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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슬을 머금은 땅처럼 (사 2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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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을 머금은 땅처럼 (사 26:12~19)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성취한 모든 일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까지는 주님 말고 다른 권세자들이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기억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어 멸망시키시고, 그들을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게 하셨으니 죽은 그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사망한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 민족을 큰 민족으로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나라를 큰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습니다. 이 일로 주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실 때에, 주님의 백성이 환난 가운데서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마치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서,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이, 주님,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렇게 괴로워하였습니다. 

우리가 임신하여 산고를 치렀어도, 아무것도 낳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이 땅에서 살 주민을 낳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 들리는가, 저 노랫소리?

길을 걸어가는 젊은이들의 구부정한 등을 보면 왠지 안쓰러운 생각이 듭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젊은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거리를 걷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꿈은 마음의 등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이 제 아무리 고약해도 꿈이 있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날에 대한 전망조차 불가능한 오늘의 젊은이들은 불온할 수조차 없습니다. 

작년에 국가청소년위원회는 청소년들의 가치관을 조사해 발표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아이들은 ‘신뢰’와 ‘행복’이라는 단어는 매우 낯설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14년 전의 청소년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생각인가?”라는 질문에 ‘가족 행복-스스로의 만족-사회․국가 봉사-명예-부-권력’ 순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청소년들은 ‘가족-건강-돈-친구-종교-학력’ 순으로 꼽았습니다. 

건강과 돈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지금 우리 사회의 실상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행복 혹은 인생의 보람을 돈에서 찾는 세상은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요? 행복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아이는 겨우 19%였다니,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한겨레 21>, 703호, 61ff)

이 아이들에게, 그리고 청년들에게, 더 나아가서는 어깨가 구부정한 채 세상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등뼈를 세워줄 길은 없는 것일까요? 우울한 悲歌만이 들려오는 세상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은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이거나, 예언자일 것입니다. 여기 나라의 멸망이 예견되는 엄혹한 시기를 살았던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는 유다 땅에서 들려올 노래를 비전을 통해 듣습니다.

“우리의 성은 견고하다. 주께서 친히 성벽과 방어벽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문들을 열어라. 믿음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하여라.”(사26:1b-2)

위기가 닥쳐올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전쟁도 위기이고, 가난도, 질병도, 실패도 위기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무너짐보다 더 큰 위기는 없습니다. 마음만 곧추 세울 수 있다면 어떤 외적인 위기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지금 전쟁의 위기 그 너머를 보고 있습니다. 시련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너머를 보고 있는 한 절망할 수 없습니다. 참혹한 시련이 다가온다 해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려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결코 낙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36:9). 시인의 이 고백은 우리 영혼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 희망의 뿌리

당신을 의지하는 이들에게 견고한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교만한 자들의 견고한 성을 허무시는 분이십니다. 제 힘만 믿고 제멋대로 처신하는 이들은 바닥까지 낮아질 것입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전복적 상상력의 보고입니다. 독재자들이 성경을 금서목록에 넣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말은 참 강력합니다. 예언자는 교만한 자들의 견고한 성이 무너져 내려 억압받던 이들이 그 잔해를 밟고 다니는 광경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seer’, 즉 ‘보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에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힘 있는 자들의 오만한 웃음소리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언자가 믿는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의 길을 평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굳게 다짐한 사람, 돈과 권력과 연줄이 아니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늘 마음 쓰는 사람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기를 닮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어둠을 드러내거나 상기시키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걷는 길을 ‘좁은 길’이라 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의 길을 평탄케 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취소되어야 할까요? ‘평탄’을 쉽고 안이한 삶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말은 취소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평탄을 영혼의 자유라고 받아들여도 된다면 이 말은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8:32)이라 하셨습니다. 찬송가 383장 2절은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고난의 가시밭길이라 해도 그 길을 통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평탄한 길입니다. 

어려움이 많을수록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모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세상의 무질서를 질서로 바꿔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악인들은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배우고, 의인들은 하나님의 샬롬을 맛보는 날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악인들은 고통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합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그들 위에 높이 들려 있는 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옛말에 “진실하면 (선에) 밝아지고, (선에) 밝아지면 진실해진다”(誠則明矣 明則誠矣, <<中庸>> 21장)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려운 때일수록 진실하려고 애씁니다. 바로 그때 하늘의 빛이 그에게 유입됩니다.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 기억의 회복

위기의 시간에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까지는 주님 말고 다른 권세자들이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오직 주의 이름만을 기억하겠습니다.”(사26:13)

‘다른 권세자들’의 지배를 받던 삶은 끝이 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세자들은 ‘우상’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지배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로는 달콤한 말로, 때로는 힘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권세자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영혼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이름만을 기억하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세상 무엇에도 매인 데 하나 없는 자유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 없습니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교리로 얽어매고, 제도로 얽어매서 사람들로 하여금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종교는 이미 타락한 종교입니다. 타락한 종교는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조종합니다. 하나는 공포심입니다. 저주 받을까봐 혹은 지옥에 갈까 무서워 믿는 사람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하나하나 셈하고 계시다고 믿는 이들의 믿음은 기쁘고 행복한 믿음이 아닙니다. 타락한 종교의 다른 무기는 욕망 부풀리기입니다.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은 복을 갈망합니다.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가리키는 복은 소비사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욕망 충족과는 다른 것입니다. 진짜 복은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 뜻을 알고 사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실한 신앙의 사람은 독립의 사람입니다. 그는 외부의 힘이 자기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행할 뿐입니다. 그는 삶의 매 순간 주님을 기억해내려고 애씁니다. 주님이 주신 본성을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인도의 큰 스승 비노바 바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세 가지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정신에는 지각의 능력을 주셨고, 위장에는 배고픔을 주셨고, 마음에는 보편적인 동정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각의 능력은 알겠는데 배고픔은 또 뭔가 싶지요? 정신을 벼리려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중의 하나가 배부름입니다. 위장이 조금 비어야 정신은 명징해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또한 자기에게서 벗어나 이웃을 향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리고, 그들의 슬픔을 같이 슬퍼합니다.

● 흙 한 줌 이슬 한 방울

하지만 주님만을 기억하며 살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현실의 곤고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곤 합니다. 마치 해산할 날이 가까운 여인이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주님 앞에서 괴로워해 보아도 우리는 자기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희망은 영 없는 것입니까? 역사는 그냥 그렇게 나락을 향해 가는 것인가요? 예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내뱉는 절망의 애가를 부활의 송가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 그러셨던 것처럼 지금도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인간의 욕심과 폭력으로 팍팍해진 땅, 불모의 땅에 새벽에 맺히는 이슬처럼 다가오시어 이 땅을 새롭게 하십니다. 김현승 선생님의 <흙 한 줌 이슬 한 방울>이라는 시를 아십니까? 

온 세계는/황금으로 굳고 무쇠로 녹슨 땅, 
봄비가 내려도 스며들지 않고/새소리도 날아왔다 
씨앗을 뿌릴 곳 없어/날아가 버린다. 

온 세계는/엉겅퀴로 마른 땅, 
땀을 뿌려도 받지 않고/꽃봉오리도/
머리를 들다/머리를 들다 
타는 혀끝으로 잠기고 만다! 

시인이 볼 때 세상은 ‘황금’으로 표상되는 물질주의와 ‘무쇠’로 표상되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봄비조차 스며들 수 없고 평화의 씨앗을 뿌릴 곳조차 없는, 엉겅퀴가 우거진 불모의 땅처럼 보입니다. 시인의 탄식이 이어집니다.

우리의 흙 한 줌/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가슴에서 파낼까? 

우리의 이슬 한 방울/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눈빛/누구의 혀끝에서 구할까? 

우리들의 꽃 한 송이/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얼굴/누구의 입가에서 구할까?

시인의 질문은 어쩌면 우리가 흙 한 줌이 되고, 이슬 한 방울이 되고, 꽃 한 송이가 되어야 한다는 초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 가슴에 하나님의 은총의 이슬이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불모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인의 이 질문은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척박한 세상에 당신의 샬롬의 씨를 심을 땅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팍팍한 땅을 촉촉하게 적셔줄 이슬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한 송이 꽃처럼 세상을 환하게 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가슴 벅찬 초대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이런 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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