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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갈 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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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갈 2:11~16)

오늘 말씀은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내용이다. 매우 독특한 장면이다. 이 사건이 주는 impart를 더 자세히 깨닫기 위해서 이 일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 일은 안디옥에서 일어났다. 안디옥은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장소이었다. 사도행전 13장에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며 그들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유대 중심의 교회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선교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차이를 제거하며, 은혜와 구원을 베풀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안디옥은 그 은혜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 그런 신분으로 안디옥에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대교 중심의 성도들과 이방 성도들을 함께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 때에 야고보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도착하게 된다. 그들은 실제로 야고보가 보낸 자들이 아니라, 아마도 자칭 야고보가 보낸 자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로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당시의 mother church였다. 

그러므로 어머니 교회의 이름으로 왔다면 다른 daughter church는 모두 믿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자칭 야고보가 보낸 자들은 당시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 틀림 없다.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하며 떡을 떼 본 적이 없던 할례자들이 와서,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있는 모습에 brake을 걸었던 것이다. 이제 베드로는 그들이 두려워서 유대교 성도들과만 교제하게 되었다. ‘그런 일쯤이야 큰 문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타협된 복음인가 아니면 타협될 수 없는 복음인가를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순간이었다. 할례가 있어야만 주님의 제자가 되는가, 아니면 할례가 없이 오직 복음과 믿음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베드로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매우 다혈질적인 인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는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13절에는 ‘외식’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말의 헬라어 의미는 ‘연극을 하다’이다. 어떤 사람의 가면을 쓰고 그의 옷을 입고 연극을 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베드로는 그의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것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당시의 선교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상황을 그는 간과할 수 없어서 그는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다. 14절을 보자.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그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았다고 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진리는 그것을 동의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행동에서 follow through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설교인 산상수훈을 마치며 어떻게 결론을 내렸던가? 들은 것이 들은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폭풍과 파도가 밀려올 때에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듣고 깨달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라고도 하셨다. 베드로의 경우, 그는 분명히 복음의 확신이 있었다. 그는 율법과 유대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그가 고넬료라는 이방인을 만나는 장면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하시고 엄청난 역사가 일어남을 보고, 그는 복음의 대상이 유대인에게서 온 만민에게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알고 반드시 해야 할 일과 알면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큰 문제이다. 베드로는 왜 실족했는가”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1)그에게는 담대함이 부족하였다
12절을 보자.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그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그들을 두려워 했다. 잠언29:25를 보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지만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올무에 걸리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핍박을 받아서 그런 쪽의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에게 잘못 보일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2)그에게는 사랑이 부족하였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이 이방인들을 얼마나 hurt 하였고, 선교에 장애가 되었을까? 한 번이라도 이방 영혼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했던 책망은 이런 의미이다. ‘너와 나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도 없고, 우리의 선행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과 믿음으로 구원을 유대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처럼 살아야 하고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진 것이 아닌가? 왜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방해가 되는가?’ 바울은 이것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양들의 치며 그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오늘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베드로는 흔들렸고 그래서 그는 무너졌다. 흔들릴 수 없는 conviction 속에서도 그가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무너지지 않을 확신이 있는가?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세워져 갈 것인가? 아니면 환경을 바라보며 무너져 갈 것인가?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며 물 위를 걷다가 환경을 바라보면서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음을 기억하자. 세상을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리고 ‘이 일이 언제 끝나며 어떻게 끝날 것인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확신이 없는 환경을 주목하며 빠져갈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주목하며 세워지고 구원받을 것인가? 

우리에게는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보이는 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 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방향을 잡으며 나아가자. 환경을 바라보면 아무런 대답이 없다. 짐을 짊어지고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자. 주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근본과 결론이다. 창세기와 계시록이다. 알파와 오메가이다. 원근과 결론이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주님이시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약속은 약 5,000개라고 한다. 5,000개의 약속을 365일로 나누면, 우리는 하루에 적어도 13개의 약속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시멘트가 콘크리트가 되려면 모래와 물과 자갈과 함께 섞여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과 믿음과 순종과 함께 섞여야 영적인 콘크리트가 된다. 문제는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2)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마음이 열려 있는가?
베드로는 그들을 마음에 담고 있지 않았다. 그가 이방 나라를 향해서 조금만 더 뜨겁고 조금만 더 불탔다면 그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3년에 걸쳐 제자들을 훈련하고 양육한 후에 십자가 상에서 모든 구속사역을 마무리 하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님이 모든 사역을 마치고 난 후에 주신 final product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사는 제자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복음은 너무도 좋은 것이다. 자격이 없는 자에게 자격을 주셨고, 보지 못하는 자를 볼 수 있게 하셨으며, 하나님의 후사가 되게 하셨다. What a 복음!!! 이 좋은 복음을 어떻게 나만 가지고 있는가? 결단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복음의 진리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의 야심은 명예나 물질이나 학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영혼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을 아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이것은 복음에 빚을 진 자들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에 그들에게는 20 척의 boat가 있었지만 그들은 반만 채우고 급히 떠났다. 그리고 수많는 사람들이 얼음과 같은 바다에 빠져서 죽어갈 때에 그들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14호 boat 만이 돌아와 몇사람을 구조했다고 한다. 그들은 왜 돌아와서 사람들을 구조하지 않았나? 그들은 두려움과 무관심 속에 있었다. 바다에 빠진 자들이 서로 boat에 올라오려고 하면 자신들도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신이 살았으니 되었고 저들이 아무리 울어도 무관심했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 날 밤 그들은 비겁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큰 비난을 받아야 할 실수가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복음의 방주 안에 있는 우리는 과연 죽어가는 방주 밖의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우리의 생명을 무릎쓰고 있는가? 우리에게도 두려움과 무관심이 있지 않은가? 내가 구원 받았으니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온 세계가 멸망하고 있는데도 나와 우리 가족이 구원 받았다고 안주하는 것이 아닌가? 

구원의 방주에는 아직도 많은 여유가 남아있다. 잔치를 열었는데 올 사람이 없다면 문제가 아닌가? 채우는 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 사흘 간의 새생명잔치가 열릴 것이다. 그 자리에서 구원의 종소리가 들리고 하늘의 축제가 열리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 ‘통곡의 벽’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적은 초청자들의 이름이 있다. 이 수많은 영혼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다. 복음에 합당한 자의 삶은 이 좋은 복음을 sharing하는 것이다. 죽음의 바다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생명의 자리로 초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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