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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어찌 할꼬? (행 2: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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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찌 할꼬? (행 2:37~42)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그렇다면 자신들이 과연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설교했습니까? 그 내용이 사도행전 2장 36절 말씀에 아주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는 먼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죽였다는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사도행전 기자가 그들의 마음 상태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들이 마음에 찔렸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그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던 모습과 극히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총독 빌라도가 백성들에게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를 놓아 주고 싶어서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선택했습니까? 빌라도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피에 대해서 자기는 죄가 없다고 발뺌하는 빌라도에게 그들이 뭐라고 외쳤습니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 바로 얼마 전에 그렇게 외쳤던 그들이 며칠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라졌습니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 까닭은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가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극히 불안했을 것입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며 그들은 다만 불안했을 뿐 아니라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성경을 가지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 요엘과 다윗의 예언을 인용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전도할 때 개인의 구체적인 체험이 담긴 간증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간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취급하는 기도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 도취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진짜 핵심이 빠진 설교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로 사라지고 엉뚱한 이야기들만 강단에서 울려 퍼지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에 사람들이 교양 강좌나 들으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교회는 결코 코메디안이나 개그맨들이 설치는 곳도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 주님의 복음만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바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순절 날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어떻게 했습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즉 성령 충만은 예나 지금이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물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그들에게 베드로는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그렇습니다! 구원은 회개에서 출발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의 생각만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돌 같이 굳은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회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 농장을 방문한 샐리와 쟈니 남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쟈니는 할아버지에게서 새총을 하나 얻었습니다. 쟈니는 조그만 돌로 새총을 쏘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솜씨가 점점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보고 충동적으로 그 오리를 겨냥해서 쏘았는데 그만 오리가 죽어버렸습니다. 쟈니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어쩌면 좋지?’ 쟈니는 죽은 오리를 장작더미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누나인 샐리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샐리는 쟈니가 한 짓을 모두 다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점심을 먹고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샐리야! 우리 접시 좀 닦을까?” 그러자 샐리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오늘은 쟈니가 부엌 일을 돕고 싶다는데요. 그렇지, 쟈니?” 
그리고는 샐리는 쟈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오리... 알지?” 쟈니는 할 수 없이 접시를 닦았습니다. 

다음 날 할아버지가 남매를 데리고 낚시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어쩜 좋지? 샐리가 저녁 만드는 걸 거들어 줬으면 싶은데...” 
그러자 샐리는 또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쟈니가 하고 싶다는데요.” 
그리고 또 이렇게 쟈니에게 속삭였습니다. 
“오리...” 

쟈니는 샐리가 할아버지와 낚시하러 간 동안 집에 남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며칠 동안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고 난 후 쟈니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쟈니는 결심하고 할머니에게 자기가 오리를 쏴 죽인 것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쟈니를 꼭 안아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단다. 나는 그 때 창문에 서 있었거든. 나는 너를 사랑하니 용서하마. 나는 네가 왜 샐리에게 꼼짝 못하는지 궁금했었단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심각한 죄에 빠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후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죄를 감추려고 할 때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넌 이제 끝장이야. 넌 저주를 받게 될 거야. 네가 그런 짓을 저지르고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니?’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또한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말로만 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후회하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작년에 우리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 기념 행사를 꽤나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가는 곳마다 ‘어게인(Again) 1907’이라는 구호 일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 어디서도 그 때와 같은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새 사람이 되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 같으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면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널리 전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먼저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절망 중에 빠져 있는 세상 사람들이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그렇게 질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회개를 촉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날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하게 전하고 증언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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