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창 17:15~22, 18:9~15, 21:1~7)

  • 잡초 잡초
  • 493
  • 0

첨부 1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창 17:15~22, 18:9~15, 21:1~7)

  사람은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고들 합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 중에도 기분 좋을 때 특정한 소리를 내는 등 기쁨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동물도 있지만, 사람처럼 웃는 소리뿐 아니라 웃는 표정을 함께 지으면서 웃을 줄 아는 동물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웃는 표정'이란 사람의 얼굴에는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표정이기도 합니다.

  흔히 듣는 말이지만, 사람이 웃을 때에는 안면 근육들 중에서 열 몇 개 정도만 쓰면 충분한 반면에, 찡그릴 때에는 그보다 약 다섯 배 더 많은 근육들이 동원되어야 한다니까 실제로 훨씬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혹시 동물 중에 웃을 줄 아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동물로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조소(嘲笑)' 곧 '비웃음'입니다.
  다른 동물이 이런 웃음을 결코 지을 수 없는 이유는, 오직 사람만이 '악한 생각'을 할 줄 알고 그것을 비웃음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웃음에 있어서 사람과 동물 사이의 또 한 가지 차이점은, 동물은 제 나름대로 웃는다 해도 자기 혼자만 웃겠지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웃기고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역시 오직 사람만이 '지성적' 동물이며 그래서 차원 높은 기쁨을 서로 나누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바로 이런 두 종류의 웃음들을 웃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있지만 이 부부는 이를테면 '부소부희(夫笑婦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떤 웃음들을 왜 웃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사람이 '함부로 웃어서는 안 될 나쁜 웃음'과 '꼭 웃을 줄 알아야 할 진정 행복한 웃음'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혼자만의 '불신의 웃음'을 짓게 됩니다. 

  창세기 17장 15절부터 22절의 말씀에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자손과 큰 민족의 약속을 주시면서 할례라는 거룩한 표징을 또한 명해 주셨는데, 여기서 그 언약을 또 한 번 확인해 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원래 '아브람'이었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듯이, 여기서는 그의 아내 '사래'에게도 "사라"(열국의 어머니)라는 새 이름을 주심으로써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큰 민족과 열왕과 열국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다른 여인 아닌 사라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때 이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주 엄숙하게 큰 약속을 재천명해 주시는 마당인데, 아브라함은 저 혼자서 실쭉이 웃고 있었습니다.
  나이 백 살이나 된 사람이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그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그만 픽 웃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어서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다는 말이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무슨 말씀도 안 될 소리를 하십니까? 나는 내년이면 백 살 되는 할배고 사라도 구십 살 다 된 할맨데, 이제 와서 무슨 애를 낳겠습니까? 그저 내 첩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나 죽지 않도록 뒤를 잘 보살펴 주셔서 그 애를 통해서 대가 끊이지 않게나 해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이 웃음은 분명히 의심의 표현이지 결코 너무 놀란 기쁨의 웃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런 불신앙적인 생각을 정면으로 꾸중하신 것을 보아서도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린 자세로 하나님께서 못 보실 줄 알고 웃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셨던 까닭에 "아니야, 이스마엘은 절대로 아니야. 사라가 반드시 네게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통하여 이 언약이 실현되고야 말 것이다."라고 딱 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라 역시 남편과 꼭 같은 웃음을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8장 9절부터 15절에 기록하기를 "9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고 했습니다. 

  17장의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정도 지났을 때 아브라함은 소돔성으로 가고 있던 세 천사를 영접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은 현현(顯現)하신 성자 하나님이셨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 셋" 중에 한 명을 13절부터는 "여호와께서"라고 밝히고 있으며, 나중에 19장에 보면 정작 소돔성으로는 "두 천사"들만 갔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이들이 "때가 되면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을 때, 그 말을 장막 문 뒤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던 사라는 '남편도 이렇게 늙었고 더구나 나는 경수까지 끊어졌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고" 말았습니다. 

  이 사라의 웃음 역시 불신앙의 웃음인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그처럼 '속으로만' 웃은 것을 두고도 "사라가 왜 웃느냐?"라고 따끔히 꼬집으시면서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그녀의 불신앙을 엄중히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불가능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것은 적어도 아브라함과 사라 같은 신앙인이라면 조금만 따져 보아도 명백한 대답이 나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는 꼭 같이 순간적인 의심에 빠졌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날카로운 질책에 당황한 사라는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면서"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이것 역시 그 웃음이 부끄러운 행위였음을 사라 자신도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장막 문 뒤에서, 그것도 마음속으로만 웃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모르실 줄로 여겼던 것이지만, 물론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런 웃음을 자기도 모르게 흔히 짓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주 안 믿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일시적으로 또는 어떤 구체적인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철저히 믿지 못하고 그만 픽 웃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할 것은 절로 다 채워주십니다."라고 목사가 설교하면 '말씀이야 그럴 듯하지만 뭐 실제로 그럴까요?'라는 의심이 들면서 속으로 불쑥 웃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평화시대에 순교의 각오로 전도와 선교에 충성해야만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안보를 지켜주시고 경제를 축복해 주십니다."라고 설교하면 '목사니까 그렇게 말씀하시겠지만 내가 교회에 충성한다고 해서 정말 꼭 잘 살게 된다는 보장이 있나?'라는 불신에 여전히 사로잡혀서 혼자 웃고 있는 교인들이 분명히 있지 않겠습니까?

  몸은 지금 예배당에 앉아 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속으로 그런 의심과 불신앙의 웃음을 피식피식 웃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목사를 비웃은 웃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는 웃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약속은 목사가 자기 입장을 세우기 위해서 날리는 공수표가 결코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해 주시는 언약입니다.
  아무리 사람 생각에는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도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기한이 이를 때에 반드시 이루어 주고야 마실' 철석같은 약속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사람이 이런 웃음을 버릇처럼 계속 짓게 되고 그런 웃음이 점점 더 자주 나오고 길어지게 되면 그것은 결국 진짜 불신앙의 웃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정녕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믿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다."라는 말씀은 목사가 주는 약속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몇 십 몇 백 번 재확인해 주시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도 '십자가 공로? 웃기는 소리 하네.'라고 코웃음치고 '천당? 다 헌금 받아먹으려고 하는 소리지.'라고 쓴웃음을 짓는 것입니다.

  비록 그런 웃음이 사람 눈에는 안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고 정확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처럼 당신의 구원 약속에 대해서 조소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실지 아십니까?
  '바깥 어두움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그저 피식피식 웃는 사람은 정말 피눈물이 모자랄 정도로 무서운 영벌에 빠지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을 깨닫고,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언약의 말씀을 단 한 마디라도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웃음'을 웃게 됩니다. 

  창세기 21장 1절부터 7절의 말씀에 "1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6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꿈같은 경사를 가리켜 본문에서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여러 차례 반복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우연히 생긴 일이나 재수 좋아 얻게 된 일, 혹은 요즘 중년부부들이 뜻하지 않았던 늦둥이를 얻게 되는 경우처럼 무슨 '실수로' 된 일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분명한 원인이 있음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성취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 언약은 그저 한두 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이후로 "네 씨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리라" 혹은 "명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등등 셀 수 없이 반복 확인된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가지고 부도내실 분이 결코 아니신 까닭에 그 약속을 지켜 주시는 날은 결국 오고야 말았습니다. 여기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말씀대로 찾아오셨고'라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해 주시기 위하여 접근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행하셨으므로" 다시 말해서 '한번 한다고 하시면 반드시 하시는 분이신 까닭에' 그 아들 주마고 하신 약속을 끝내 지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약속 이행이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일어났다고 했는데, 여기서 "미쳐"라고 번역된 말은 '기한이 차서'라는 뜻입니다.
  그 기한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가 75세였고 이제 아들을 낳은 때가 100세였으니 무려 장장 25년이나 걸린 정말 오랜 '기한'이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긴 세월이었지만, 한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 낳을 육체적 능력이 점점 더 약해지니까, 처음 20년보다 마지막 5년이 훨씬 더 믿기 어려웠을 것이고, 더구나 100세에 이르러서는 그 약속 성취가 인간적으로는 이미 불가능해 보이는 한계를 훨씬 지난 상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해 주실 당신의 기한이 찼던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점이 차기까지 아브라함과 사라 쪽에서는 그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오도한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계속 지키도록 도와주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처럼 걸핏하면 쉽게 흔들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주 찾아와 주셨고 끈질기게 일깨워 주셨습니까?

  "하늘의 별을 보고 바다의 모래 수자를 세어 봐라. 네 자손의 수가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상기시켜 주시고, "너희들의 이름은 이제부터 '열국의 아버지'요 '열국의 어머니'다."라고 격려해 주시는가 하면, 쪼갠 짐승 사이로 횃불을 통과시키는 언약행위까지 친히 보여주시면서 '이 약속을 안 지키는 쪽은 죽는다.'라는 확인까지 하나님 편에서 해 주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가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첩을 들여서 씨를 두겠다고 하다가 이스마엘을 낳게 된 하갈이 콧대를 높이는 바람에 집안에 난리가 벌어졌을 때에도 하나님 편에서 '절대로 그 애는 아니다.'라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게다가 이삭을 낳기 일 년 전에는 하나님께서 두 천사들과 친히 방문하셔서 그들의 연약을 책망하기까지 하시면서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붙잡도록 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조차도 순전히 하나님 편에서 지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자상하게 일깨워 주시고 단속해 주시고 상기시켜 주시고 교정시켜 주시고 해서 유지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켜 주신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결국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이 이름 지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틀림없이 또 한 가지의 웃음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바로 한 일 년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약속을 들으면서 땅에 엎드려 히쭉 웃던 웃음, 그리고 또 사라가 장막 뒤에서 그 약속을 들으면서 속으로 몰래 웃었던 웃음이었습니다. 
  그들 둘 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실소를 지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솔한 웃음을 웃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웃음은 그 질과 차원이 전혀 다른 웃음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웃지 않을 수 없는 웃음, 문자 그대로 기쁨과 감사가 철철 넘치는 웃음이었습니다.
  그 웃음은 '듣는 자가 다 함께 웃지 않을 수 없는 웃음' 곧 함께 기뻐하며 함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공감될 수밖에 없는 웃음이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웃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그들의 믿음까지 지켜 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결국에 가서는 그처럼 자기네들의 100세와 90세의 평생에 정말 최고로 행복에 겨운 웃음을 웃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약속만큼 틀림없이 성취될 보장이 100퍼센트가 되는 신빙성 있는 약속이 달리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길 수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무슨 소원을 두고 기도하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일찌감치 우리 쪽에서 포기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해도 내 쪽에서 계산해 놓은 타이밍을 놓치면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어 버리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남편이 철석같이 약속해 주는데도 아내가 믿어 주지 못하고 몇 번씩이나 전화를 걸어서 "여보, 오늘 저녁에 하기로 한 것 잊지 마세요."라고 다그치면 아무리 사람 좋은 남편이라도 절로 짜증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사귀어서 이제 알 것 다 알고 통할 것 다 통하는 친구인 줄로 알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내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대한다면 결코 신앙생활에 기쁨을 맛볼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 받기 위해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시는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끝까지 믿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보혈로 네 죄가 사하여졌다.'라고 하시면 그 말씀을 그저 곧이곧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무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는 칭의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었다.'라고 하시면 두 번 다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번 택하신 자를 끝까지 놓치지 아니하시는 성도 보존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너희들이 거할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데 다 준비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들을 데려가서 거기 살게 하겠다.'하시면 철석같이 그냥 믿어야 할 뿐입니다.
  오직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웃게 해주시는 진짜 행복한 웃음을 웃는 날, 곧 저 천당 영생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 '기한이 차면' 반드시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생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는 금세의 남은 인생 역시 '항상 기뻐하는 웃음'이 절로 넘치게 됩니다.
  기도로 시험을 이김으로써 승리의 웃음을 짓게 되고 성도와 사랑으로 교제함으로써 행복한 웃음이 넘치고 교회와 가정이 축복을 받게 됨으로써 감사의 웃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로 웃게 하시니' 웃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런 믿음이 잘 들지 않고 약해진다 해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조차 그토록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셔서 지켜진 믿음이었는데, 우리라고 해서 뭐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우리도 '나의 믿음 약한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나의 믿음 약할 때에 주 날 붙드네.'라고 찬송함으로써, 그 믿음까지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바로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노라"(눅 22:32)고 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들을 끝까지 믿음으로써, 끝내 그 약속하신 축복 성취의 감격을 함께 누리고 기쁨과 감사의 웃음을 서로 나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은 워낙에 훌륭한 신앙의 선조이니까 17장에 나왔던 웃음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미화시켜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칼빈도 "그가 웃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멸시하거나 터무니없는 일로 여기거나 거부한 까닭이 아니다. 단지 마치 거의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 때 흔히 그러하듯이, 아브라함은 한편으로는 기쁨에 넘쳐서, 또 한편으로는 감탄에 겨워서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라고 주석한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의 웃음이 그처럼 좋은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꾸중하셨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첫 웃음은 비록 짧은 순간에 우발적으로 나온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의심과 불신에서 나온 것임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웃음을 곧 멈추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들은 계속 웃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그들에게 그 웃음을 당장 멈추도록 단호하게 명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라"고 그의 아브라함의 의심의 웃음을 그치게 하시고,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고 사라의 변명을 따끔하게 책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즉시 그런 의심과 불신의 웃음을 거두고 자신의 신앙을 다시 추슬렀습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로마서 4장 19과 20절에서는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했으며, 히브리서 11장 11절에서도 "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믿었고 사라 역시 하나님께 더 이상 거짓말을 우기지 않고 믿음을 회복했던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이삭'이라는 '웃음의 아들'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17장 19절 중간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참 유머가 있지 않으십니까?
  "너 지금 내 말 믿지 않고 웃었지? 그러면 나중에 진짜로 아들 낳게 되면 그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평생토록 그 귀한 외아들 이름 부를 때마다, 그들이 하나님 약속을 의심하고 웃었던 부끄러움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들의 신앙을 북돋우어 주심으로써 끝내 자기네 인생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 은혜 역시 '이삭'을 부를 때마다 감사하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웃음 없는 인생은 그 얼마나 삭막하겠으며 무슨 살맛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웃찾사'니 '개그 콘서트'니 하는 따위의 쇼를 보면서라도 좀 웃고들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웃게 해 주실 때 그 웃음은 그 얼마나 기쁜 웃음이 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웃을 수 있는 최고의 웃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를 웃겨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없는 농담이나 유치한 개그 따위로 웃기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모든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심으로써 그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된 자로 하여금 절로 행복에 넘친 웃음을 웃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웃을 줄 아는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는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두고 웃을 줄 아는, '동물과 다름없는 수준'의 웃음만 아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니, 동물과 전혀 다른 웃음이라고 웃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조소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참된 신자들만이 웃을 수 있는 '진짜 웃음'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심'으로써 웃게 되는 이 웃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그 언약하신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주시는 이 최고의 기쁜 웃음을 금세에서 날마다, 그리고 내세에서 영원히 함께 웃게 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