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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소리가 들리나요? (눅 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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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가 들리나요? (눅 15:11~23)
 
사람들은 누구나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리고 오늘 보다는 내일이 좀 더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결혼할 때 신학교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나는데 ‘자그만하게 시작해라.’ 처음부터 다 갖추고 시작하면 살면서 나아지는 맛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걸 다 갖추고 시작하려고 하지 말고 가능한 선에서 필요한 것들만 사고, 남들 하니까 우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집도 두 사람 살면서 좁아서 부딪치지 않을 정도면 되니까 욕심 부리지 말고 시작해라 그러셨었습니다. 그래야 살면서 하나 둘 필요한 거 더 장만하고 조금씩 더 나아지는 재미가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목표를 정해 두고 그 목표를 향해서 조금씩 더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 기도의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그 목표가 내 대에서 되지 않으면 자녀들 대에 가서라도, 적어도 자녀들은 나보다 낫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나는 누리지 못하고 나는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면서 자녀들은 나보다 좀 더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저와 여러분 모두의 바램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바램은 좀 다릅니다. 우리의 바램이 그렇게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삶을 향해 있다면 하나님의 바램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바램을 향하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거기에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쌓아서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린 나의 자녀들을 되찾아 품에 안는 기쁨을 간절히 찾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 에서 아버지의 그런 지극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나누면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아버지의 그 마음과, 우리는 듣지 못할 수도 있는 그들의 부르짖는 작은 소리에까지 귀 기울이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오늘의 본문은 어떤 유대인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 몫이 될 유산을 좀 미리 달라고 하여 먼 나라로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2절의 ‘아버지여 재산 중에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라는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때 받게 될 유산을 지금 좀 미리 달라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데 이것은 잘못된 행동이었고 아버지에게 참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13절에 보니까 그 후 며칠이 못 되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 버리고 맙니다. 

이런 아들 어떠십니까? 그렇게 나갔으면 가서 잘 살기라도 할 것이지, 13절 후반부에 보니까 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14절은 급기야 그 나라 전체에 흉년까지 들게 되고 집을 나간 아들은 굉장히 궁핍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때부터 집나간 이 아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좋았겠지만 모든 걸 탕진하고 흉년까지 겹치고 나자 어느 누구도 그를 반겨 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둘째 아들은 유대인이라면 결코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치는 일자리를 구하게 되고 오랫동안 굶주렸기에 돼지에게 주는 쥐엄 열매로 라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그것조차 양껏 먹을 수 없는 불쌍한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 세상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거나 엉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나름대로는 다들 잘 해보려고 합니다. 단기적인 계획부터 시작해서 장기적인 계획까지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삶의 목표를 정하고 부지런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조용히 뒤 돌아 보면 ‘그 땐 내가 왜 그랬을까? 참 어렸구나!’ 하면서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세월, 지금의 삶의 자리, 지금의 위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삶이 종이와 연필로 다시 써서 쓸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말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해서 써 보고 싶은데 삶이란 그렇게 돌이켜 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날려버린 아들은 얼마나 자신의 지난 삶이 후회스러웠을까요? 호언장담하면서 가지고 나온 아버지의 재산인데 몽땅 탕진했으니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재산도 친구도 다시 일어서고야 말겠다는 재기의 용기마저 모두 잃고 털석 주저앉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망쳐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돼지의 쥐엄 열매를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면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게 된 바로 그 순간 그는 이제까지 잊고 살았던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따스한 품을 추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집이 참 좋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17절은 ‘이에 스스로 돌이켜’ 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을 비로소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 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처음부터 죄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해도 인간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지막 한 자락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후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본성이 담겨져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원형, 하나님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죄인 된 본성도 있지만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거룩한 본성, 아버지의 그림자가 언제나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와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조용히 마음속에 떠 올려 보십시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은 믿지 않는 나의 남편, 그렇게 교회 좀 가라고 말해도 가지 않고 버티는 다 큰 아이들, 이제는 연로하신 고향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잃어버린 사람들이며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입니다. 

20절에 보면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허비해 버린 부끄러운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그가 이제까지 소중히 여기던 다른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지만 그는 그제야 아버지의 품과 아버지 집의 안전함을 그리워하면서 부끄러운 걸음이지만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께서 아들로 받아주지는 않더라도 그저 품꾼의 하나로라도 받아주시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0절에 보면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갑니다. 달려가 짐 싸들고 집나가면서 이제까지 속을 새까맣게 태운 그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웁니다. ‘너 이 놈 어딜 들어오려고 하느냐?’ 라든가 ‘니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완전히 깨달을 때 까지는 내 집에 단 한 발도 들여 놓을 수 없다!’ 라든가 ‘가져간 재산을 다 허비하다니! 아이고 이놈아! 그 많은 재산 다 어떻게 할래?’ 라고 단 한 마디 말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아들을 안고 웁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엽니다. 여러분! 이것이 잃어버린 이방인들을 향하여 쓴 복음서, 누가복음이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가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말입니다.

최근에 안양 우예슬양의 유괴와 살인 사건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도 이제 자녀가 있고 자녀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니까 남의 일처럼만 생각되었던 그런 일들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 예슬이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그 마음이 까맣게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도록 얼마나 마음 졸이면서 기다렸겠습니까? 그것이 이 땅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많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밥도 먹고 농담도 하면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지금도 애타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우뚝 선 주님의 십자가는 여러분과 저를 위한 교회만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 우뚝 선 이 땅의 모든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십자가란 말씀입니다.

상시전도팀과 거리전도를 나가면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거리에 서면 그 거리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공허한 소리들이 가끔 아늑하게 메아리처럼 들려옵니다. 송화시장 앞이나 우장산 사거리에 서 보면 온갖 얼굴 표정인 사람들을 마주 보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금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씩 씩 거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도 있구요, 어떤 사람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거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구요, 무표정에 생기 없어 보이는 사람, 땅 바닥만 보고 가는 사람 등 그들은 모두 어디론가 바쁘게 지나가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냥 교회 안에만 있고 또 일상의 삶에 매여 살다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 쉽지 않은데 거리전도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더 기도하게 하고 더 간절하게 합니다. 처음엔 거리에서 티슈와 전도지를 나누는 일이 참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리전도는 우리의 전도지를 받아서 가는 사람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참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는, 교회로 와도 그만 오지 않아도 그만인 수 십 수백의 사람들 중 단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그들 모두가 잃어버린 나의 자녀이며 이름 불러 기억하고 있는 사랑스런 자녀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취업이나 직장 문제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의 직장 문제에 대해서 아파하시며, 그리스도인 자녀들의 고통이나 가난, 전쟁과 기근의 문제만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이웃들의 고통 받는 삶의 현장에 대해서 동일하게 아파하십니다. 우리는 마치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첫째 아들이 돌아온 아들 때문에 호들갑을 떠는 아버지나, 집 나간 녀석이 언제 돌아올까 매일 마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듯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분명 하나님은 오늘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탄식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지금도 간절히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 그것을 거리전도를 위해 거리로 나서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 매여서 오늘도 살아가고 조금 더 갖고 조금 더 나은 삶을 바라면서 바쁘게 살아가지만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걸 바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바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께서 지금도 당신들을 사랑하며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전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채 인생이라는 무거운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오늘도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가족과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의 이웃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며 바로 오늘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전해주길 원하고 계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9절에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둘째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난 후에 아버지는 단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매일 밤마다 어쩌면 환청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위험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 비명을 들으며 몇 번이고 밤잠을 설치면서 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또한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귀를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들입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잃어버린 자들 안에서 그들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 성령님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내 가족의 일인데 나는 기도하지 않고 있다 해도, 내 친구의 일인데 나는 기도하지 않고 있다 해도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 성령님의 기도소리가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저의 바램이 우리를 위한 바램만이 아닌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으로 옮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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