
도르가는 이와 같은 일을 힘닿는 데까지 기꺼이 했습니다.          
정녕 그녀는 하나님께 구제와 선행의 은사를 받은, 
     욥바 교회에서 꼭 필요한 아름다운 성도였습니다.

특히 누가는 다비다를 향하여 “여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남자들에게는 
       ‘제자’(마데테스; μαθητρης)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제자’(마데트리아; μαθητρια)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본문에서만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이 ‘여제자’란 말은 보통 귀한 말이 아닙니다. 
다비다가 어떻게 이런 이름을 얻었겠습니까?
돈이 많았겠습니까? 학식이 많았겠습니까? 가문이 좋았겠습니까?
지금 말로 하면 삯바느질 하는 여인입니다. 
더군다나 이름이 다비다 라고 하는 아람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다비다는 이방 여인이란 것입니다.
그런 그가 귀한 여제자로 불리워진데 대해서는  
     열심 있는 선행과 구제로 일궈낸 열매였다고 봅니다. 
이 다비다는 바느질을 단지 자신의 호구지책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재주를 가난한 사람들 
          특히 과부들의 옷을 만들어 구제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았더니. ] 라고 했는데
많다는 말은 그냥 숫자로 많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어성경에는 alway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를 시간 나고 틈나면 짬짬히 한 것이 아니라 
always 언제나 짜나깨나 남을 돕는 사람
        먼저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것을 챙기는 것보다 남 주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과부들은 사회의 가장 소외된 계층이었는데 
다비다가 자신들을 알아주며 옷을 만들어 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런 도르가가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느라 
도르가는 중한 병이 들어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도르가의 신앙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가 죽은 후에 진가가 드러납니다.


2. 생전에 도르가의 신앙생활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습니까?(38-39절)

사람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죽은 후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평가는 그 사람이 죽은 후에 나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펴온 글입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김중만씨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외과의사’
아버지가 외과의사였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충청도 시골에서 외과의사로 있을 때 닭 먹은 것 밖에 없다 할 정도, 
의사 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것은
     아버지가 사준 양복 두벌과 구두 두벌 남기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정부가 아프리카 빈민구제목적으로 
         <부르키나 파소>로 파견한 의사였는데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내내 아르바이트로 생활
그 후 미술 전공을 했지만 사진 작가가 되어
아버지께 환자 치료하는 사진 한 장 남기자고 내가 여러 번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수술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선행을 홍보하려는 의사 치고 
              제대로 된 사람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대답이었습니다. 
정작 의사이면서도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이 아플 때는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했습니다.
감기에 걸려도 주사는 안 놓아주시고 
       콩나물국에 고춧가루 풀어서 먹으라고만 하셨고
프랑스 유학할 때 한 번도 학비를 보내주신 적이 없어 
      항상 자기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는 내게 줄 돈도 없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 치료만 하시다가 정작 자신이 위암 말기인 줄은 몰랐는데
의료봉사를 천직으로 생각한 분이라 이제는 모든 걸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돌아가시기 전 두 달 동안 아버지 병 수발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이제는 더욱 아버지를 존경한다.`
죽어도 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아버지 훌륭한 아버지임에 틀림없습니다.

도르가가 죽자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은 죽은 그의 시체를 두고는 
  어쨌든지 그를 살려내어 보고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근처 룻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데려온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죽었다. 나의 가족 외에 
             얼마나 나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애도하며
             아까운 사람 죽었으니 하나님 살려내어 주십시오! 하겠는가?

그리고 39절 하반절에 보면 
[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즐 ]
이게 무슨 말입니까?
평상시에 자신들에게 베푼 구제의 손길이 얼마나 많았으며 
         죽은 후에도 이렇게 실물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르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아까운 사람 죽었으니 장례식이나 거창하게 치러져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르가가 얼마나 아까운 사람이었어면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아니했습니다.
아마 자기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었을 때도 이렇게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 하나님 우리의 도르가는 꼭 살려내야 합니다 ] 

이들의 열심 앞에서는 
자연의 법칙도 이성의 논리도 어떻할 수 없었습니다.
[ 하나님 도르가를 데려갈 바에야 나를 데려가십시오 ] 라고 하는데는 
  하나님도 선택의 여지없이 감동받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야할 가치 있는 삶
그것이 도르가가 다시 살아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르가는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러한 선행과 헌신을 하게했을까?
성경학자들은 도르가를 과부로 봅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많은 날들을 눈물로 한탄도 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삶의 고통을 주십니까?
  남들은 사랑하는 남편도 있고 의지하는 자식도 있는데
 왜 제게는 이런 행복을 다 뺏어가셨습니까? 주님 왜 공평하지 않습니까? ]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어느 날,                                      
문득 자기 주위에 나이든 과부들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저들은 말은 안 해도 더한 고통 속에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되자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저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어느 날 도르가는 깨달았습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 하나님 아시잖아요? 나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 
그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줍니다.
[ 내가 네게 없는 것 왜 요구하겠니?
  네게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느냐? ] 
그래서 도르가는 자신의 바느질 솜씨를 동원해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어 도움을 준 것입니다

<더글라스 스티어> 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 남을 위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나 주문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한 친구의 삶의 어떤 부분이 해결되기를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삶에서 
         그 친구에게 막힘이 되었던 문제를 도와주라고 하신다 

  또 당신이 곤경을 당하고 있는 친구를 위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보면
         당신이 직접 필요한 짐을 꾸러 그 친구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누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기도는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
도르가는 바로 행동의 기도를 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면서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준 선물은 언제나 최고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도르가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고 있으면 그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 옷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합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향기를 전하는 교회에는               
       다 도르가와 같은 교인들이 몇 명씩 숨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욥바 교회의 목사가 누구인지 장로가 누구인지 기록은 없지만
         삯바느질 했던 도르가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위대한 설교자 위대한 지도자도 필요로 하시지만 
진짜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은사로
      최선을 다해 변함없이 섬기는 도르가를 원하십니다. 

도르가가 죽자 욥바의 교인들이 
베드로가 가까이 룻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청했습니다


3. 베드로를 통한 도르가의 기적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40절)

베드로가 도착해 보니 사늘한 시체가 누워있고
주위에 과부들이 울면서 생전에 도르가가 지어준 옷을 내 보이며
       도르가를 살려달라고 합니다. 
이 모습은 막5:35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소녀야 일어나라 - [ 달리다 굼 ] 하면서 살렸을 때 모습과 흡사합니다. 

주위에 겉옷, 솟옷을 들고 울면서 우리의 도르가를 살려 달라고 메달릴 때
베드로의 마음은 겉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다 나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그것은 보통 기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 다비다 굼 ~! ] 
그러니 도르가가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정신이 돈 사람이 아닌 이상 
        어떻게 [ 다비다 굼 ] 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이 능력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후1:8절 말씀에 보면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교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케 하심이라 ] 
우리도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기도를 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도르가의 기적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4. 도르가의 기적의 결과는 어떠합니까?(41-43절)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어켰습니다. 
사람들을 불러서 도르가가 살아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이 소문을 듣게 되었고 살아난 도르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42절에 [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 
가장 축복받은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해도 축복인데, 
    온 욥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으니 
    도르가는 참으로 큰 축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르가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온 욥바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눅16:31절 [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라고 주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도르가가 살았을 때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살았을 때에도 주님을 증거했고 
       죽었을 때에도 그리고 살아났을 때에도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도르가는 무명한 자 같았지마는 
사도행전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찬란한 별이 되었고 
주님의 사랑을 가장 생생하고 진하게 나타내 보여준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세상에서 힘을 잃어버렸습니까?
      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우습게봅니까?
       왜?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교회를 헐뜯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교회를 욕해도 우리가 듣고도 가만히 있습니다.
어떤 교인은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자기도 교인이면서도 덩달아 맞장구를 치며 교회를 욕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교인입니다. 
[ 흠이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요
  거기에 죄인들이 모이고 병자들이 모여 냄새도 나고 깨지는 소리도 나지만
  교회는 그래도 거룩한 곳입니다 ] 라고 왜 소리치지 못합니?까?
그것은 교회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그런 사랑의 본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도 기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도르가와 같은 선행과 구제를 하는 성도가 있다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2 제3의 도르가들이 일어나 그 일을 해나갈 것입니다. 
대부분의 구제와 선행은 사진 찍는 구제이고
        제정보고 하는 구제입니다.
그런 구제는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억하는 구제를 하십시오.
하나님만이 아는 구제
때로는 교회도 모르고 남편도 모르는 그런 구제를 한다면
우리 교회 안에도 도르가가 다시 사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5. 베드로를 통한 두 기적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참조/32-35절)

베드로를 통해 룻다의 애니아가 중풍병에서 일어나고 
              욥바의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난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습니다만
오늘 애니아의 기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기적이라면
도르가의 기적은 선행과 구제의 사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오늘날도 일어납니다.
행동하는 기도로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르가의 기적은
    다시 살아나야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
    지금도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도르가는 참으로 행복한 신자였고 행복한 여 제자였습니다. 
주님의 삶을 닮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행10:38절에 [ 주님 자신이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셨다 ] 고 했는데 
그녀도 두루 다니면서 선행과 구제의 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눅10:37절에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고 분부하셨는데 
도르가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도르가는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취해서 살지 않았고 
        주님의 사랑과 하늘에 취해서 산 가장 행복한 여 제자였습니다. 

도르가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듯이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에도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고넬료에게 사도 베드로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셨듯이 
죽은 도르가에게 사도 베드로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셨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다락에 뉘여 있는 도르가의 시체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성령의 생생한 감동하심을 
          그곳에서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도르가의 기적은 죽어도 다시 사는 선행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행은 결코 내게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론다 번의《시크릿(The secret)》이라는 베스트 셀러
거기서 강조하는 것은 - 끌어당김의 법칙
먼저 주고, 받아라.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큰 자선사업가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막대한 돈을 베풀고, 이때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 
우주가 거대한 수문을 열어 엄청난 돈을 되돌려준다. 그 몇 배로! 
줄 만큼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베풀기 시작하라. 그로써 당신의 
믿음을 증명하면,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 
더 많이 받을 것이다.

무언가를 늘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 반대로 모든 것을 늘 밀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끌어당기고, 사랑을 끌어당기고, 행복을 끌어당기는 힘의 비결, 
그것은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베풀면 줄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몇 배로 되돌아오는 
그 신비로운 법칙을 체험을 통해 아는 사람은
오늘이 행복하고 내일은 더 행복합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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