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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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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23)

  부활주일을 지나고 맞이하는 첫 주일입니다.  한 주간 부활신앙의 유익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지냈는지요?   일년에 한 번 맞이하는 부활주일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매 주일이 부활을 기억하며 모이는 날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을 주님의 날(주일)로 정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여 기도하기를 힘쓰고 집에 모여 떡을 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감사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이 갈수록 심하였지만 성도들은 부활의 믿음으로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 오늘날 우리들도 주께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의 날에 교회에 모여 부활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부활주일에만 아니라 항상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이 거칠고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 보이신 날의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날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가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물을 던지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을 갈릴리에 버려두고 따라 나섰던 그들이었습니다.   3년 반 전에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 동안 주님을 따르며 경험했던 많은 일들을 추억하면서 오랜만에 돌아와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말 없이 그물 던지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들은 그날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약 삼 년 반 동안 선생님을 따르느라 그물 던지는 일을 중단해서 그물질이 손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일까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처럼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돌아가야 할 정도로 녹이 슨 고기잡이 기술은 아닌데 아무튼 허무한 날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날이 새어가는 시간에 마침 주님은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잡은 고기가 좀 있느냐?’ 물으신 주님은 아무 것도 없다고 대답하는 그들에게 ‘배 오른 편으로 그물을 던지면 얻을 것이다’ 하십니다.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졌을 때 고기가 많아 그물을 던질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요한이 먼저 알아차리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하자 베드로가 곧장 물위로 뛰어들어 예수께로 갔고 다른 제자들도 배를 타고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예수께서는 먼 동이 터오는 아침에 이미 바닷가에 숯불을 피워놓고 거기에 제자들을 위해 떡과 물고기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후줄근하게 물에 젖은 베드로와 밤새 고기 잡느라 지쳐있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 먹으라’ 하시니 자기들을 아침 식탁에 초청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누구시냐?’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떡과 물고기를 가져다가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제자들은 3년 반 만에 또 한번 갈릴리 바다의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들뜬 분위기 보다는 모두들 침묵 속에 묵묵히 주께서 주시는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둘러앉아 주님이 손수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하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선생님이 안 계신 틈을 타서 한바탕 사고를 치고 나서 뒷수습을 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때마침 돌아오신 선생님이 꾸중을 하시는 대신 식탁 위에 맛있는 피자와 콜라를 한 상 차려놓고 맛있게 먹으라고 하실 때 어찌할 줄 모르고 눈치만 살피며 피자를 먹고 있는 장난꾸러기 악동들의 마음과 같지 않겠습니까? 

  지금 자기들 앞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렇게 존경하고 신뢰하며 따르던 선생님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죽는 자리까지라도 따라가겠다고 큰 소리하였던 그들이었지만 몇 일 전 주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게 되자 두려워 숨을 죽이고 지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죽으셨던 분이 이처럼 다시 살아 돌아오셨고 오늘이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한 사람 호들갑 떨면서 주님 앞에 나서 이 어찌된 일이냐고 여쭈어볼 자신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주님의 말씀을 기다릴 뿐입니다.    

  주님의 비참한 고난과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이었던 그들은 다시 살아오신 주님 앞에 두려움과 죄송함으로 할말을 잃고 있습니다.  감히 선생님의 제자라고 말하기가 부끄럽고 자신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금방 바다에서 기막힌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 일로 흥분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들뜨고 가벼웠던 지난 날의 감정과 행동들은 조심스런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실지 잠잠히 듣고 있을 때지 무슨 변명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입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그 일로 마음이 무거워 죄책감에 눌려 지내고 있던 중입니다.   그날 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과 눈이 딱 마주쳤을 때 그리고 마침 닭이 울었을 때 비겁하고 배신자였던 자신이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으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던 베드로였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 돌아오신 것을 보고 너무 기쁘고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날의 부끄럽고 비겁한 행동에 머리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런 자신에게 벌써 세 번씩이나 찾아와주셨고 오늘은 드디어 대놓고 질문을 하시니 뭐라고 대답을 드려야 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전 같으면 큰 소리하며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하고 싶지만 지금은 무슨 대답도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린 말씀은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세 번 되풀이하셨고 베드로는 이 질문에 똑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에는 마음이 괴롭고 죄송스런 베드로가 근심스런 자세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미 내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던 주님이시니 지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이니 내가 다른 무슨 대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는 조심스런 대답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개인적으로 세 차례나 똑 같은 질문을 하신 것은 지난 날 한 자리에서 세 번씩이나 스승을 배반했던 사람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심이 아닐까요?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기에 그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셨고 그를 회복시키시려고 세 번씩이나 찾아와주셨으며 지금 세 번 연거푸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고 대답을 들으심으로 베드로의 추락된 명예와 체면과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사랑하기에 주신 회복의 기회입니다.    용서하셨기에 주시는 회복의 기회입니다.   주님은 이미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이제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께서 우리에게도 똑 같은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 내 속마음을 감추고 포장하고 꾸며서 보여드리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는 나를 꾸미고 내 본심을 감추고 위장할 수 있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열어 보여드리며 ‘주께서 나를 아십니다’ 고백할 뿐입니다.    그때 내 본심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든가 나만 그런 것 아니고 다른 친구들도 배신하고 떠났는데 왜 나에게만 책임을 물으시는가 변명할 것도 아니라 차라리 솔직하게 내 마음을 주께서 잘 아십니다 하고 손들고 나서는 길이 최선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질타와 비판에 억울하다고 볼 맨 소리로 불평하며 뭐라고 반박하고 변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고 맞서 투쟁할 때가 아니라 잠잠히 침묵하며 주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한때 주님의 이름을 욕 먹이고 영광을 가리우고 배신하기를 손바닥 뒤집듯 하였던 일들을 변명하기보다는 ‘그래도 너는 아직 나를 사랑하느냐?’ 는 주님의 물으심에 솔직하게 대답할 때가 아닐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질문은 베드로의 실패에 대한 회복의 기회이며 동시에 믿음성장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질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실 때마다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이제 육신으로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양들을 맡기고 떠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양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시면서 특히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이 사명에 대해 책임을 지우실 만큼 베드로를 신뢰하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상황과 형편에 따라 마음이 오락가락하며 주님을 배신하고 다닐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주께서 맡기신 양들을 돌보고 먹일 위대한 목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을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맡기신 양들을 이끌고 주님이 가신 길로 인도해야 할 목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지금 주님은 베드로가 스스로 서도록 성장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번번히 실수하고 욕심 부리며 잘난 체 하던 미성숙한 제자에게 스스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양을 먹이고 돌보는 책임을 지는 일군으로 성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 길은 주께서 먼저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하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게 될 것이니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사도 요한은 이 말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다니며 살았지만 이제는 남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살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전에 베드로는 혈기로 일을 해결하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열성도 있고 리더십도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가장 우선이 되려고 다른 동료들과 자리다툼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고 할 때에 앞을 가로막으며 예수님을 꾸중하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하고픈 말 다하고 자기 좋은대로 행동하고 살던 자유인이었지만 이제 주님께 사명을 받은 후로는 그 자유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매인 사람이 되어 살게 될 것이라는 예고였습니다.   곧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폴란드 노벨상 수상자 생케비치가 발표한 장편소설 ‘쿼바디스’에 나오는 장면 중에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Quovadis Domine)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폭군 네로의 핍박을 피해 로마를 떠나가던 베드로 앞에 나타나신 주님이 ‘네가 내 양들을 버리고 가니 내가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들어간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 말씀의 뜻을 알아차리고 가던 길을 되돌려 로마로 들어가 성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순교합니다.  그것도 주님처럼 달릴 수 없으니 거꾸로 달아달라고 하여 거꾸로 못박혀 순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게 되리니 하신 말씀처럼 그는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의 길을 따르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에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새 삶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옛날의 베드로가 아니라 새로운 베드로의 길이 그 앞에 열렸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명령이셨습니다.   전에 어리고 미숙했던 사람이 아니라 성숙하고 책임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부활을 믿고 소망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처럼 수동적이고 미숙아로 머물러 있으면 안되고 스스로 일어서 주의 길을 따르는 사람으로 맡겨주신 양들을 먹이고 돌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쁩니까?  우리교회 어린이들을 보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귀엽다고 하여 언제까지 어린아이로 머물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먹어가는데 여전히 우유만 먹고 키가 자라지 않고 말도 시작하지 못한 채 몇 년이 흐르면 그야말로 부모의 근심거리가 됩니다.   언제까지 엄마 젖을 먹고 우유병을 차고 재롱을 부리며 어른들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려서 제힘으로 일을 해결하지 못할 때는 엄마 아빠가 기저귀 갈아주며 때를 맞춰 젖을 주고 보살피지만 때가 되면 자라고 또 스스로 서야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처음에 영적인 어린 아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태어나면 자라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유처럼 부드러운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도 척척 먹고 소화를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마다 비빔밥 먹는 우리 교회 어린 아이들을 보면 아직 매운 고추장을 못 먹는 아이들은 희멀건 밥에다 반찬 몇 가지 넣어 먹고 그것도 제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먹습니다.   그래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다 큰 어른들이 그렇게 먹으면 그것을 귀엽다고 할 수 없습니다.  먹기 편한 부드러운 음식만 먹고 거칠고 단단한 음식을 피한다면 아직 어린아이라는 증거입니다.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복 받으라, 평안하라는 말씀이나 위로의 말씀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때로는 죄를 지적하는 칼날 같은 말씀에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수술 받고 치료받으며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로 연단 받는 자리로 나아가야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떤 영적 아기들 중에는 너무 미숙하여 젖을 먹는 아기들처럼 입에 넣어주고 다 먹은 다음에는 등을 두드려 트림까지 시켜줘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금만 거칠고 단단한 음식을 주면 금방 토하고 배탈이 나버리는 영적 아기들이 있습니다.   아기 때는 젖을 먹고 트림만 잘해도 잘했다고 칭찬하지만 점점 성장하면 질긴 고기와 거친 나물도 척척 먹고 스스로 소화시키는 성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성장입니다.    아기들은 사랑을 받기만 하고 아직은 나눌 줄 모릅니다.   언제나 자기가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사랑이 딴 곳으로 가면 금방 토라지고 삐죽입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로 머물겠습니까?  우리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은 항상 유지해야 하지만 어린이의 유치함은 속히 버려야 합니다.   주 안에서 날마다 자라갑시다.   돌봄의 대상에서 형제자매를 먹이고 돌보는 사람으로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늙어 팔을 벌리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님께 사랑 받는 저 요한은 어떻게 될까요?’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께 사랑을 받는 절친한 친구이며 때로는 경쟁자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죽음이 그러할 것이라면 저 친구는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남겨둔다고 한들 그것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남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베드로가 걸을 길이 있고 요한이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각자 자신에게 부여된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 제자의 삶이고 주께서 베드로에게 원하시는 성숙한 목자의 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때 증인은 헬라어로 말투스 μάρτυς, 여기에서 영어 martyr가 왔으니 증인은 곧 순교자의 삶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세 번씩 제자들을 찾아와 만나주시고 부활을 확인시키시며 갈릴리 바닷가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은 바로 이 길을 담대하게 걸을 수 있도록 믿음을 한층 성장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른 아침 동이 트는 새벽에 찾아오셔서 아침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회복의 기회와 성숙한 제자의 삶을 살도록 복된 기회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슬픔, 부끄러움, 죄책감의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아오는 소망의 아침에 주님과 함께 복된 길을 걸어가는 증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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