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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4월에 부를 노래 (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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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부를 노래 (시 3:1~8)

1. 4월의 노래

4월, 정말 좋은 계절이지 않습니까? 온 산을 분홍으로 물들인 진달래, 이미 진 목련과 그 뒤를 잇는 개나리와 벚꽃과 철쭉의 향연을 보면서, 저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려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 박목월의 시 “4월의 노래”에 김순애가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해마다 4월이 되어 활짝 핀 목련의 자태를 볼 때면,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는 노래이지요.

그러나 한 때 제게 있어서 4월은 아주 고통스러운 달이었습니다. T.S. 엘리엇(Eliot)이 “황무지(The Waste Land, 1922)”라는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데요. 20 몇 년 전,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3월 한 달은 대학과 객지 생활에 적응하느라고 정신없이 보내다가, 4월을 맞았는데, 그 4월은 동료 학생들의 엄청난 시위와 그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의 최루탄, 먹물포탄, 진압봉으로 너무나 어지럽고 복잡한 달이었습니다. 특히 4․19 의거 기념일을 맞아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수유리 4․19 기념탑까지 ‘4․19 기념 마라톤’을 실시했는데, 이 역시 마라톤 대회가 아니라 하나의 시위였습니다. 그렇게 갓 스물의 4월은 끝없이 이어진 시위와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 등으로 제게는 정말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저처럼, 이 찬란한 4월, 새싹과 꽃들을 보면서 그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기보다는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가정의 심각한 위기로 인하여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고, 남편 때문에 자녀 때문에 우는 이들이 있으며, 갑자기 발견된 몸 안의 종양 덩어리로 충격을 받은 이가 있고, 당뇨 합병증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먹는 대로 설사를 해대는 분도 있습니다. 우연히 넘어져 다친 것 같은데 또 다른 질병이 발견 된 분도 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즐거운 노래보다는 고통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힘들게 4월을 보내는 이들은 생명의 신비와 찬란한 봄과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보다는 삶의 애환을 노래하고, 슬픔과 한숨 속에서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엄청난 삶의 고통에 있었던 한 신앙의 선배의 고백입니다. 그는 그 지독한 삶의 고통의 자리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오늘은 그를 통하여 우리가 불러야 할 이 계절의 노래가 무엇인지를 아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2. 다윗의 노래

1)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오늘 본문은 다윗 왕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본문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지었습니다. 그때가 다윗의 나이 52세였을 때인데요. 다윗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고, 그 반역 때문에 다윗은 가족들과 왕궁과 수도 예루살렘을 버리고 맨발로 도망을 쳐야했습니다.

사실 다윗으로서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5년 간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른 후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려고 군 사령관 요압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려 전쟁터에서 그를 죽게 했습니다. 그 후 맏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인 다말을 겁탈한 사건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다말의 친 오빠인 압살롬이 그 형 암논을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압살롬이 도망을 갔다가 3년 만에 다윗의 용서를 받아 궁으로 돌아왔고, 그 후 1년 만에 다시 아버지를 배신하고 스스로 왕이 되겠다며 반역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아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한 것도 참기 어려운 현실인데, 다윗으로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 더 괴로웠습니다. 그 아들이 자신을 몰아낸 후에, 자신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추적자들과 군대를 보내고 있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젊은 시절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동고동락했던 자신의 신하들, 신하라기보다는 친구나 혹은 피로 맺은 형제 같은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그 배신감은 또 얼마나 컸을까요? 그리고 오늘 본문도 짐작케 합니다만, 대부분의 국민들마저도 다윗으로부터 돌아서서 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반역 사건은 다윗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밧세바 사건을 범한 후에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12:10)”고 예언했던 것과 관련됩니다. 즉 지금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은 자신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아들과 딸들과 부인들이, 나아가 국민들까지 불행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다윗을 더욱 더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3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지은 노래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다윗은 지금 자신의 적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비해,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적은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무리들은 하나님도 다윗을 버려 그를 돕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백성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이렇게 되었으며, 모두들 ‘이제 다윗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다윗 자신도 갈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범한 그 끔찍한 죄로 인해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과거 밧세바와 우리야 사건으로 지은 죄로 인한 당연한 징벌이라고 자신의 양심조차도 고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다시는 ‘성산’, ‘시온산’,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게 된” 절망적인 상황,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그를 버린 것 같은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다윗의 형편입니다. 희망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부르는 노래

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윗은 과거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믿을 구석이 있었습니까?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는 영원한 우방인 이웃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군가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은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웨)”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는 점입니다. 즉 다윗은 현재 자신의 사정이 너무나 안 좋고, 모든 사람들이 ‘다윗은 저주를 받았다’, ‘지금 당하는 일은 다윗의 죄로 인한 당연한 벌이다’, ‘이것으로 다윗의 생애는 끝이다’,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자신의 양심조차도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속삭이는 상황에서 다윗은 “그러나”로 3절을 시작한다는 것이죠. 

“예, 맞습니다.” “저도 견딜 수 없이 괴롭고 부끄럽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지금 말 할 수 없이 괴롭고 힘들고, 저 스스로도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 여호와께서 나를 둘러 둘러 지키시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방패”란 자신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방패가 군인을 둘러싸고서 모든 무기와 공격을 막아내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패가 되심을 그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이 들고 다니는 방패는 단지 한 면만을 막아주지만, 성도의 방패가 되시는 여호와는 모든 면을 다 막아 주십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적들과, 대다수의 국민들과, 심지어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들려오는 그 모든 공격을 하나님께서 막아주고 계신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호와(는) ‧‧‧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라고 노래하는데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 확신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과거의 죄를 두고 두고 갚으시면서 그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위를 내 아들에게 물려주시되 이런 방법으로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기를 붙드는 자를 반드시 회복시키신다.’ 이런 확신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같은 의미지만 이러한 다윗의 확신은 4절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聖山)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여기서 “성산”이란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시온산, 곧 다윗 성이 위치한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다윗을 어떻게 바꾸어놓았을까요? 말만 그럴 듯 하게 하고 현실에서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러나 다윗의 확신은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5절에서 다윗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다윗이 편하게 잠들 상황이 아닙니다. 비록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거나 악몽에 시달릴 수 있는 상황, 불길하고 무서운 꿈을 꿀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또 밤에 자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압살롬의 모사 가운데 신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인정을 받던 아히도벨이 군대 1만 2천을 거느리고 밤에 다윗을 급습하자고 제안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이런 천하태평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천만인이 자신을 둘러치려 하여도 그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현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다윗이 가졌던 이와 같은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하는 불행이나 어려움이 과거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윗이 압살롬이나 자기를 배신한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다윗이 절망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다시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다윗이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만 의지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를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3) 확신으로 가득 찬 노래

다윗은 7절에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쳐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래한 다윗은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고 노래를 잇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원어상 이것이 완료형의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막 반란이 시작된 시점이고, 자신이 황급히 도망하는 가운데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미 원수의 뺨을 치시고 그 이를 꺾으셨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윗의 소망이며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뺨을 친다”는 표현은 수치스러운 형벌을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꺾었다”는 것은 원수가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나의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며, 적들을 굴복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확신 때문에 다윗은 가장 괴롭고,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양심조차도 끝이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확신에 찬 밝고 즐거운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이 말만큼 추상적인 단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는 믿음은 “소망”입니다. 중세 시대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을 ‘대죄’, 즉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 힘든 일을 이길 것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수 있으며, 고난 중에 인내하는 것이며, 결국 그가 믿고 바라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화약고라고 하는 중동의 레바논에서 6년 반 동안 인질로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AP통신 중동 지국장 ‘테리 앤더슨’이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레바논의 테러분자들은 앤더슨 기자를 감옥에 가두어놓고 고문하며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서방 세계를 위협할 때마다 처형대상자 명단에 항상 그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앤더슨의 몸은 가둘 수 있을지라도 마음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옛 신앙을 회복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한 말은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였습니다. 앤더슨 기자는 그 절망적인 상황,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소망은 그에게 믿음을 주었고, 결국 그 소망대로 건강하게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윗이나 신앙의 선배들처럼, 소망의 노래, 즐거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믿음대로, 그 노래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다고 푸념하면 그 푸념대로 됩니다. 한숨 쉬면 계속 한숨 속에 머물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원망과 불평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하면 여러분은 정말 절망적인 상황에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노래, 소망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리하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3. 우리가 부를 소망의 노래

말씀을 맺겠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계절인 이 4월에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외로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오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윗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동고동락했던 친구들도 배신했습니다. 온 백성들이 자기로부터 돌아서서 압살롬을 지지했습니다. 사람들 뿐 아니라 자신의 양심까지도 ‘다윗은 끝났다’, ‘다윗은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잔인한 현실에서 다윗이 부른 노래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였습니까?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노래였습니까? ‘인생 만사 허무하다’는 허무가(虛無歌)였습니까? 적들을 저주하는 저주의 노래였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을 도우실 것이고,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며, 승리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다윗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왕위에 앉았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왕 앞에서 회개하여 민심을 수습하면서 새로운 출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믿고 노래한 대로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믿음, 이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고난이 심하고, 환난이 견딜 수 없고,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이 크고, 여러분의 양심조차도 손가락질하는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들이 부를 노래는 소망의 노래입니다. 확신의 노래입니다. 그러면 그 노래는 반드시 그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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