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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빠하고 나하고(1) (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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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하고 나하고(1) (롬 8:12~17)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미있게 뛰어 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보고 살자 그랬죠 날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어효선님 작사, 권길상님 작곡 ‘꽃밭에서’ 라는 동요입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참 많이 불렀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동요입니다.
이 동요를 부르면서 노랫말이 참 아름답고 곱다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노랫말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무엇입니까?

아빠의 사랑입니다.
아빠의 자상함입니다.
아빠의 푸근함입니다.

아빠가 만들어 주신 꽃밭에서 뛰어노는 데 아빠가 이전에 말씀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빠가 나보고 꽃보고 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날 보고 꽃같이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날 사랑하시면 그렇게 살라고 하셨을까요?

흔히 부모님의 사랑하면 영원한 레떼르가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지만 아빠의 사랑은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는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로마서 26번째의 강해를 통하여 설교의 서두에 난데없이 아빠의 사랑을 말하는 동요를 부르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들의 육신의 아빠만 그런 사랑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도 그런 아빠가 또 한 분 등장하기 때문에 설교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빠를 여러분에 소개하면서 ‘아빠하고 나하고(1)’이라는 제목을 갖고 로마서 강해의 26번째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15-16절은 오늘 본문 성경의 주제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친히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언해 주신다고 선언을 하시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을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신 ‘아빠’의 개념을 살펴보십시다.
헬라어 본문에 아빠라는 단어를 ‘abba’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원래의 이 단어는 아람어입니다.

아람어의 어원을 갖고 있는 ‘아빠’라는 단어는 교부이자 어거스틴의 스승이었으며 안디옥교회의 감독이었던 크리소스톰의 해석에 의하면 당시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대하여 불렀던 명칭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별 시시한 내용을 굉장히 어렵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아빠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 14-15절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출애굽기 3:14절 이하가 무슨 기사입니까?
모세가 하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내가 바로에게 갔을 때 바로가 너를 보낸 자가 누구냐고 질문을 하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시면서 대답하신 기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나는 여호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라는 아람어는 원어에 ‘ 예호바'라고 쓰여 있습니다.
'예호바' 라는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부를 수 없는 존귀한 이름이었습니다.

자음 4글자 ‘YHWH' 라는 이름은 감히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기에 모음만 모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불렀던 단어가 ‘아도나이’입니다.
이 단어는 ‘주’라는 단어로 우리나라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가 왜 복잡한 하나님의 이름의 어원에 대하여 기본적인 것이라도 우리 교우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의 ‘아빠’라는 호칭에 대하여 이해를 더욱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감히 부를 수 없었던 하나님, 그래서 대신 아도나이라고 불러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배경에 지금 바울은 아주 놀랍고도 놀라운 수식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서슬이 시퍼런 시대에 그것도 당대의 최고의 심장부인 로마 교회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앞에 수식어를 붙여서 부르는 존재들이 되었음을 아주 담대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용어 앞에 ‘아빠’의 용어를 붙이는 정도가 아닌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세 가지 정도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늘은 그 첫 번째의 의미를 그리고 다음 주에는 나머지 두 가지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아빠하고 나하고의 관계가 부자녀지간 (父子女之間)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두 구절은 참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됩니다.
14절 본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6절을 연이어 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령 안에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위대한 선언입니다.
에베소서 2:1-2절에서 바울은 우리들의 신분을 이렇게 정의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들의 신분이 어떤 신분이었습니까?
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② 세상의 풍조를 따르던 존재들이었습니다.
③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라 다녔습니다.

이 세 가지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어지는 에베소서 2:3절은 이렇게 갈파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서 어떤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진노의 자녀들이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이렇게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에 대한 증언자임을 바울은 밝히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흔들림이 없이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빠 하나님과 나는 영적인 1촌 관계입니다.
아빠 하나님과 나하고는 부자녀지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녀지간의 의미는 영적으로 나에게 어떤 은혜가 있습니까?  

① 아버지를 믿고 당당하게 세상에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말 할 때 가장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누가복음 15:11-32절까지 기록된 우리가 잘 아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이니까 본문의 내용을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비유 중에서 한 가지만 오늘은 묵상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5:20절을 주목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잘 아시는 것처럼 모든 물질을 탕진한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고향의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냉대를 받으면 어떻게 하나, 내침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아마 만 가지의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 멀리 아직도 먼 거리인데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집에서 달려 나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기사의 압권은 아버지의 행동인 '달려가'입니다.
‘달려가’ 라는 단어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의 그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아들을 기다렸던 아버지.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계신 아버지,
언제나 돌아올까 하는 애타는 사랑의 마음,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단어가 ‘달려가’입니다.

이 부분을 어떤 영어번역에는 "His heart went out to him"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의 마음이 그에게 달려 나갔다.’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어겨 철저히 실패한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단 한 번도 마음이 떠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아버지의 이 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자식들을 다 키웠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에게로 달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 하나입니다.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의거하면 말하면 아빠 아버지입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우리는 그래서 우리 아빠 아버지를 의지하면서 당당하게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아들 이야기를 하나하겠습니다.
제천고등학교 3학년이 끝나는 시간이 저녁 11시 10분입니다.
작년에 비해 1시간이 줄었다고 학생들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해석의 난감함을 느꼈습니다.
여하튼 11시 10분에 끝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아내가 데리러 갑니다.
저는 새벽예배를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잠에 들고 아내가 고3이 되어 아들을 뒷바라지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아들과 친한 친구 2명이 같이 방과 후에 나오는데 한명은 집이 화산동이고, 또 한 명은 명동인데 같이 나오니 할 수 없이 동승을 시켜 데려다 주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명동에 사는 친구 한 명은 방향이 같으니까 별 문제가 없는데 화산동이 집인 친구는 매 번 데려다 주는 것이 쉽지 않지 않습니까?

조금은 불편한데 아들 친구가 차를 타면 상당히 미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는 제가 한 번 데리려 간 적이 있는데 아내의 말이 맞았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차를 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이제껏 그 늦은 시간에 아내가 잠도 못 자고 자기를 데리려 가는데 단 한 번도 미안해하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오히려 고 3 아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엄마가 되가지고 이 정도를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떳떳해 합니다.

아주 당당합니다.
왜 이렇게 당당합니까?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아들의 친구를 화산동까지 데려다는 주는 것은 불편합니다. 
시간이 아깝습니다. 낭비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당당하게 나와도 한 번도 고생한다고 불평을 하거나 생색을 내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간단합니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높은뜻숭의교회 담임목사인 김동호목사의 설교 중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큰 아들이 한동대학교를 다닐 때 아들을 믿고 신용카드를 하나를 주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먹고, 읽고 싶은 책 사고, 조금은 공부하는 데 편안하게 하라고 주었습니다.

한 번은 한동대 강의를 하기 위해 내려갔는데 아들이 바짝 말라 있어서 물었습니다.
왜 이리 말랐느냐고 먹는 것 잘 먹고 몸 축나지 않게 하라고 아빠가 신용카드를 주지 않았느냐고 걱정스런 모습으로 아들에게 말을 했더니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의 신용카드에 들어와 있는 돈이 얼마나 귀한 돈인데 제가 막 써요. 괜찮아요. 견딜 만 해요.’

그 날 설교에 김목사님이 했던 말이 기억에 생생하게 있습니다.
“아들이 아빠 생각해서 신용카드에 돈도 꺼내 쓰지 않고 바싹 말라 있는 것 보니까 아들이 하나도 기특하지 않았다고. 도리어 화가 났다고. 아들이 잘 안 먹고 말라 있는 것 보니까 가슴이 아팠다고.”

왜 가슴이 아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아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아빠를 근심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아빠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움츠려 살면 아빠는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아빠는 아들이 잘 먹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아빠는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잘 먹고 마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그 날 그 분의 설교를 들으며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자녀인 우리들이 다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영적인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으면 기분이 아주 나쁘실 것이다.”

아빠 아버지의 사랑을 어찌 한 개인 목사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재강조하면서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빠이십니다.
아빠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면서 당당하게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하나님과 부자녀지간으로 세상에서 당당히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빠를 좋아해야 합니다.  

아빠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은 아빠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빠가 원하는 모습으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빠가 원하는 모습으로 닮아가는 방법을 본문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조금 더 세밀하게 요약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7-8절을 다시 곱씹어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사는 특권을 가진 자녀라면 우리는 당연히 육신대로 살지 말고 아빠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성령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대로 사는 것을 저는 아빠를 닮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엘리사를 아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엘리야라는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의 선지자였던 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적인 계보를 이은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부여 받으며 선지자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장면은 드라마 중의 드라마입니다.

엘리야가 이제 하나님의 품으로 올라가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길갈에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이 길갈에서 벧엘, 요단, 여리고로 가야 하는데 너는 여기 길갈에서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왕하 2:2-6절을 보면 무려 세 번씩이나 엘리사에게 길갈에서 머무르고 나를 따르지 말라고 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승의 말을 엘리사가 거절을 합니다.
거절을 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강하게 말하는 내용이 왕하 2:6절 후반절에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

스승의 말을 거절하는 제자가 세상이 어떻게 제자입니까?
그런데 제자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권면을 거절하고 그를 따릅니다.
마침 엘리사를 따르던 50명의 선지자 생도는 멀리서 더 이상 따르지 않고 요단강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왕하 2:7절입니다.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를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승천하게 될 시간이 가까이 이른지를 알고 마음이 급하여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원했던 것을 왕하 2: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엘리야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를 갑절이나 달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면서 겉옷을 남겼고 엘리사는 영적인 선지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엘리야의 겉옷을 입고 엘리야에 이어 하나님의 역사를 아주 귀하게 감당하는 능력의 종이 되었던 것을 압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항상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도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승천도 아니요, 엘리사의 능력을 부여도 아닙니다.

왜 끝까지 같이 하려던 선지자 생도 50명은 멀리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는가의 탄식입니다.
이런 아쉬움입니다.

선지자 생도 50명이 엘리사처럼 요단 가에 끝까지 가서 엘리야의 승천을 보며 동일하게 능력을 사모했다면 엘리야의 능력의 부스러기라도 차지하고 엘리사 한 사람이 역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더 귀하게 감당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 탄식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엘리사가 엘리야의 3번에 걸친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은 이유는 스승이었던 엘리야가 싫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받고 싶은 정도로 엘리야를 닮고 싶었고 그를 좋아했습니다.

좋아하고 사모하면 닮게 됩니다.
싫으면 닮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중간 정도로 생각하면 멀리서서 바라만 봅니다.
거기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방관하는 삶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모하고 닮고 좋아해야 역사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당당히 승리하려면 아빠를 좋아해야 합니다.
아빠를 사모해야 합니다.
아빠를 적당히 좋아하는 자들이 되면 안 됩니다.
아빠를 정말로 좋아해야 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그림 하나를 보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홈페이지에 사랑방 1570번 그림)  

이 그림을 김 집사께서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다가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떤 성도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부쳐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크게 소리를 쳤습니다.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그런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 여기에 있다.’
‘누구세요?’
‘나 하나님이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다.’
‘살려주세요?’
‘그래 염려 말고 손을 놓아라!, 내가 구원해 주마, 손을 놔라!’

조금 있다가 그 성도가 소리를 쳤습니다.
‘누구 다른 분 없어요?’

교우 여러분!
주님이 우리들의 아빠이심을 정말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아빠를 믿고 손을 놓고 세상에서 당당히 승리하십시오.
그리고 아빠를 정말로 사모하고 닮으십시오.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내 이름 아시죠' 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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