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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요 6: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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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요 6:54~55)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뱀을 통하여 인간을 유혹하려는 사단의 술책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인 고로 뱀은 먼저 여자인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미혹하였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접근할 때 하와도 알고 있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을 건네면서 다가갔습니다. 하와는 평범한 질문이요 대화이기 때문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질문에 대답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도구인 뱀의 미혹에 넘어간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선악과에 대해서 복숭아나 무화과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어떤 나무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취 목적에 이용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남편인 아담에게도 그 열매를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담과 하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와는 대조적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지극히 작은 명령조차 지키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 범죄의 자리에 빠졌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황급히 에덴 동산 밖으로 쫓아 내셨습니다.

창 3:22,23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생명 나무 열매에 대하여 요술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생명과에 손을 대고 육체적으로 그것을 따 먹으면 그는 그의 생명을 해할 어떤 병이나 사고의 결국에 불감수적인 존재로 될터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상징적 성례적으로 이해합니다. 생명과는 사람이 영생의 소망을 가지는 때에 먹을 수 있는 생명의 상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상징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실현하는 유형하며 실체적인 성례들이라 합니다(박형룡 교의 신학)

길거리에서 방랑하는 어린아이가 어린이 보호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새 옷과 새 신발, 새 책 등 여러 가지 새 물건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낡은 모자를 벗기고 새 모자를 씌워 주려 하자 아이는 자신의 모자를 움켜쥐고는 사람들이 그 모자를 갖고 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그 아이는 모자의 안감을 손으로 뜯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된  내 모자의 이 안감은 나의 어머니의 옷으로 만든 거예요. 이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남겨 준 유일한 물건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이에요." 그 아이의 모자 안감은 단순히 색이 바랜 옷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상징이었습니다.

  빵과 포도주도 신성한 성만찬의 상징입니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에게 영원한 예수님의 임재를 생각나게 해주는 거룩한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 왔는데, 이는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무리를 광야에서 먹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만이 가능한 일이었기에 예수께서는 한 소년이 가져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목격한 무리는 예수를 찾아다녔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실 분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는 이방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으므로 정치, 경제적으로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이시자 무리는 예수를 왕으로 삼으면 먹는 문제가 해결될 젓으로 믿고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증거한 메시야에 대한 왜곡된 사상이 있었습니다. 즉 메시야를 현세적인 복을 주는 존재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실을 아시고 그들이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닌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자신을 찾았음을 말씀하시면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는 예수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임을 증거하시면서 자신을 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며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함은 곧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에게 영생의 복이 주어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떡이심을 밝히시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만나는 사람들이 먹고 육신의 생명만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예수 자신의 살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만나가 예수 그러스도를 대표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은 성도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식으로 그 의식이 세워졌고,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신앙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구속 사역을 믿는 자에게는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을 부여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와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 말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수군거렸습니다.  
   '물질적 떡'을 바라고 자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하늘의 떡'을 믿음으로 먹을 것을 권고하신 주님은 그 떡의 성질을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의 본질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신앙이란 유대인의 의식적 차원과 그리스 문화의 철학적 명상의 차원을 넘는 것으로서, 육체로 현현하신 하나님의 '피와 살'에 참예하는 생명적인 차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지닌 의의입니다.

   믿음이란 생명의 떡 예수를 '먹는 것'이라는 주님이 설명 합니다

(요6:47-51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대부분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발했습니다

(요6:52절)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실 하나님의 사자인 '인자'(단 7:13)를 대망했으나 정작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 5:17,18)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리스의 극단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가진 이방인들도 '선하고 거룩하신 신이 어떻게 더럽고 악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실 수 있느냐고 불신했습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래서 이방 세계의 초기 기독교회 내에서도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주인의 육체는 환상일 뿐'이라는 이단들이 성행했습니다

(요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주님께서 주신 '내 살을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나를 육체로 오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적 대상이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삶에 들어오신 절대자 하나님의 요구에 생명을 걸고 응답하면서 헌신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롬 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불의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그 교제에는 조건이 있는데, 바로 '피의 제사'로서 죄를 속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속죄의 개념을 유대인은 성전의 동물 제사로 이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내 피를 마시라'는 요청의 의미는 '너희가 그림자와 의식으로 갈망하던 그 속죄자가 바로 나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만찬 예식의 참예했다고 해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란 나의 유일한 속죄자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매일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의 불의한 옛사람은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죽어 버렸고, 의와 영광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롬 6:6-11)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러한 신앙만이 영생하신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시켜 줄 성도의 삶의 방편이요 양식입니다.

요 6:53-5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성육신하신 절대자와 속죄자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명으로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요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살과 피로 맺은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요, 부부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도 바로 그와 같은 생명적인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엡 5:31-33)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뉴멕시코 알바버지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장로교회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 요양원에는 아주 감동적인 역사가 있는데 한 건강하지 못한 신학생이 어떤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이 그 아가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건강이 나쁘면서도 그 아가씨의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신학생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마음을 주었는데 이 신학생은 점점 더 폐가 약해져서 요양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장로교 신학생이니까 장로교회 요양원에 가서 있게 됩니다. 건강이 돌이킬 수 없이 점점 더 나빠져서 그 아가씨의 부모들은 딸에게 그 청년을 단념하라고 건강 때문에 결혼생활을 할 수도 없고, 아마도 얼마 살지 못하고 결혼 전에 죽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에게 가장 기쁜 영혼의 사랑을 준 사람인데 내가 그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해서 멀리 버지니아에 살고 있었던 그 아가씨는 뉴멕시코 요양원으로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원장의 서기 일을 보면서 그 월급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치료비를 대면서 지극한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병이 점점 더 악화되어 이제 일주일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급하게 그곳에서 일하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죽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때 목사가 물었습니다.

 “이제 일주일 안에 죽을 것 같은데 왜 이 사람을 놓고 결혼식을 올리게 해달라고 하느냐?” 

그랬더니 “이제 그가 죽으면 그의 흔적을 내 몸과 마음에 남기고 싶은데 그의 성을 내가 따르게 될 테니까 내가 그 흔적인 그의 성을 내 이름으로 가지고 평생을 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빨리 결혼하고 싶다.” 

미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야 됩니다. 그래서 그 목사도 할 수 없이 급하게 결혼식을 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정대로 며칠 있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서 그의 아내가 직접 조가를 불렀습니다. 

“내가 요양원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그는 일주일 살았던 자기 남편과 사랑을 나누던 그 요양원을 떠나지 아니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90세가 이르도록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서 그곳을 찾아오는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헌신을 하면서 평생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이 젊은 청년과 같이 젊은 나이에, 30대 초반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셨는가? 오늘 우리 성찬은 그런 마음의 믿음의 기초를 가지고 받으심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영원히 주님이 내 몸과 마음에 흔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거룩한 예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반면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충성하며 사신 것처럼 우리들도 생명을 바쳐 '죽도록 충성'(계 2:10)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사명은 율법적 선행과 철학적 지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의식에서 발로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옛 율법 종교의 생명보다, 그 생명의 본질이신 자신을 얻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영원히 살리라(요6:58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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