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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성도의 모습은? (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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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성도의 모습은?  (아 2:1~2)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는데 천사같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의 고민은 이러 했습니다. 

첫째,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내가 비록 왕자 이지만 왕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신분의 격차 따위는 상 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릴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무슨 문제가 있던 모든 책임은 내가 질 수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고민이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 견도 구했습니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얻어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하는 일을 같이 하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인과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노라”고 진심으로 설명합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비유로 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가리켜 말하기를 “죄인 된 인간을 짝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달픈 사연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사랑할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 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록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사랑을 받았기에 오늘 이 거룩한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솔로몬의 사랑을 통해 나타낸 것입니다. 솔로몬의 궁궐에는 예쁜 비빈들이 일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지극히 평범한 술람미 여인을 그토록 사랑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을 사랑한 솔로몬의 사랑의 노래가 아가서입니다. 

아가(雅歌)서란 문자적인 의미는 “맑은 노래”라는 뜻이지만,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로는 “노래들 중의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의 왕으로 널리 알려진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여 부른 노래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개인적인 애정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여호와의 신부”로 신약성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술람미 여인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도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간단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 사랑을 받는 길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백합화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백합화입니까?

一.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한 술람미 여인은 본문 1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했습니다. 골짜기 즉 인적이 드물고 잘 보이지 않는 외진 지역의 백합화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보통의 여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솔로몬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때가 되면 곱게 피어 향기를 발산하다가 조용히 시드는 것이 골짜기의 백합화입니다. 정원이나 공원의 백합화는 보아주는 이가 많아서 뭇사람의 칭찬과 사랑 속에 시들어 집니다. 그러나 골짜기의 백합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습니다. 그 꽃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면 푸른 하늘과 태양, 그리고 떠다니는 구름과 뛰어다니는 산짐승들뿐입니다. 그래도 골짜기의 백합화는 꽃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합니다. 

이는 빛없이 말없이 묵묵히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의 모습이 골짜기의 백합화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탄생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권력의 중심지 로마 황실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도 아니었습니다. 지혜의 도시 아테네도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는 작은 촌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도 극히 낮은 골짜기 같은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살았던 곳은 또 어디입니까? 나사렛 촌 동네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큰 이적을 행하신 후에는 언제나 조용한 산속이나 들판을 찾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모두가 골짜기의 백합화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6:1~4에 당부 하시기를“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세상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골짜기의 백합화처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러했겠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역시 명예욕이 대단했습니다. 도가 지나쳐 명예욕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누가복음 20:46~47)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무리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명예란 인간의 본능 중 하나입니다. 본능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절제되어야 합니다. 절제되지 않은 본능은 동물적인 삶이 되어 그를 천박하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풍성한 물질을 가지기를 원하는 소유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유의 본능이 절제되지 못한 까닭에 뇌물을 받거나 도둑이 되어 감옥소를 들락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성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절제되지 못한 본능 까닭에 성희롱, 성폭력, 성추행 등 한계가 모호한 성적문제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를 흔하게 봅니다. 이처럼 명예욕도 인간의 3대 본능 중 하나입니다. 본능이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뿌리입니다. 그러나 본능에 내어 맡길 때 그 사람의 인격은 추해지고 맙니다. 본능을 잘 통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인격자라 하며 그를 존경합니다. 

이탈리아의 신학자이며 철학자 또는 성인으로 알려지는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신학교 교장으로서, 또는 “신학대전”의 저술가로서 큰 공적을 세운 사람입니다.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이렇듯 빛나는 업적과 그의 성덕을 찬양하여, 그에게 풍부한 영토를 가진 나폴리 대주교의 영위를 주려했습니다. 그는 끝내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전과 같이 한 가난한 수도사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일시적인 명예에 미혹되지 않는 것이 참된 성도의 태도인 것입니다.

사람이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폐단이 있습니다. 
첫째, 명예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진실을 잃게 됩니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를 들어내기 위해 과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보다 못한 사람은 무시하게 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하셨습니다(잠언 18:2). 

셋째,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보다 앞선 사람은 비방하여 끌어내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명예욕에 사로잡혀 나타내길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길 바랍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의 심령은 스스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즉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의 믿음의 열정은 떨어지고 교회를 멀리하게 됩니다. 

이처럼 명예욕에 사로잡히면 진실이 사라집니다. 교만하게 됩니다. 사랑을 상실하게 됩니다. 신앙의 열정을 잃고 교회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명예욕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 전체를 뒤흔들어 버립니다. 

며칠 전 어느 일간지에 이러한 기사가 시렸습니다.“어느 할머니가 내밀고 간 1억”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지난 1일 오후 2시쯤 한 할머니가 연세대학교 공학원에 들어섰다. 커다란 살구색 재킷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할머니는 학생들이 모여 밥을 먹고 있는 지하식당을 서성이며 두리번거렸다. 한참 뒤 할머니는 구석진 곳에서 식사를 하던 정제훈씨(26.사회체육학과)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학생, 좋은 일하러 왔는데 어디로 가야 되나. 길을 헤매다 여기까지 와버렸네.’ 정씨는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가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대학본부 총무처로 안내했다. 

할머니는 총무처 직원과 마주앉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봉투하나를 꺼냈다. 봉투엔 5000만원짜리 수표 1장, 4000만원짜리 수표 1장, 100만원짜리 수표 10장, 모두 1억원이 들어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위해 써주세요.’라고 했다.

할머니의 차림새로 보고 봉투에서 100만원쯤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총무처 직원들은 깜짝 놀라 총장실에 연락을 취했다. 할머니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묻자‘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대답했다. 김한중 총장이 달려와‘장학금 받은 학생들이 감사 서신이라도 보낼 수 있게 주소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해도‘경기도에 살고 있는 60대’라는 대답뿐이었다. ‘연세대학교가 좋은 학교라는 말만 듣고 찾아왔다.’는 할머니는‘식당해서 모은 돈에 최근 내가 살던 지역이 재개발돼 나온 토지보상금을 보탰다.’며 ‘깨끗한 돈이니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학교를 나선 할머니는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이 종점인 버스에 올랐다.”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신을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표현한 술람미 여인의 모습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시험에 넘어지게 한 것 중에 하나가 명예욕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했습니다. 보암직이란 보기에 좋은 명예를 가리킵니다. 사탄의 이러한 미혹은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께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이러한 사탄의 미혹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태복음 4:5~7) 하시므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미혹은 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가장 손쉽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명예욕인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가장 큰 요인이 명예욕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골짜기의 백합화처럼 빛없이 말없이 묵묵히 하나님만 바라보시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마음을 사로잡은 술람미 여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지닌 참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二.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했습니다. 즉“가시 같은 사람들 가운데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 백합화와 같다.”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가시밭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성도의 삶은 가시떨기의 방해를 이기고 아름답게 핀 백합화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방해하는 가시나무와 같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13:22 에“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신앙을 방해하는 가시떨기는“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겨야만 아름답게 핀 백합화의 향기와 같은 성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를 사랑하십니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무엇으로 미혹했습니까? 선악과 즉 먹는 과일, 물질이었습니다. 사탄은 지금까지 6천 년간 끊임없이 물질을 미혹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사람을 찾는다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주님의 제자로 발탁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남달리 계산이 빠르고 분명했기에 재정을 맡겼습니다. 참으로 복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귀한 축복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재리의 유혹이었습니다. 재리의 유혹의 가시에 기운이 막혀 결실치 못했습니다. 은 30에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겼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는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끝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배신자의 대명사, 저주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6:7~10에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돈과 인간과의 관계는 마치 배와 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물이 없으면 배는 무용지물이나, 물이 배 안에 들어오면 배는 물속에 침몰하고 맙니다. 우리 인간에게 물질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급기야 인간은 파선된 배와 같이 파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가시밭의 백합화는 가시에 찔려 꽃잎이 찢어져도 향기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찢어진 그 자리에서 더욱 진한 향기를 발산합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랑하며 가르쳤고 믿었던 제자들이 스승을 배신하고 다 떠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에 스승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얼굴에 침 뱉으며 뺨을 치며, 옷을 벌거벗긴 무리를 향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에 못을 박는 잔악한 무리를 향해 도리어 기도하시기를“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이 곧 가시밭의 백합화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초대교회에 스데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집사가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박해로 인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가 한 말을 성경에 기록하기를“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 7:59~60)고 했습니다. 이 모습역시 주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가시밭의 백합화입니다.

한국전쟁 때 많은 순교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황해도 봉산교회에는 일곱 분의 장로님 중 네 분이 순교하였는데, 그 중의 한 분이 강덕기 장로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강덕기 장로님을 나무에 묶어놓고 양쪽 눈을 뽑았습니다. 그때 강 장로님은 말하기를“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었는데 두 눈이 뽑히니 하늘나라를 볼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했습니다. 장로님은 두 눈이 뽑혀 피눈물이 흐르는데도 이렇게 말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주의 제단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력이 떨어져 육신의 힘은 없었지만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나며 입에서는 아름다운 찬송이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인민군들은 연합군의 진격으로 후퇴하게 되자 다시 성전에 난입하여 강덕기 장로님의 이와 턱뼈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짓이겨 부수었습니다. 결국 장로님은 주님 앞으로 갔고 공산주의자들은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국군이 진격했을 때 그들 중 우두머리가 미처 도망하지 못하고 동네 청년들에게 붙들렸습니다. 청년들은 강 장로님이 묶였던 그 나무에 그를 묶어 놓고 장로님의 아들을 불러 마음대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했던 그대로 눈을 뽑고, 턱을 부숴 죽임으로 원한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강장로님의 아들은“내 아버지의 거룩한 순교를 헛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린 후, 성경 말씀대로“당신과 같은 원수라도 나는 사랑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를 하고 가버렸습니다. 

로마서 12:19에“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랑의 폭을 점점 넓혀가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테두리에서 가족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에서 이웃 사랑으로, 이웃 사랑에서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까지,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카폐의 사랑으로 그 폭을 넓혀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없습니다. 이 온전한 사랑을 어떻게 행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의지적 인내요, 예의요, 섬김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부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이 큰 사랑, 이 온전한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이 있어야만 합니다. 한 무명 시인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을 때, 
참 많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하여...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울어야만 했습니다. 
남편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화를 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하는 욕심 때문에...

내가 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참아야만 했습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니 사랑하는 일이 쉬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감사가 됩니다. 사랑하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별 수 없습니다. 내 사랑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더 큰 사랑,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끝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여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사랑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고린도전서 13:1~7에 기록된 사랑의 찬가를 읽어 보시면 됩니다. 그 말씀에 나오는“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나”를 대치시켜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온유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렇게“사랑”대신“나”를 넣어 읽노라면 참으로 내가 부끄럽습니다. 양심상 도저히 읽을 수가 없습니다. 감히 누가 이 사랑의 시험에 합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랑의 찬가에 딱 맞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 대신에 예수를 넣어 읽어보십시오.“예수는 오래 참습니다. 예수는 온유합니다. 예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온전한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마음은 성령님이 내게 오실 때 한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모습은 골짜기의 백합화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지만 그래도 묵묵히 꽃을 피워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의 모습은 가시밭의 백합화와 같은 사람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성도입니다. 그리고 나를 해치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곧 가시밭의 백합화인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사랑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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